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3화 (3/131)

3. 내가 뭐가 되겠다고 했다고?

“정녕 그것으로 끝이더냐? 정녕…….”

김 도령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도련님.”

입고 있던 도포와 비취색 답호를 곱게 되돌려주고 다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라온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김 도령을 볼 낯이 없었다.

이별을 먼저 고한 쪽은 김 도령이었기에 이런 말 전한다고 하여 미안할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안해하였다.

김 도령의 눈에 서린 충격의 빛을 보자 가엾은 마음에 고개가 한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 정말이냐? 정말 그리 말씀하셨단 말이냐?”

김 도령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도련님의 마음, 고이 간직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추억은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합니다.”

더 이상은 김 도령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가 없기에.

라온은 하얀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라도 하여 저 여린 마음, 조금은 달래 줄 수 있다면 그리 해주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것은 김 도령의 반응이었다.

라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 도령이 두 손을 덥석 맞잡아왔다.

“수고했으이.”

“네?”

뭐야? 이 난데없는 상황은?

“정말 수고했으이.”

지금껏 퍼렇게 질려 있던 김 도령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내려앉았다.

‘그분이…… 그분께서 그렇게 대단하신 분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 눈이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게야. 그 귀한 분을 몰라 뵙고 감히 연서를 보냈다니.’

저가 연서를 보낸 이가 지엄하신 임금님의 하나뿐인 금지옥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김 도령은 단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이대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어 사지가 벌벌 떨렸었다. 아니, 제대로 숨조차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여,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만나서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자칫 잘못하였다간 지금까지의 거짓이 들통 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연서를 쓴 것이 자신이 아니라 하면 영민하신 공주마마께서 어찌 나올까 두려웠다.

고민 끝에 삼놈이를 대신 내보냈다. 연서 몇 장으로 공주마마의 마음을 휘어잡은 녀석이니. 운이 좋다면 이 사태를 무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가능성만 믿고 삼놈이를 보낸 것이다.

녀석이 거부할까봐 만나는 사람이 뉘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리 쉬이 끝날 줄이야.

막혔던 숨통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수, 수고했으이, 정말 수고 많았으이.”

김 도령은 곁을 지키고 있는 최 마름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윽고 최 마름이 손바닥 크기만 한 비단 주머니를 갖고 돌아왔다.

허공에 흔들리는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엽전 소리가 들렸다.

“이거 받게나.”

김 도령은 라온에게 비단 주머니를 건넸다.

“이건…… 너무 많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액수에 라온은 당황했다.

"작은 성의일세.”

머뭇거리는 라온에게 김 도령이 다시 말했다.

‘왜 저러는 것일까?’

연모했던 이와 이별을 한 사내라면 보통은 시무룩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금은 아쉬운 기색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어쩐 일인지 김 도령은 사지에서 살아난 사람처럼 안도하고 있었다.

주는 돈이니 받긴 받지만 뭔가 미심쩍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를 좌초하는 법. 알아 좋을 것이라면 진즉에 알려 주었을 테지.

라온은 서둘러 호기심을 접으며 짧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하게. 그간 고마웠네.”

더는 연서를 쓸 일이 없으니 만날 일도 없었다.

눈인사를 건네는 김 도령과 일별한 라온은 최 마름을 따라 별채 뒷문으로 나섰다.

“수고했네. 어려운 일을 부탁했던 터라, 도련님께서 후하게 값을 쳐주셨다는 사실 잊지 말게나.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아니 되네. 혹여 잠꼬대라도 하면 안 돼. 알았는가?”

문을 닫기 직전, 최 마름이 쐐기를 박듯 다시 당부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미 제 입에 천근의 추를 달았습니다.”

마지막 다짐을 뒤로하고 라온은 김 진사 소유의 푸른 소나무 숲길을 되돌아 나왔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세우고 품에 갈무리해 뒀던 엽전을 꺼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김 도령이 성의라며 라온에게 건넨 돈은 무려 서른 냥이었다.

