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저놈…… 재밌지 않으냐?
제일 먼저 라온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새까만 눈이었다.
세상의 모든 차고 시린 것을 한데 모아 만든 듯 보이는 투명한 먹빛의 눈동자. 상처 입은 짐승처럼 알알하니 쓰리고 저린 기운을 품은 검은 눈이 라온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쏘아오는 화살처럼 차고 시린 눈빛이 라온의 두 눈을 찔러왔다. 서늘한 눈빛에 찔린 라온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누구…… 십니까?”
라온은 앵무새처럼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는 넌 누구냐?”
이영(李?)은 묘하게 눈길이 가는 어린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찌 보면 계집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자라다 만 소년 같은 얼굴이다.
“……만나자고 서안을 보내신 분이십니까?”
“맞다. 허면, 네가 그 서안을 받은 자더냐?”
“…….”
영의 물음에 라온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왼고개를 돌렸다.
지금 서안을 받고 말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서 있는 이가 여인이 아닌, 사내라는 점이다.
사내라니, 사내였다니!
김 진사 댁 막내도령의 취향이 이리 남다를 줄은 미처 몰랐다.
연서를 대신 써주긴 했지만 여인이냐고 물어본 적은 없었다. 사내가 연모를 품은 상대, 당연히 여인이라 단정했던 것이 실수였다.
제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 라온은 당황했다.
그러다 한순간, 김 도령의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네. 연모하는 마음만으로는 우리 앞에 놓인 산이 너무 높다네. 그러니 이쯤에서 이별해야지.’
갈 곳 몰라 황망히 흔들리던 라온의 시선이 눈앞의 아름다운 사내에게로 향했다.
“아하…….”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연모를 하는 김 도령의 얼굴이 어찌 그리 아픈 것인지. 처음부터 불행한 끝을 생각하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린 도령께선 사내를 연모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내이니. 어린 도련님의 연모가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김 도령의 말대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니. 결실을 맺을 수 없는 서러운 사랑이 라온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어떡합니까?”
눈앞의 이 사내의 마음도 김 도령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리라.
라온은 저도 모르게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였다.
“무슨 짓이냐?”
영의 사나운 눈빛에도 라온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는 그 속내 내보이셔도 됩니다.”
그 마음 다 알고도 남음이었다.
이리 시치미 뚝 떼고 있어도 그 속이 얼마나 새카맣게 탔을까? 오죽했으면 이리 만나자 했을까? 오죽했으면 단숨에 이리 얼굴 마주하는 것일까?
저를 내려다보는 먹빛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라온이 말을 이었다.
“저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저도 그리웠습니다. 그러나…….”
안 될 사이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연모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 라온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글썽 맺혔다. 마치, 자신이 김 진사 댁 막내아들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 감정이입 너무 됐다.’
라온은 주먹을 들어 눈가에 매달린 습기를 쓱쓱 닦아냈다. 서둘러 물기를 감춘 라온이 언제 울었냐는 듯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서 이럴 것이 아니라 나가시지요?”
“나가?”
“실은…… 처음에는 얼굴 마주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그저 몇 마디 이야기만 나누고 돌아가려 하였지요. 하지만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함께 뭐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하러?”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라온이 검지를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 이리 만났으니 추억 한 자락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요. 추억이 있으면…….”
이별도 그리 아프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쓸쓸한 뒷말일랑은 입 속에 다시 밀어 넣은 채 라온은 잰 몸짓으로 방을 나섰다. 김 도령을 대신하여 이 고운 분께 행복한 추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함께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어서 나오십시오.”
어느새 초가 마당 한가운데로 나간 라온이 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별스런 녀석이로군.”
뒷짐을 진 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영의 얼굴에 보일 듯 말듯 균열이 생겼다.
그때였다.
“어찌하올까요?”
뒷마당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영이 대답했다.
“조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네?”
