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1화 (1/131)

구르미 그린 달빛

윤이수

1. 운종가 삼놈이.

땅에서부터 봄이 오고 있었다. 파릇한 생명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귀밑 자분치를 날리는 바람에도 제법 훈훈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잎새달 초하루(4월 1일), 한양의 운종가. 사람이 구름처럼 모인다 하여 운종가라 불리는 거리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담뱃가게는 오늘도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르것어.”

담뱃가게 안, 평상에 앉아 있던 사내가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문을 열었다.

“삼놈이, 난 암만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것어."

평범한 장정보다 덩치는 두 배 이상 크고, 키도 어지간한 사람 머리 하나는 웃자란 사내. 생긴 모양이나 하는 짓이 흡사 곰 같아 곰 서방이라 불리는 그는 반촌(泮村)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는 천 서방이었다. 언제나 미련한 곰처럼 느릿느릿, 급할 것 없던 그가 오늘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한 모습이다. 천 서방은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맞은편의 어린 사내를 응시했다. 겨울 밤하늘을 담은 듯 맑게 빛나는 커다란 검은 눈, 잇꽃처럼 붉게 반들거리는 입술, 그리고 설원처럼 새하얀 피부.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봄 들판의 꽃처럼 싱그러운 어린 사내는 어찌 보면 여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미려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삼놈이, 나는 암만 생각해도 모르겠단 말이시. 그러니 자네가 한번 말혀 봐.”

앞뒷말 모두 잘라먹은 천 서방의 재촉에 삼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진정부터 하시고,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그것이 말이시…….”

천 서방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참, 사람 답답허이.”

“저러니 곰 서방이지. 달리 곰 서방이겠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서 있던 사내들이 답답하다는 듯 지청구를 날렸다. 매일같이 한 무리의 사내들이 어김없이 찾는 이곳은 구 영감의 담뱃가게였다. 구 영감의 담뱃가게는 두 가지 이유로 유명했다. 첫 번째는 한양에서 가장 품질 좋은 담배를 파는 곳으로 유명했고, 두 번째는 운종가 사람들의 고민 상담을 하는 곳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곳에 오면 풀리지 않는 문제가 없었다.

특히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그중에서도 여인의 마음에 관한 일이라면 ‘삼놈이’를 찾으면 그야말로 직방이었다. 덕분에 구 영감의 담뱃가게는 여인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사내들로 연일 문전성시였다.

“천 서방 아저씨, 말씀해 보세요. 이번엔 아주머니께 또 무슨 잘못을 하신 거예요?”

좀처럼 말문을 떼지 못하는 천 서방을 대신하여 삼놈이 물었다.

“잘못은 무슨 잘못!”

정곡을 찔린 천 서방이 펄쩍 뛰었다.

“아저씨.”

삼놈이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천 서방을 빤히 쳐다보았다.

“구신 같은 놈.”

결국 천 서방이 고개를 푹 숙였다. 삼놈이, 저놈은 속일 수가 없어. 아무리 시치미를 떼도 어찌 저리 남의 속내를 훤히 꿰뚫는 것인지. 천 서방은 푸념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삼놈이 운종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3년 전, 여름이었다. 어디서, 뭘 하다 이곳까지 흘러들었는지 알 길 없었으나, 어지간한 계집아이 뺨칠 만큼 고운 미태로 운종가 아낙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홀려 버렸다. 어디 생긴 것뿐일까? 얼굴이면 얼굴, 언변이면 언변, 글이면 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갖춘 잘난 놈이었다. 하여, 운종가 사람들은 그를 삼놈이라 불렀다. 난 놈, 될 놈, 할 놈이란 뜻의 삼놈이. 뭐든 갖춘 잘난 놈이라 ‘난 놈’이라 하였고, 저리 잘났으니 뭘 해도 될 놈이라 ‘될 놈’이라 하였으면, 또한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할 놈’이라 할 놈이라 하였다. 즐겁게 살라는 의미로 할아버지께서 지어줬다는 ‘라온’이라는 이름을 아는 이는 이 운종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천 서방이 억울하다는 듯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아주 우리 여편네 속을 알다가도 모르것다니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계집 속은 모르겠다는 말이 아주 딱이라니께.”

“무슨 일인데요? 또 아주머니께 못났다고 하신 거예요?”

“아녀. 전번에 삼놈이가 그런 말 하면 여편네가 싫어한다고 혀서 그 이후로는 입도 달싹 안 혔다니께.”

“그럼 아주머니께선 언제부터 화가 나신 거예요?”