“이 돈이면 우리 어머니랑 단희, 올봄엔 고운 봄옷 한 벌씩 마련할 수 있겠다.”

어머니의 다 낡은 무명옷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었다. 껑충 자란 단희의 손목이 다 드러난 색동저고리도 영 신경 쓰였더랬다. 간밤에 돼지꿈을 꾸었나.

뜻하지 않게 이어지는 횡재에 라온이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늘은 드높았고, 바람은 제법 따뜻해졌으며, 주머니는 두둑했다. 주머니가 두둑하니 마음도 든든해졌다. 마음이 든든하니 발걸음은 날아오를 듯 가벼웠다.

타박타박, 날듯 뛰듯 걸음을 옮기며 라온은 엽전 꾸러미를 머리 위로 던졌다.

찰랑찰랑.

허공에 솟구친 엽전들이 서로 부딪혀 듣기 좋은 쇳소리를 흘렸다.

툭!

이윽고 손바닥으로 안착하는 엽전을 라온은 사랑스럽게 응시했다.

녀석들, 어여쁘기도 하지.

제법 묵직하게 받아지는 손 느낌이 좋아 라온은 김 진사 댁의 긴 담벼락을 따라 걷는 내내 엽전 꾸러미를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찰랑찰랑.

‘듣기 좋다.’

찰랑찰랑.

‘그런데 화초서생은 어쩌다 그리 되었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다.

그리 잘난 사내가 어쩌다 여인이 아닌 사내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 어느 여인이라도 손짓만 하면 저 품에 달려들 듯 생긴 분이 어쩌자고 순리를 거역하게 된 것일까?

찰랑찰랑, 찰……랑.

‘그런데 정말로 화초서생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

라온은 화초서생의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그리 애절했던 김 도령과의 연모를 단 한 순간에 지워버린 사내이니. 자신을 향한 일순간의 감정따윈, 이 밤이 지나가기도 전에 지워버리리라.

마음의 불안을 떨쳐버린 라온은 엽전 꾸러미를 품 속 깊이 갈무리하고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까부터 뒤통수가 따끔거리는데.”

휙, 고개를 돌려 소나무 숲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기분 탓이려나? 그나저나 너무 늦었다. 울 어머니, 많이 기다리시겠네.”

***

“박 가(朴家)야. 저 아이가 틀림없는 게냐?”

고요하던 소나무 숲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도포차림의 키가 큰 노인이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네. 저 아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더군.”

작고 통통한 체구의 옥색도포를 입은 노인이 붉은 도포 노인의 물음에 대답했다. 두 노인 모두 분명 사내 복색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도 얼굴에 수염이 없었다.

얼핏 보면 노파들이 남장한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

그들은 60년을 환관으로 살아온 판내시부사 박두용과 상선 한상익이었다.

“박 가(朴家)야. 어찌할 생각이냐?”

한 상선의 물음에 판내시부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그분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곁에 두어야지.”

“그분 곁에 두려면 궁의 심처까지 들여야 할 터인데…….”

“사내의 몸으로는 절대 갈 수없는 곳이지.”

“끝내 일을 벌일 생각이로군.”

"이제는 늙어 더는 궁에 있을 수도 없는 몸. 우리마저 궁을 떠나면 그분, 뉘에게 마음 가지 의지하겠느냐? 마음 붙일 곳 하나는 마련해 드리고 떠나야지.”

“그래서? 언제 할 테냐?”

“쇠뿔도 단숨에 빼라 하지 않던가? 채 가(蔡家)놈에게 손님 받을 준비하라고 전해라.”

“허나, 저자가 순순히 받아들일까?”

상선 한상익의 물음에 박두용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하늘엔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는 길에 물어보니, 저 집에 큰 우환이 생긴 모양이더군. 형편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으니, 어쩌면 곧 기회가 생길 것도 같구나.”