“감히 겁도 없이 우리 연이에게 연서를 보낸 자의 배포, 얼마나 큰 것인지 가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상대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한 영은 마당을 가로지르는 라온의 뒤를 쫓았다.
**
얼마 후.
영과 라온은 상반된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여기서 밥을 먹잔 말이냐?”
“여기 아주 유명한 국밥집입니다. 저기 보이는 저 할머니께서 국밥을 만드시는데, 오랫동안 궁에서 수라간 상궁으로 지내셨던 분이랍니다.”
라온은 대단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잔뜩 들뜬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영은 시큰둥하게 맞받아칠 뿐이다.
“그러냐?”
“수라간 상궁이라니까요?”
“그래서?”
수라간 상궁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영 자각하지 못하는 영이 답답해 라온은 제 가슴을 쾅쾅 쳤다.
그때였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멀지 않는 곳으로 소반을 든 노파가 다가갔다.
“이런 염병땀병에 빌어먹을 속병 걸릴 놈들아. 이제 그만 좀 와라. 어떻게 니놈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처오냐. 집에서 기다리는 처자식들 생각은 안 나냐? 이 십장생에 그려진 개나리같은 놈들아. 국밥 처먹으려고 기다리는 시간에 집에 가서 귤이나 까서 처먹어라.”
걸쭉한 노파의 욕지거리가 국밥을 받는 두 사내에게로 쏟아졌다.
국밥 먹으러 와 느닷없이 욕지거리를 먹어댔으니. 당연히 화가 날 상황임에도 사내들은 도리어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이 운종가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욕쟁이 할멈’의 국밥 집이란 걸 알 리 없는 영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저자들, 욕먹는 게 취미인가?”
라온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욕먹는 게 취미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헌데, 어찌하여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욕을 먹고도 저리 웃는단 말이냐?”
“뭐랄까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 같은 것, 아닐까요?”
“욕먹는 게 아련한 추억이라……. 한 대 맞기라도 하면, 아련하다 못해 온몸이 욱신거리며 저리는 추억이 되겠구나.”
이 사람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라온은 말하는 족족 찬물을 끼얹는 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런 게 아니라…… 왜 누구나 어린 시절에 저렇게 할머니에게 욕먹었던 기억 한 자락씩 갖고 있지 않습니까?”
라온의 항변에 영이 팔짱을 끼며 근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우리 할머닌 욕 같은 건 절대 안 하신다.”
“그럼 할아버지가?”
“할아버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지.”
“옆집 할머니라도?”
“옆집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옆집이 없어? 어디 첩첩산중에서 살다 오셨나?
“그럼 이불에 실수로 오줌이라도 지릴 때면 어머니께 몽당 빗자루로 등짝 한 대 맞던, 그런 그리운 기억…… 없으십니까?”
“나는 그런 덜 떨어진 실수 한 적 없다. 설령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감히 내 몸에 손 댈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 그렇습니까?”
뭐야? 양반들은 그런 거야? 할머니가 손자한테 절대 욕 같은 거 안 해? 아들이 이부자리에 오줌을 지려도 어머니가 자식 등짝도 못 때리는 거야? 아, 너무 삭막한 정서다.
“아무래도 도령께선 화초서생이신 모양이군요.”
“화초서생?”
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고운 말이긴 했지만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단어였다. 게다가 그 생소한 단어가 하필이면 자신을 지칭하고 있으니, 호기심이 일었다.
“모르십니까?”
“모른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지체 높은 댁 규중규수마냥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그저 곱게만, 귀하게만, 그렇게 화초처럼 자라신 분을 화초서생이라고 부르지요.”
욕 한번 들어본 적 없고, 등짝 한번 맞아보질 않았으니. 눈앞의 사내는 지금껏 보아왔던 화초서생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라온은 확신하는 눈빛으로 영을 응시했다. 영의 반듯했던 이마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구겨졌다.
“그러니까 네 눈에는 내가 곱고 귀하게, 화초처럼 자란 그런 사내로 보인단 말이냐?”