“사흘 전부터 도끼눈이라니께. 아주 사람을 잡아먹을 태세여.”

“사흘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라온의 물음에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이던 천 서방이 커다란 눈동자를 뒤룩 굴렸다.

“뭐, 별일은 없었고. 여편네가 새로 옷을 한 벌 맞췄어.”

“아주머니께선 당연히 예쁘냐고 물으셨겠네요?”

“암만. 그래서 내가 삼놈이 가르쳐 준대로 ‘좋다’ 혔지. 그런데…….”

“아주머니께서 또 물으셨겠죠. 정말 좋아요? 하고 말이죠.”

“어찌 그리 잘 아는겨? 내 마누라지만, 여편네가 참말로 요상혀. 좋다, 한 마디 했으면 그냥 들어 처먹어야 할 것이 아니여. 분명 좋다고 혔는데, 또 묻잖여. 진짜 좋아요? 하고 말이여. 그래서 좋다, 아주 좋다, 혔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주 코맹맹이 소리를 혀대질 않겠는가. 솔직 담백하게 말해 보라고, 자기는 다 이해한다고……. 그름서 ‘솔직히 이 옷, 나한테 안 어울리지요?’ 허질 않것어?”

“그래서요? 설마 아주머니 말씀대로 솔직하게 말씀하신 건 아니시죠?”

“어디! 내가 누군가? 한양 최고의 대장장이, 천 서방이 아닌가. 내 손으로 만든 창칼이 수천 자루여. 그런 내가 못 헐 말이 뭐이가 있것어. 그렇게 솔직허게 말하라고 하니, 내 솔직허게 싹 다 말혔어.”

“뭐라고……요?”

“솔직허게 말해서 그 옷 안 어울린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다, 얼굴도 시커먼 사람이 꽃 분홍이 웬 말이냐? 그리고 두 냥이나 줬다 해서 입 다물고 있었는데. 그 옷, 가만 보면 논두렁에 세워놓은 허수아비가 입던 옷이라고 해도 믿것다, 혔지.”

천 서방의 큰 소리에 주위에 앉아있던 사내들이 맞장구를 쳤다.

“잘 했네.”

“내 속이 다 후련하구먼.”

“그럼그럼, 사내라면 자고로 그리 솔직한 맛이 있어야지. 우리 곰 서방, 생긴 대로 사내답구먼.”

여기저기서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천 서방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사내들이란…….’

주위를 둘러보던 라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어쩜 여인을 몰라도 저리 모르는 것인지…….

“삼놈이, 삼놈이가 말혀 봐. 대체 우리 여편네 왜 지랄발광인지.”

“정말 모르겠습니까?”

“모르것어. 모르니께 내가 파루치기 무섭게 삼놈이를 찾아온 것이 아니여. 여편네가 아주 사람을 달달 볶아. 사람 피를 말리고 있다니께.”

맺힌 게 많은 듯 천 서방은 제 가슴을 쾅쾅 쳐 댔다. 이 억울한 마음 좀 알아줘, 하는 표정이다. 그 가엾은 얼굴에 대고 라온이 매정하게 한 마디 했다.

“당하실 만했어요.”

천 서방이 발끈 성을 냈다.

“뭐이 당할 만혀? 내가 뭐이를 그리 잘못혔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주머니한테 어떻게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여편네가 먼저 솔직허게 말허라고 혀니께, 솔직허게 말헌 것뿐이라니께."

“아주머니께서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지만 정말 아저씨의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었을까요?”

“그럼 뭔 말이 듣고 싶은 것이여?”

“그건 말입니다, 새로 산 옷이 얼마나 아주머니에게 잘 어울리고 예쁜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란 뜻이었어요.”

라온의 설명에 천 서방이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뭣이여? 그게 그런 뜻이었어?”

라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편네, 참말로 이상혀네. 그럼 그렇게 말할 것이지, 어째 솔직 담백허게 말혀라고 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가.”

천 서방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삼놈이, 이제 워쩌면 좋것는가?”

천 서방이 고개를 푹 숙였다. 풀 죽어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미 잃은 어린 송아지였다. 저럴 것을 왜 매번 실수를 하는 것인지.

“화해하고 싶으신 거예요?”

“독현 여편네라니께. 어제부터는 내 꼴도 보기 싫다고 밥도 안 주고 있다니께.”