***

서두른다고 서둘렀건만.

어느새 사위는 짙은 어둠에 잠식되었다. 조족등을 밝히지 못한 밤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밤길을 걷는 라온의 걸음은 나비처럼 가뿐했다.

한 손에는 단희를 위해 구입한 질 좋은 약초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오늘 갓 잡았다는 소고기와 요즘 같은 계절엔 좀처럼 구하기 힘든 사과 몇 알도 함께였다.

흥얼흥얼, 라온의 입에서 모처럼 작은 노랫소리도 새어나왔다.

오늘은 그야말로 운수 대통한 날이었다.

김 역관 댁에서 보내온 열 냥과 김 진사 댁 막내 도련님 대신 화초서생을 만나는 값으로 받은 서른 냥. 합치면 무려 마흔 냥이라고 하는 큰돈이 단 하루 만에 손에 들어왔다.

마흔 냥.

돈 많은 댁에서야 아무것도 아닌 푼돈이겠지만 라온에겐 사백 냥, 아니 사천 냥보다 더 가치 있는 귀한 돈이라, 고마운 마음 그지없었다.

보릿고개가 코앞이라.

요즘 같은 시절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돈이었다.

한양에 온 이후, 운종가에서 상인들을 상대로 고민 상담을 해 준 대가로 한 푼 두 푼 받아 연명하던 것이 어느덧 3년이 훌쩍 지났다.

열일곱, 아직은 어린 어깨에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무겁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라온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 짐을 짊어졌다. 마음여린 어머니를 위해 씩씩하게 살아야 했고, 병약한 동생을 위해 건강하게 살아내야 했다.

“이거 보시면 울 어머니, 입이 떡 벌어지시겠네.”

이제 고갯길만 넘어가면 집이다.

집에 가면 이 돈으로 뭘 할 것인지, 어머니와 단희랑 밤새 이야기해야지. 평소 먹고 싶은 것도 맘껏 얘기해 봐야겠다. 오랜만에 어머니께 이 소고기로 맛난 국 끓여 달래야겠다.

고갯길 정상에 올라 집을 내려다보는 라온의 입가에 웃음이 한 가득 매달렸다.

“어머니, 단희야.”

라온은 고갯마루에서부터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작은 초가 마당에까지 이르렀다.

“어머니! 저 왔어요. 단희야, 나 왔다.”

희미하게 불을 밝힌 방문을 열며 라온이 소리쳤다.

어머니의 환한 얼굴을 기대하며, 복사꽃처럼 살풋 웃을 단희를 그리며 기쁘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뜻밖의 얼굴이 라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놈이, 자네 왔는가?”

운종가에선 제법 의술 뛰어나기로 유명한 송 의원이었다.

“송 의원님이 아니십니까? 여기 어쩐…….”

라온의 말끝이 흐려졌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라온을 맞이했다.

“라온아. 단희가…… 단희가…….”

우는 어머니의 등 뒤로 파리한 단희의 얼굴이 들었다.

“단희야.”

라온은 서둘러 단희의 머리맡에 앉았다.

“단희야, 나 왔어. 일어나 봐.”

병약하긴 했지만 라온이 돌아올 시간엔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나 라온을 반겨주던 아이였다.

그러나 단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나기는커녕 눈조차 뜨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제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네.”

라온의 물음에 송 의원이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병색이 너무 깊어 손을 쓸 방도가 없어“

"설마, 이대로 손 놓고 있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준비를 해야 할걸세.”

“송 의원님!”

라온이 송 의원의 말을 부정하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단희, 이제 고작 열다섯 살입니다. 살려주세요. 우리 단희 좀 살려주세요.”

“방도가 없어.”

“뭐든 해 주세요. 여기, 여기 돈 있습니다. 무려 마흔 냥입니다. 이 돈이면 삼(蔘)이든 뭐든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주세요. 네? 우리 단희, 살려주세요. 운종가 최고의 의원 아니십니까?”