“아닙니까?”
“아니다.”
칼로 베어내듯 짧고 선뜻한 목소리로 영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단호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라온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네. 그렇겠지요.”
“절대 아니다.”
“네. 아니라고 치겠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지금껏 만났던 화초서생들은 열이면 열, 다 이런 반응을 보였다.
라온은 다 이해한다는 듯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늘한 표정으로 라온을 쳐다보던 영이 막 무슨 말을 하려 할 때였다.
“그만들 씨부리고 이거나 처먹어라.”
욕쟁이 할멈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영이 무심한 표정으로 할멈을 응시했다.
“어디다가 눈깔을…….”
욕으로 무장한 할멈의 입이 막 열리려는 찰나.
무엇을 보았는지, 욕쟁이 할멈의 눈이 별안간 찢어질 듯 커졌다.
자신을 향한 사내의 눈빛,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차가운 시선이었다. 물론, 그 정도에 얼어붙을 욕쟁이 할멈이 아니었다.
산적이 형님 할 정도로 흉악한 면상의 사내들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넘게 보아왔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어찌된 이유에선지 딱따구리처럼 따따따 쏘아붙이던 할멈의 욕이 입안으로 쏙들어갔다.
‘저, 저분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영을 바라보던 할멈은 놀랍게도 갓 시집온 새색시마냥 조용히 소반을 내려놓고는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어?”
욕쟁이 할멈의 욕을 잔뜩 기대하고 있던 라온은 돌변한 할멈의 태도에 실망하고 말았다.
‘왜 저러시지?’
그러다 마주 앉아 있는 영의 얼음으로 두른 듯한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싸늘한 눈빛이 욕쟁이 할멈의 유쾌한 욕마저 막아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라온이 불평하듯 말했다.
“장유유서(長幼有序)도 모르십니까?”
“장유유서?”
“아무렴요. 나이든 분이 음식을 내오시면,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쏘아보는 게 어디 있습니까?”
라온의 말에도 영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훈계라면 그만둬라. 사람마다 다 그에 맞는 형편이라는 게 있다. 게다가 가짜 양반 행세나 하는 놈에게 훈계를 들을 정도로 난 쉬운 사내가 아니다.”
“네네. 가짜 양반 행세나 하는 놈이 할 말은 아니……컥!”
라온은 마시던 물을 뿜고 말았다. 그리고 귀신을 본 사람처럼 영을 바라보았다.
드, 들켰어?
***
들키고 말았다.
연신 식은땀을 흘리던 라온은 일단 너털웃음을 흘리며 사태를 무마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가짜양반이라니. 허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의 날카로운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열심히 생각을 굴렸다.
어떻게 들킨 거지? 말투 때문인가?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심각한 사태였다. 라온이 가짜양반인 게 들켰다는 것은, 김 도령을 대신하여 이곳에 나왔다는 것도 들킨 것과 진배없었다.
아니,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양반이 아닌 자가 감히 양반 행세를 했으니, 자칫 잘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음이었다. 등 뒤로 연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른 초봄의 날씨라. 아직 더울 리 없건만, 라온은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눈……. 마치 속내를 훤히 꿰뚫어보는 듯한 영의 눈빛에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화, 화초서생께선 농이 심하시군요.”
라온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영의 서늘한 눈빛은 거둬지지 않았다.
“제법 흉내는 잘 내었다.”
“흉, 흉내라뇨?”
당황한 탓에 라온은 김 도령 못지않게 말을 더듬었다.
“완벽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
“완벽하지 못했습니까? 헉!”
바보. 이렇게 말하면 인정해버리는 게 되잖아.
라온은 서둘러 주먹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딴에는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라온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영이 입을 열었다.
“너의 습관 때문이었다.”
“습관이요?”
“너는 나와 시간을 함께 보내자며 습관처럼 운종가로 향했다. 너를 탓할 것은 없지. 원래 사람이란 낯선 사람과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가장 익숙한 곳을 찾는 습성이 있으니.”