천 서방이 등가죽에 달라붙은 배를 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라온이 검지를 치켜세우며 할아버지를 언급했다. 담뱃가게에 있던 사내들이 시선이 일제히 라온을 주시했다. 삼놈이 할아버지를 언급할 때면, 언제나 기가 막힌 해결책을 내놓곤 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번 일엔 어떤 해결책을 내 놓을까?

“여인의 마음이란 춘삼월 봄바람이라.”

“뭔 말이여?”

“봄바람처럼 이리저리 어디로 불지 모르는 것이 여인의 마음이니.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그때그때 처신을 잘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처신을 잘 혀?”

“이렇게 해보세요.”

생각을 끝낸 라온이 천 서방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천 서방은 영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대장간으로 옮겼다. 아내 안 씨는 단단히 부아가 치민 얼굴로 화로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어이, 이봐.”

“흥.”

천 서방의 부름에 안 씨는 팽 앵돌아진 모습으로 화답했다.

“임자…… 화났는가?”

“화 안 났소. 내가 화 날 일이 뭐가 있겠소?”

말과는 달리 안 씨는 온몸으로 ‘나 화났소.’ 시위하고 있었다.

“그것이……말이시……. 내가…… 잘못혔네.”

천 서방을 힐끗 쳐다본 안 씨가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내가 잘못혔네, 임자.”

“뭘 잘못한 줄은 아시유?”

천 서방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제부터 삼놈이 알려준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참이었다. 설마…… 통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유치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일랑은 통할 것 같지가 않은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 천 서방은 주춤주춤, 영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저, 저기, 사, 사실 말이여…… 나는 싫으네.”

“뭐가 싫어요?”

“나는 임자가 고운 비단 옷 입는 게 참말 싫으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 씨가 치켜 올라간 눈초리로 천 서방을 노려보았다.

“그럼 그렇지. 어째 순순히 사과를 하나 했더니. 본심이 따로 있었네. 내가 비단 옷 입는 것이 그렇게 싫었단 말이지요?”

“그것이 아니여!”

“그게 아니면 뭐요? 왜 내가 비단옷 입는 게 싫단 말이오?”

“나는 말이시, 임자가 자꾸 고와지는 게 너무 싫단 말이시.”

“……뭐, 뭐예요?”

뜻밖에 대답에 안 씨가 당황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천 서방이 꿀처럼 달달한 말을 입 밖으로 흘려냈다.

“사실…… 임자가 그 옷을 입고 나 어때요? 하는데,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니께. 믿을지 모르겠지만, 임자를 딱 봤는데, 뭐시냐, 이건 하늘 선녀가 따로 없었다니께. 아, 저리 고운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 저 어여쁜 아낙이 내 마누라구나 생각하는데……. 주책없게도 심장이 미친놈처럼 발광을 하지 않겠는가.”

말을 하는 천 서방의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정말이에요?”

내내 등을 보이고 있던 안 씨가 천 서방을 향해 돌아앉았다. 돌아앉은 안 씨의 두 눈은 어린 계집아이처럼 반짝거렸고, 두 뺨엔 발그레 홍조마저 그려져 있었다.

“내가 참말 그렇게 예뻐 보였어요?”

콧물이 가득 들어찬 듯한 안 씨의 콧소리에 천 서방은 기가 찼다. 통했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통한 거여?

“두말하면 잔소리고, 더 말하면 입 아프지. 나는 말이시, 임자가 그리 고와 보이는 게 참말로 싫으네. 10년을 한 이불 덮고 자는 내 눈에 그리 예뻐 뵈는데, 딴 놈들 눈엔 을매나 고울 것인가. 사내놈들이 임자한테 힐끔힐끔 대는 꼴, 눈에 안 봐도 훤 혀.”

“누가 힐끔댄다고 그래요?”

“거참, 자네는 사람이 이렇게 순진하단 말이시. 사내는 말이여, 다 짐승이여, 짐승. 자네처럼 고운 여인네만 보면 저도 모르게 눈이 돌아간단 말이시. 이리저리 집적대는 놈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리고 내가 그 꼴 보고 새색시마냥 가만있을 성 싶은가.”

“참말로! 내가 몇 번 말했어요? 그 성질 좀 죽이라고.”

“내 마누라를 딴 놈이 힐끔거리는데 참는 놈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겠는가. 참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빙신이여, 빙신!”

천 서방은 대장간이 떠나가라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띤 안 씨가 천 서방의 가슴팍을 톡톡 치며 앙알거렸다.

“내가 당신 때문에 못 살아요.”

“뭐이, 내가 없는 말 혔는가?”

“아이참, 이 양반이 왜 이래?”