“내 의술로는 무리야.”

“의원님…….”

송 의원의 말에 라온은 맥이 빠져버렸다.

라온은 고개를 돌려 잠든 동생을 바라보았다.

한 줌이 채 되어 보이지 않은 작은 몸집이 한없이 가여웠다.

열다섯이 되도록 병약한 몸 때문에 제대로 나들이 한번 해 본 적 없는 아이였다. 그 좋아하는 꽃구경도 원껏 해본 적 없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절대…… 이대로는 우리 단희 못 보내요.”

라온이 아랫입술을 아프게 사려 물었다.

그때였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네만…….”

등 뒤에서 들려온 송 의원의 말에 라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법이…… 방법이 있습니까?”

“있네. 마지막 방법이 하나 있네.”

“무엇입니까? 알려 주십시오.”

“어의(御醫)영감이셨던 김성동 영감의 진맥을 받게 하는 것이네.”

“어디입니까? 그분께선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서둘러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라온이 송 의원을 재촉했다.

그러나 송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찾아가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지. 허나…….”

“왜 그러십니까?”

“그분을 뵈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네.”

“돈…… 돈이라면 있습니다. 이걸 보십시오. 무려 마흔 냥입니다.”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네. 적어도 열 배는 더 있어야 해.”

“열 배라면……사, 사백 냥이나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단희, 저 아이의 병세를 치료하려면 그 정도 돈은 있어야 할걸세.”

“…….”

라온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흔 냥도 한 번에 만져보기 힘든 돈이었다.

그런데 사백 냥이라니…….

그 돈이라면 방 네 칸짜리 기와집을 열 채는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라온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단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든 할 겁니다. 우리 단희를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겁니다. 뭐든…… 그것이 무슨 일이든……!”

***

날이 밝기 무섭게 라온은 집을 나섰다.

단희를 살리기 위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고, 그러자면 한 사람이라도 더 고민 상담을 해줘야 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몇 배는 더 일하리라 의지를 다지며 운종가로 향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던 담뱃가게가 조용했다.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허풍 조금보태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오늘 무슨 날인가? 내일은 괜찮아지겠지?

그러나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라온에게 고민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이제는 진지하게 다른 일거리를 찾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는 라온의 앞에 한 늙은이가 찾아왔다.

작은 키에 통통한 체구를 가진 수염 없는 노인이었다.

“자네가 삼놈이인가?”

노인의 물음에 라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청색 비단 도포에 가슴에 붉은 띠를 두른 노인은 양반들이나 쓰는 폭 넓은 갓을 쓰고 있었다. 하고 있는 차림은 영락없이 지체 높은 양반사내였다.

하지만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느낌.

검버섯이 올라오긴 했지만 운종가의 상인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하얀 피부와 수염 한 자락 없는 말끔한 얼굴.

라온은 생경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내라기보다는 여인에 가까운, 그렇다고 여인이라고 하기엔 풍기는 분위기가 여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대체 이 노인의 정체가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사이, 노인이 라온의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운종가 삼놈이에게 오면 해결하지 못할 고민이 없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노인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야말로 오랜만의 손님인지라. 라온은 반색했다.

“허면…… 내 고민도 해결해 줄 수 있겠는가?”

“말씀해보십시오.”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나이도 불문한다지만…… 설마 저 연세에 마음에 품은 할머니라도 계신건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주상전하께서 계시는 궁궐에서 일을 하는 사람일세.”

“아하, 그러십니까? 그런데 무슨 고민이 있으신지?”

“요즘 궁에 들일 사람을 구하는 중인데…… 이게 워낙에 험한 일이다 보니 좀처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으이.”

“그렇습니까? 그런데 제 전문분야는 남녀 간의 연애상담입니다. 특히 여인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이 특기이지요.”