“…….”
“그것이 시작이었다. 너는 다른 양반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실수를……?”
영이 책을 읽듯 단숨에 대답을 이어나갔다.
“첫째, 스스럼없는 너의 몸가짐. 둘째, 걸음걸이. 셋째, 사람을 대하는 너의 태도. 넷째, 장소와 자리를 고르는 너의 낮은 안목.”
라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완벽하다 생각했는데, 모든 게 다 엉망이었단 말인가?
이상하다. 김 도령도 분명 완벽하여 절대로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했는데……. 그보다 이 사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많은 걸 봤단 거야? 엄청난 관찰력이다.
유감스럽게 영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모든 면이 부자연스러웠지만, 그중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은 바로 이곳이다.”
“이곳이라고요?”
라온이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곳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평범한 국밥집이었다. 대체 이 평범한 국밥집의 어디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일까?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군.”
“이상한 점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도무지 찾을 수 없군요.”
영이 가볍게 혀를 찼다.
“네 생각대로 이 국밥집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문제는 네가 날 이곳으로 안내했다는 점이지. 양반이 중요한 첫 만남에서 이런 장소를 고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렇다면 네가 이곳을 고른 이유가 무엇일까?”
“…….”
“평소 네가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면 이해가 되겠지. 그리고 이리 허름한 국밥집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양반은 아닐 터.”
라온은 ‘아’ 하고 낮은 탄성을 흘렸다.
과연,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이라면, 첫 만남에서 이런 곳을 고를 리 없다. 아니, 굳이 중요한 자리가 아니라도 양반이 이 국밥집을 이용하는 걸 거의 본적이 없다.
김 도령과 화초서생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마음이 격한 나머지, 그만 평소 이용하던 친숙한 국밥집을 찾은 게 실수였다.
“자, 이제 들어보자. 네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영은 팔짱을 끼고는 느른한 표정으로 라온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감히 무람하게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거침없는 행동이며, 추억 한 자락 만들자 하는 태도며.
영이 알아본 김 도령은 그런 자가 아니었다.
간덩이가 좁쌀보다 작은 자. 하여, 만나자는 서신을 받고도 나오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 자임을 알면서도 굳이 그 자리에 나간 것은 혹시나 나올지 모른다는 서푼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또한, 대체 어떤 자인지 궁금했다.
도도한 누이의 마음을 몇 장의 연서로 흔들어 놓은 자. 여인으로 태어난 것이 천추의 한 될 정도로 뛰어난 재기(才氣)를 지닌 누이는 웬만한 사내는 사내 취급도 안 했다.
시시한 사내와 사느니 일평생을 혼인하지 않고 살겠노라 선언했던 그 오만도도 했던 누이가 변심할 정도로 대단한 사내가 뉘인지.
궁금증이 일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누이를 사칭하여 이곳에 나왔다, 그 사내를 보기 위해.
그런데 실망스러웠다. 아니, 분노가 일었다.
“감히 양반도 아닌 놈이 양반의 행세를 해?”
“그것이 아니라…….”
라온이 안절부절못하자 영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내가 어찌 저리 나약하단 말인가.
더더욱 라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냐?”
“저는 다만…….”
변명거리를 찾아 바쁘게 생각을 굴리던 라온은 체머리를 흔들었다.
상대는 자신의 생각보다 똑똑한 사내였다. 더 이상의 거짓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리라.
라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영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못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사정이 그리 되었습니다.”
“…….”
“말씀하신 대로 소인은 지금껏 연서를 보냈던 김 도령이 아닙니다. 소인은…… 도련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나온 심부름꾼입니다.”
“감히 양반을 사칭한 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렷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을 것입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벌을 받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이 일로 인해 어머니와 단희에게 행여 불똥이 튀지 않을까, 그것이 두려웠다.