안 씨는 남편을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천 서방이 은근슬쩍 안 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임자, 내가 잘못혔네.”

“나도 옹졸했어요. 나는 당신 속도 모르고…….”

두 사람의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역시 삼놈이군.”

“계집에 관한 일이라면 우리 삼놈이를 당할 자가 없겠어.”

대장간 밖에서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던 사내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흘러나왔다. 일이 어찌 되는지 궁금하여 천 서방을 뒤따라왔던 사내들은 앞다퉈 라온의 앞으로 달려갔다.

“이번엔 내 차례요.”

“어째 자네 차롄가? 삼놈이, 이번엔 내 차롈세.”

라온이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투덕거리는 사내들을 말렸다.

“걱정 마세요. 한분도 빠짐없이 상담해 드릴게요.”

***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무거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아웅……. 다 끝났다.”

라온은 길게 몸을 늘이며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미시(未時初: 오후 1시)가 훌쩍 지난 시각. 사람들로 북적였던 담뱃가게가 이제야 한적해졌다. 라온은 슬슬 자리를 정리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오늘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려고?”

“우리 단희 약이 다 떨어졌거든요. 구리개에 들러 필요한 약재도 사야 하고, 쌀도 사야 하고, 이리저리 살 것들이 많습니다.”

버릇처럼 싱긋 미소 짓는 라온에게 구 영감이 작은 무명주머니를 건넸다.

“이거 챙겨라.”

“이게 뭡니까?”

“김 역관 댁에서 보내온 열 냥이다.”

“김 역관 댁에서요?”

“일전에 그 댁 큰 아들 상사병을 고쳐 준 일이 있지 않느냐?”

“그 일이라면 이미 충분한 사례를 받았습니다.”

“그 큰 아들이 이번에 네가 이어준 처자와 혼례를 올린다는구나. 원래 혼례 때는 중신 선 사람에게 단단히 한 턱 쏘는 법이다.”

“잘 됐네요.”

제 일인 듯 기뻐하며 라온은 구 영감이 내민 무명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무명주머니 안에 든 엽전의 무게보다 혼례까지 이어진 두 사람의 묵직한 인연의 무게가 더 반가웠다.

“네놈이 혼인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좋아?”

구 영감이 연신 입가를 길게 늘이는 라온에게 한 마디 했다.

“그러게요.”

구 영감의 지청구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라온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물 오른 꽃봉오리가 만개한 듯 얼굴 가득 피어오른 웃음. 너무 아름다워 차라리 서글프기까지 한 그 웃음을 보며 구 영감은 괜스레 연죽만 뻑뻑 빨아 당기며 눈을 끔뻑거렸다. 웃는 얼굴이 어쩌자고 저리 고은 것인가. 저 고운 미색이 오히려 저 아이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불길한 예감을 날려버리려는 듯 구 영감은 탕탕, 탁자 모서리에 연죽을 세게 내리쳤다.

“국밥이라도 한술 뜨고 가던가.”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뱃속에서 아주 천둥번개가 번쩍입니다.”

“아침 거른 것이냐?”

“요즘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닌 것인지, 아침에 밥 지으려고 쌀독을 열었더니 텅텅 비어 있질 뭡니까. 하하.”

“이 속없는 녀석아, 그게 그리 웃을 일이냐.”

“그러게요. 하하하.”

구 영감의 지청구에도 라온은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저놈의 웃음은…….”

불퉁한 목소리로 군소리를 하긴 했지만 라온을 향한 구 영감의 눈길은 따사롭기만 했다. 저 입으로 직접 들은 적은 없었지만 라온의 궁핍한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목이 쉬어라 운종가 사람들의 고민 상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저 아이의 벌이로는 병든 여동생의 약값 대기에도 벅찬 모양이다. 듣기로는 얼마 전부터 저 비리비리한 몸으로 운종가 상인들의 잡다한 허드렛일도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놈의 돈이 무엇이라고, 저 어린놈이 저리 아등바등거리는 것인지. 라온의 곤궁한 삶에 쯧, 짧게 혀를 차던 구 영감이 주막집에 국밥 한 그릇을 주문하려 할 때였다.

“이보게, 삼놈이!”

염소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구 영감의 담뱃가게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들었다. 재동 김 진사 댁의 최 마름이었다. 마음이 급한 듯 최 마름은 다짜고짜 라온의 팔부터 잡아 쥐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당황한 라온이 물었다.

“우선 가세, 가면서 얘기 함세.”