예상 밖의 고민에 라온은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노인은 들은 척도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뭐, 일이 험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보수도 두둑하고, 원한다면 몇 년 치 녹봉을 미리 지급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요즘 젊은 것들은 도무지 힘든 일은 꺼려해서 말일세.”

내내 바른 자세를 유지하던 라온이 노인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노인의 말에서 돈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보수가 두둑하다면 어느 정도인지?”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세.”

“몇 년 치 녹봉을 미리 지급한다는 그 말도 사실입니까?”

“사실이지.”

“그, 그럼 혹시…… 사, 사백 냥 정도도 미리 지급해 주실 수 있습니까?”

라온은 꿀꺽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정도면 한 3년 치 녹봉이겠구먼.”

“가능하겠습니까?”

“왜? 가능하다고 하면 자네가 할 텐가?”

노인의 은근한 물음에 라온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백 냥만 융통해 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라온은 날뛰는 심장을 애써 잠재우며 말했다.

사백 냥이면, 아픈 단희를 살릴 수 있다. 동생을 살릴 수 있는데, 무슨 일을 마다할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험한 일이네.”

“아무리 험한 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도 무거워야 하지.”

“원하신다면 벙어리 흉내라도 낼 수 있습니다.”

“궁에 들어간 후에는 상관없겠지만, 궁에 들어가기 전에는 자네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아니 되네. 할 수 있겠는가?”

“걱정 마십시오. 사백 냥만 융통해 주신다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없이 라온을 응시하던 노인이 품속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우선 여기에 서명부터 하게나.”

“이게 무슨 문서입니까?”

라온은 문서를 살피기 위해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나 노인의 두툼한 손이 교묘하게 가리고 있어 좀처럼 내용을 살피기 힘들었다.

“뭐, 별거 아니네.”

“별거 아니라면?”

“궁으로 들어가려면 몇 가지 사소한 절차가 필요한데, 그에 응하겠다는 내용의 사소한 문서라네.”

노인이 세필 붓을 라온에게 건네며 말했다.

“정말 사소한 절차가 맞겠지요?”

세필 붓을 받아든 라온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라온의 의심에 쐐기를 박듯 노인이 단호히 대답했다.

“그렇다네. 눈 한 번 딱 감으면 끝나는…… 그런, 사소한 일을 하겠노라 약조하는 아주아주 사소한 문서일세.”

***

닷새 뒤, 술시말(戌時末:저녁9시).

맑던 하늘에 검은 먹장구름이 몰려들더니 급기야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봄을 알리는 반가운 비였다.

그러나 인덕원의 감나무 집으로 향하는 라온은 빗물에 옷이 젖는지, 아니 숫제 비가 내리는지도 모른 채 걷고 있었다.

“집을 떠나는 건 처음이네.”

라온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귀인(貴人)의 도움으로 구한 사백 냥 덕택에 단희는 신의(神醫)라 불리는 김성동 영감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대로 계속 치료를 받는다면 반 년 안에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신의의 말에 라온과 그의 식구들은 서로를 감싸 안으며 한참이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전에 없이 행복했던 며칠이 지나고, 오늘이 밝았다.

오늘이 바로 귀인과 약조한 날이었다.

이번에 집을 떠나면 당분간은 집에 돌아갈 수

없으리라.

라온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향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잠시, 집을 떠나야 한다는 말에 단희가 준 것이다. 버려진 자투리 천을 모아 만든 향주머니 안에는 지난 가을에 따서 말린 꽃잎이 가득 들어 있었다.

향주머니를 주며 단희는 무척이나 울었다.

영민한 아이는 알고 있는 것이다. 라온이 집을 떠나는 일이 자신의 병과 무관하지 않음을.

라온은 서럽게 울어대는 단희를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걱정 마. 3년이면 끝나는 일이야. 어쩌면 종종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몰라.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슬퍼하지 마.”

흐느껴 우는 단희를 간신히 달래고, 역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겨우 집을 나섰다. 먼 곳까지도 들려오는 모녀의 울음소리에 라온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걱정 마. 무사히 돌아갈 테니까.”