영은 고개를 조아리는 라온을 말없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렇게 일각이 지나고…… 이각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초조함에 라온의 입술이 하얗게 마를 때쯤, 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연서는 뉘의 솜씨더냐?”
“네?”
“그 연서 역시…… 네가 쓴 것이더냐?”
연모하는 여인의 앞에 당당히 나서지도 못하는 소인배의 연서치고는 너무도 훌륭한 문장이었다.
연서를 쓴 필체나 내용 곳곳에 흐르는 기개와 강개가 높고 굳세기가 비견할 곳이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절, 절대 아닙니다.”
라온은 죽기 살기로 손사래를 쳤다.
얼음골처럼 차갑게 굳어버린 영의 얼굴은 흡사 저승사자를 연상시켰다. 연서마저 내가 썼다는 걸 알면 당장에 치도곤을 면치 못하리라.
“정말이냐?”
영의 표정이 다시 차가워졌다.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던 라온이 슬쩍 눈동자를 돌렸다.
“…… 접니다."
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곧 이어질 서릿발 같은 호통을 생각하며 라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조용했다. 라온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영의 표정을 살폈다.
어라?
무슨 연유에서인지 북풍한설처럼 차고 매서웠던 그의 표정이 조금 눅진해졌다. 줄곧 끼고 있던 팔짱도 풀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로 영은 라온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감히 양반을 사칭하고 농락한 죄를 어찌해야 할까?”
“밀고라도 하실 것입니까?”
“내가 어찌하길 바라느냐?”
“집에는 저만 바라보는 노모와 병을 앓고 있는 어린 누이가 있습니다.”
말과 함께 라온은 한껏 처량한 눈빛으로 영을 응시했다.
커다란 눈동자에 금방이라도 와르르 쏟아질 듯한 눈물 벽이 생겼다. 라온의 가련한 표정은 설사 돌부처라 하더라도 측은지심이 생길 정도로 처연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영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대개가 그런 말을 하더구나.”
“거짓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너의 사사로운 사연엔 관심 없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너의 죄를 어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 같으니.’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면, 절대로 잡혀갈 수 없다. 어떻게든 이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
“화초서생의 동생이다 생각하시고 가엾게 여겨 주시면, 죽을 때까지 이 은혜, 잊지 않을 것입니다.”
“너 같은 동생, 없다.”
무른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 말라는 듯 영이 단칼에 잘라냈다.
“그럼, 어찌하면 됩니까?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밀고만 하지 않으신다면, 어떤 일이라도…….”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
잠시 생각하던 영이 말을 이었다.
“내 사람이 되어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 합죠. 화초서생의 사람이 되겠…… 네?”
풀 죽은 목소리로 영의 말을 따라하던 라온은 놀란 얼굴을 번쩍 들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귀가 어두운 것이냐? 내 사람이 되라고 하였다.”
누이의 마음을 단박에 뒤흔들 만한 글 솜씨. 감히 태연하게 양반을 사칭하는 큰 배포 하며. 보통이 아니었다.
천한 신분이 걸리긴 했지만, 잘만 활용하면 어디든 요긴하게 쓰일 것이리라.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놈을 발견한 탓에, 영의 입매가 길게 휘어졌다.
‘손아귀에 들어온 물고기를 어떻게 요리할까’라는 표정의 영에 반해, 라온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다.
뭔가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화초서생의 표정.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그의 시선.
혹시…… 혹시…….
라온은 본능적으로 제 가슴어림을 감쌌다.
설마 눈치챈 거야?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가짜 양반행세는 쉽게 들통 난다고 하여도 이것만큼은 절대 들통 날 리 없을 터인데.
그렇다면……?
그래, 화초서생은 본디 사내를 좋아하는 사내였다. 그렇다면 나를 사내로 생각하고 자신의 사람이 되라는 말인데……. 만약, 내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땐 정말 파국이다. 돌이킬 수 없으리라.
“다른 건 안 되겠습니까? 제발 화초서생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만은 거둬주십시오.”