숨이 턱까지 차오른 최 마름은 라온의 팔목을 낚아채기가 무섭게 가게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구 영감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 김 진사 댁 최 마름 아닙니까?”

새로 들여온 담뱃잎을 창고로 들여놓던 꺽쇠가 급히 사라지는 최 마름과 라온을 건너보며 물었다. 꺽쇠는 구 영감의 담뱃가게에서 잡일을 하는 일꾼이었다.

“그런 거 같구나.”

“최 마름이 우리 삼놈이한테 무슨 볼일일까요? 설마, 그 댁에도 춘정에 상사병 난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양반네라고 봄바람에 마음 흔들리지 않다더냐?”

“그렇다면 사람 제대로 찾았네요. 사랑병엔 우리 삼놈이만 한 의원도 없으니까요.”

이제 점처럼 작아진 삼놈이를 지켜보는 꺽쇠의 눈길에 정이 담뿍 깃들어 있다.

“그런데 주인 어르신, 우리 삼놈이, 올해로 몇 살이나 되었습니까요?”

“저놈 열네 살에 처음 얼굴 보았으니……. 삼놈이, 저놈도 올해로 벌써 열일곱이나 되었구나.”

“열일곱밖에 안 된 어린놈이 어찌 여인네의 마음을 그리 훤하게 들이 꿰고 있는 걸까요?”

꺽쇠는 삼놈이를 볼 때마다 늘 궁금했다. 삼놈이는 어찌 그리 여인에 대해 잘 알고 것일까? 연죽에 새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인 구 영감이 뻐끔뻐끔 연기를 피워내며 말했다.

“모르지. 저 속에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라도 들어 있는지.”

***

최 마름이 라온을 안내한 곳은 김 진사 댁 별채였다. 아직 혼인하지 않은 막내도령의 거처. 라온은 이곳을 지난 한 달간 닷새에 한번 꼴로 드나들었다. 이곳에서 연모에 빠진 김 도령을 대신하여 연서를 쓰곤 했던 것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연서 한 장 써주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김 도령을 만나자 그런 사태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 어서 오게.”

라온을 본 김 도령이 반색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별고가 생겼다네. 크, 큰일이 생겼어.”

김 도령의 당황한 목소리에 라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인지…….”

“그, 그분이…… 그분께서 회답을 보, 보내 오셨다네.”

김 도령이 식은땀을 연신 흘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회답이야 종종 보내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른 내용이었다네.”

“좀 다른 내용이라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묻는 라온의 목소리에 근심이 서렸다. 혹여 자신이 보낸 서한으로 인해 김 도령의 연모가 파투난 것은 아니겠지?

“그것이 아니라네.”

“그게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만, 만나자 하시네.”

“네?”

“지, 지금 당장 만나자 하시네.”

“그런 것이라면…… 잘 된 일, 아닙니까? 그간 글귀로만 마음을 전해 온전한 마음을 전하지 못하셨을 터 아닙니까? 지금 당장 만나 속내를 훌훌 보여주십시오.”

“못, 못하네.”

김 도령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린 안색이 보통 심각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연모하는 이가 만나자 하는데 어쩌자고 저리 두려워하는 것일까? 좋은 일 아니야? 행복해서 펄쩍 뛸 일 아니야?’

라온이 이해할 수없는 표정을 짓고 있자니, 별안간 김 도령이 손을 맞잡아왔다.

“도, 도와주게.”

말을 하는 김 도령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

지난 보름 날, 광통교로 다리 밟기를 나갔던 김 도령은 하늘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김 도령은 차마 제 속마음을 열어 보일 수가 없었다. 말더듬이라 놀림이라도 받을까 걱정되었던 까닭이다. 다음 날부터 김 도령은 말하지 못한 절절한 마음을 담은 연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운 분께 보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글 솜씨. 고민하는 김 도령에게 최 마름이 라온을 소개했다. 그리고 여인에 대해 해박한 라온의 연서는 흡족한 결과를 가져왔다. 고운 분께서 답신을 보내왔던 것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연서에 대한 답신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하얀 종이 위에 쓰여 있는 것은 은밀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서찰의 말미에 놀라운 사실 하나를 적어 보내왔다. 다름 아닌 그분, 그 곱고 아리따운 아가씨의 정체. 김 도령이 감히 쳐다봐서는 안 되는 귀하디귀한 분이었다. 서찰을 읽던 김 도령은 너무 놀라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귀한 분께서 이런 말더듬이가 연서를 보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게다가 연서를 쓴 장본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려움에 손발을 벌벌 떠는 김 도령에게 최 마름이 속삭였다.