라온은 향주머니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앞으로의 3년은 귀인에게서 융통한 사백 냥을 갚기 위해서 꼼짝없이 궁에서 보내야 하리라.

대체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궁에서 자신이 할 일이 무어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귀인은 그저 곧 알게 될 거라고 할 뿐이었다.

힘들고 험한 일이라고 하였으니, 분명 쉽지는 않을 터. 그러니 사백 냥이라고 하는 엄청난 돈을 그리 쉽게 융통해 주었겠지.

라온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가장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방도도 나름 세웠다.

“이곳이구나.”

감나무 세 그루가 심어진 낡은 기와집.

귀인이 일러주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에서 궁에 들어가기 위한 사소한 절차를 이행하게 될 것이라 했다.

라온은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계십니까? 안에 누구 계십니까?”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걸까? 분명, 이곳인데.

라온은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잠겨있지 않은 듯, 솟을대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대문 안으로 들어선 라온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웬 놈이냐?”

호통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나타난 걸까?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사내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에서 채 노인이란 분과 약속이 있어서 왔습니다.”

“엄공과 약속이 있다고?”

사내가 묘한 눈빛으로 라온을 빤히 쳐다봤다.

“과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던 사내가 문득 한쪽 옆으로 물러섰다.

라온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낸 사내는 그대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라온은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거대한 저택의 뒷마당이었다.

뒷마당의 오른쪽 모서리로 걸어간 사내는 크게 웃자란 비비추 사이로 교묘히 숨겨져 있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삐이걱.

오래된 나무문이 신음소리를 내며 입을 쩍 벌렸다.

문 안쪽에서 한번 발 담그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없는 지옥처럼 음산한 기운이 풀풀 풍겨났다.

사내는 문을 연 채로 말없이 라온에게 고갯짓을 해보였다.

"여기로 내려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라온이 사내를 향해 물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을 보며 라온은 숨을 멈췄다.

돌계단 곳곳에 피워놓은 횃불이 열린 문 안으로 들이닥친 바람에 불꽃을 일렁거렸다. 성질 포악한 날짐승의 혓바닥처럼.

라온의 얼굴에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저 어둠 끝에 있을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잡기 위해 라온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라온이 지하실로 사라지기 무섭게 나무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이제 당분간 이 나무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

사방이 꽉 막힌 지하 밀실.

지하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불을 밝힌 수십 개의 횃불 덕에 사위는 대낮처럼 환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선 라온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대체 뭘 하는 곳일까?

내려가라 하여 지하로 내려오긴 했지만 그 다음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뭐하고 있는 게냐? 이 앞으로 썩 오질 않고.”

라온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하실의 한 구석, 작은 술상을 마주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놈이 귓구멍이 틀어 막혔나? 오라는 소리 안 들리는 게냐?”

노인의 재촉에 라온은 서둘러 그 앞으로 달려갔다.

그제야 만족한 듯 노인은 이를 드러내며 흐흐 웃었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뚝 그친 노인은 술병을 들어 입 안에 들이부었다.

노인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술을 보며 라온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밀폐된 지하실에서 만난 낯선 노인의 존재가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라온을 긴장시킨 것은 노인의 등 뒤에 주렁주렁 매달린 기기묘묘한 기구들이었다.

작고 큰 도끼들, 끝이 날카롭게 갈린 작은 단도, 그리고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작은 갈고리들과 끝이 뾰족한 작은 쇠꼬챙이들.

흡사 고문실을 연상케 하는 광경에 라온은 목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힐끗, 술병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의 눈에 짓궂은 기운이 서렸다. 탁, 소리 나게 술병을 내려놓은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흐흐. 네놈이냐? 겁도 없이 고자가 되겠다고 자청한 놈이?”

“……?”

응?

이건 또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야?

내가 뭐가 되겠다고 했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