화초서생에겐 김 도령이 있지 않습니까? 그새 마음이 변하신 것입니까?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화초서생의 사람이 되는 것만 빼고 뭐든 하겠습니다.”
“죄지은 놈이 조건이 많구나.”
“그것이 아닙니다.”
“긴말 하지 마라. 차후 너를 부를 것이다. 그땐,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 한다, 뭐든. 알겠느냐?”
“뭐든 말입니까?”
라온의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순간, 영춘각의 기녀 매창이가 보여줬던 춘화첩이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이유일까?
춘화첩에 그려져 있던 기기묘묘한 그림들이 거머리처럼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도련님은 어찌합니까? 김 도령은 어찌하고…….”
라온의 말에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 듯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자를 잊고 있었군. 그자에게 가서 전해라. 감히 품어서는 안 될 연모를 품은 죄, 그것도 모자라 감히 속이려 한 죄, 죽어 마땅하지만 이번만 용서해주겠노라고. 그러니 지금까지의 연모는 그저 마음속에만 품고 살라 전해라.”
“너무하십니다.”
연모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입니까? 이리 쉽게, 이리 단호히 돌아설 수 있는 마음이란 말입니까?
라온은 그동안 김 도령의 연모를 지켜봐왔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며 이별을 이야기할 때의 김 도령을 떠올리니 영의 매정한 단정이 너무 서러웠다. 마치 자신이 배신당한 듯 울분마저 솟구쳤다.
속엣 말을 꾹꾹 내리누른 라온은 김 도령의 절절한 전언을 읊조렸다.
“도련님께선 행복한 기억을 가슴깊이 간직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연모했던 그 마음, 차마 입 밖에 내진 않겠지만 평생토록 기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산이 너무 높아 이별을 고하긴 하겠지만…… 일평생, 주고받았던 마음을 추억삼아 살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리까지 말을 했으니, 저도 사람이라면 뭔가 느끼는 것이 있겠지. 저도 사람이면 일말의 연민이라도 느끼겠지.
하지만…….
“그렇군.”
영은 시종일관 냉정할 뿐이다.
그 매정함에 화가 난 라온이 불끈 주먹을 쥐고는 죽어라하고 영을 노려보았다.
“왜? 무에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이, 이……짐승!”
후다닥 국밥집을 뛰쳐나가는 라온을 보며 영은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뭐야, 저거.
***
“별난 놈이로군.”
수표교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던 영은 입가를 길게 늘였다. 그의 시선은 수표교 다리 아래에 있는 라온에게 향해 있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뉘인데.’
국밥집을 뛰쳐나가 그대로 줄행랑을 칠 줄 알았던 라온은 영이 국밥집을 나오길 기다렸다 다시 국밥집 안으로 돌아왔다.
제 딴에는 영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한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영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라온은 주문한 뒤 손도 대지 않았던 국밥을 기어이 챙겨 나오는 알뜰함을 보였다.
무얼 하려 저러나 싶어 뒤를 쫓았더니, 이곳 수표교 다리 아래에 터를 잡고 사는 어린 거지들에게 국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영은 느른한 얼굴로 라온을 주시했다.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웃음을 한껏 사려 문 라온이 땟물 가득한 거지 아이들에게 국밥을 나눠주는 모습이 영의 망막에 맺혔다.
느린 시간 속에서 라온의 웃음은 고스란히 영의 눈에 각인되었다.
라온의 이마에 흐르는 땀은 그의 뇌리에, 그리고 거지 아이들을 보듬는 라온의 손길은 그의 가슴에 새겨졌다.
참으로 이상한 녀석이었다. 자꾸만 눈길이 가는 신기한 녀석.
말없이 지켜보던 영이 불현듯 허공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율아!”
그의 낮은 부름에 검은 장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 시립한 사내를 향해 영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너 보기엔 어떠하냐?”
“무슨 말씀이오신지?”
영이 라온을 턱짓하며 말했다.
“저놈…… 재밌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