‘삼놈이를 대신 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인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자니, 귀한 분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

“도와주게. 제, 제발 도와주게.”

김 도령은 그렇지 않아도 더듬는 말을 더 심하게 더듬거렸다.

“자네가 대신 가주게. 자, 자네가 내가 되어 그분을 만나주게.”

“아니 될 말씀입니다.”

라온은 단호한 얼굴로 도리질했다. 그건 연서를 대신 써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이것은 엄연한 기망이었고, 사기였다. 귀한 댁 아가씨를 속이는 일에는 절대 동참할 수 없었다.

“이, 이런 꼴을 보일 수는 없네.”

“도련님…….”

“이, 이리 말이나 더, 더듬대는 자와 연서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시, 실망하실걸세.”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분이라면 도련님을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실걸세. 이, 이해 안 하실걸세.”

“한 번은 넘어야 할 고비입니다. 도련님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셔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라온의 설득에 김 도령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 다음은 없네.”

“네? 무슨 말씀입니까?”

라온의 물음에 김 도령이 처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네.”

김 도령은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다. 차마 삼놈에게 그 귀한 분의 신분을 밝힐 수는 없었다.

“어, 어차피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네. 이번이 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될걸세.”

“도련님.”

무릇 사랑이란, 행복한 연모의 끝이란,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거늘. 어린 도련님께서는 처음부터 함께 할 수 없는 연모라 단정 짓고 있었다. 왜? 대체 무슨 말 못 할 사연이 있기에,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라 하는 것일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는 라온에게 김 도령이 눈물로 호소했다.

“연, 연모하는 마음만으로는 우리 앞에 놓인 산이 너무 높, 높다네. 그러니 이쯤에서 이별해야지. 이, 이별할 수밖에 어, 없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가 도련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

“그러니 삼놈이 자, 자네가 나를 대신하여 죄를 빌어주게. 그분께서 기꺼운 마음으로 이별을 바,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무람했던 내 마음을 요, 용서받을 수 있게…… 자네가 마, 말을 좀 잘 해주게나.”

김 도령의 절절한 마음에 라온은 긴 한숨을 흘렸다. 상대는 지체 높은 양반가의 규수. 이 만남이 거짓임이 들통 난다면 단순히 자신만 잘못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라온은 눈물로 얼룩진 김 도령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어찌한다? 어찌해?

***

그로부터 반 시진 후. 김 진사 댁의 후문으로 연분홍 도포 위에 비취색 답호를 입은 어린 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톱만 한 호박으로 끝을 장식한 세조대를 달랑달랑 가볍게 흔들며 걸음을 옮기는 이……. 다름 아닌 라온이었다.

***

“흠흠.”

연신 어색한 헛기침을 흘리며 라온은 문 밖을 힐끔거렸다. 최 마름이 급히 수소문한 이곳은 작은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방이 하나씩 딸려 있는 작은 초가였다. 목멱산 산자락에 위치한 이 초가는 방에 들어가 문만 열지 않는다면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구조였다. 행여 라온이 가짜 김 도령 행세한 것이 들통 날까 싶어 생각해낸 방도였다. 조금은 별난 만남의 방식에 상대 아가씨가 의심하지는 않으실까, 잠시 잠깐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남녀가 유별한 양반네의 법도 상 그리 별난 것은 아니리라.

“그러니까, 흠흠…….”

라온은 문 밖을 향해 목청을 돋웠다. 방금 전, 건너편 방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말을 어찌 건네야 할까? 저분은 분명 행복한 마음을 이 자리에 나오셨을 터인데. 어떤 말로 저 고운 분의 심기 불편케 하지 않고 이별을 고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그러느라 미처 건너편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질 못했다. 저벅저벅, 작은 대청마루를 건너는 큼직한 발자국 소리도 놓치고 말았다. 하여, 벌컥 문이 열렸을 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얌전하게 닫혀 있던 문이 휙 열린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

놀란 라온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순간, 긴 그림자가 라온의 머리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절대 얼굴 마주해서는 안 되는 건데……. 별안간 벌어진 일에 라온이 얼이 나간 사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이방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라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이내 넋이 빠져 있는 라온의 망막에 하얀 얼굴 하나가 맺혔다.

천상의 것인 듯,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운 얼굴. 먹빛의 검은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참으로 아름다운 사내였다. 살다살다 이리 아름다운 사내는 처음……응? 사내? 사내라고? 여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분명 여인일 텐데?

“누구…… 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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