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22)화 (122/122)

<122화>

외전 9화.

공작저로 돌아온 벨과 해리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전날 미뤄 둔 것까지 레이라에게 혼이 나야 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공작저를 빠져나간 것, 보호자 없이 밤거리를 거닌 것.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러한 일에 휘말리게 된 거지만, 그것만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레이라는 확실히 얘기했다.

아이들을 물건 취급하며 사고파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지, 붙잡힌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그 부분은 확실하게 인지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며 레이라도 자세히 설명했다.

대신 앞으로 절대 이번과 같은 일을 벌이지는 말라고.

긴 설교 끝에, 레이라의 집무실을 빠져나온 건 벨뿐이었다.

“해리는?”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한테 물어볼 게 있대.”

“그래?”

굳게 닫힌 문을 힐끔거린 루카는 벨을 그녀의 방까지 바래다주며 말했다.

“다시는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마.”

“…응. 걱정시켜서 미안해.”

“해리와도 더 많이 시간 보낼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벨이 순순히 사과하자 루카도 조금 부드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응.”

“원하는 게 있으면 먼저 얘기를 해줘.”

“앞으로는 그럴게, 오빠.”

벨과 루카가 방으로 돌아가고, 집무실에 남은 레이라는 가만히 해리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무어라 얘기를 꺼내야 할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듯 해리는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그러고는 이내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포레스티아에는 특별한 힘을 타고난 아이가 태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 힘은 매번 다르다고도요.”

해리는 도서관에서 읽었던 포레스티아의 역사에 관한 책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지.”

아이가 타고나는 힘은 매번 달랐다. 같은 힘이 발현된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레이라는 해리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챈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머금었다.

“어제 무언갈 본 모양이구나.”

“…예.”

땅에 심겨 있는 식물이 아닌, 가공되어 문으로 쓰이던 것을 벨이 제 힘으로 열었다.

쫓기던 와중에는 땅에 손을 짚어 날카로운 나뭇가지로 남자들을 위협했다.

레이라가 가진 힘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씨앗을 필요로 하지 않는 힘이었다.

“벨이, 상단주님과 비슷한 힘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해리는 같은 힘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걸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랬구나.”

“매번 다른 힘을 타고난다고 했지만, 벨의 힘은 상단주님 것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겠지?”

“…네.”

해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런 해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째서 비슷한 힘을 타고난 건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네.”

“하지만 그건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구나.”

“왜요?”

“그건 우리도 알 수 없는 일이거든.”

포레스티아의 아이는 특별한 힘을 타고난다. 하지만 그 힘은 이어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자신의 힘을 이어받은 듯한 아이들.

레이라는 목소리를 낮춰 해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마치 내 힘을 이어받은 것만 같지?”

“…네.”

“그래, 맞아. 아이들 모두.”

“네?”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고개를 드는 해리에게 레이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보였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해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레이라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집무실에 등장한 것이 아르제오였다.

“얘기는 끝났어?”

“제오야말로, 뒤처리는 끝났어요?”

부드럽게 웃으며 묻는 레이라에게 아르제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숨은 붙어 있어.”

그러고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들릴 듯 말 듯 작게 속삭이는 뒷말에 레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해리가 이번 일로 벨이 가진 힘을 안 모양이에요.”

“그래?”

아르제오는 눈을 도르륵 굴리고는 은근슬쩍 다가가 레이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딱히 숨기는 것도 아니잖아.”

“아직은 조심하는 중이긴 하죠.”

세상은 무언가를 얻으면 그만큼 감수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녀 스스로 이 특별한 힘으로 인해 감수해야 했던 위험이 있었으니, 그 부분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위험도 닥치지 않기를 바라서.

“그보다, 요즘 나한테 너무 소홀한 거 아냐?”

“그랬어요?”

“그랬어.”

아르제오가 레이라의 어깨에 파고들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녀는 그 투정이 익숙하기도 하고, 반갑고 마음이 간질거려서 작게 웃었다. 그러며 그가 바란 대로 팔을 뻗어 그를 안아 주었다.

* * *

그날 집무실에서 레이라가 준 작은 힌트로, 해리는 포레스티아의 아이들이 둘 모두 특별한 힘은 타고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치 레이라의 힘을 물려받은 것처럼 둘은 그녀의 것과 닮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벨은 조금 공격성을 띤 듯한 힘이었다. 비슷하지만 어딘가 결을 달리하는 듯한.

루카 역시 비슷한 힘을 가졌지만, 벨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레이라처럼 식물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꽃을 피우고 약초를 키우는 것들.

마치, 레이라의 힘을 물려받으며 조금 더 새로운 세대에 맞게 응용할 수 있는 느낌이랄까.

“그럼 루카는 플로스 상단을 이을 생각인가요?”

루카의 얘기를 모두 들은 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물음에 홀로 목검을 휘두르며 수련을 하던 루카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음…. 지금으로서는 상단 외에 크게 관심 있는 일이 없어서.”

그 대답에 해리는 수긍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현재, 루카가 쓰는 작은 훈련장에 와 있었다.

목검을 휘두르는 루카를 해리가 구경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했었는데 말이다.

요 며칠 해리는 루카의 개인 훈련 시간에 종종 이렇게 찾아와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는 했다.

처음에는 말도 없이 지켜봐서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이제는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훈련하게 되었다.

턱을 괴고 가만히 루카를 지켜보던 해리가 말을 꺼냈다.

“루카가 상단을 이으면 재미있기는 하겠네요.”

“뭐가?”

“상단 일이요. 루카는 똑똑하니까 상단 일도 잘할 테고, 루카를 보좌하는 일이면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해리는 이제껏 친구가 없었다. 살아남기 바빠서 그런 존재를 만들 여유도 없었지만.

그래서 해리에게는 처음 생긴 친구인 루카가 좋았다. 함께 얘기를 나누는 것도 재미있었고, 공부도 재미있었다.

그러니 루카의 곁에서 그가 하는 일을 돕는다면, 무슨 일이든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루카가 제게 말했던 ‘하고 싶은 일’이 아마 해리에게는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방금 그 말, 벨이 들으면 서운하겠네.”

“네?”

“아무것도 아니야.”

슬쩍 고개를 돌리며 목검을 다잡는 루카를 보며 해리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작은 탄성을 흘렸다.

“아, 그리고 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부탁?”

“네.”

무언가 굳게 결심한 듯한 해리의 눈빛에 루카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든.”

“저번에 루카가 권했던 검술 수업…. 저도 함께 들어도 될까요?”

그 물음에 루카는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엔 관심 없다고 했잖아.”

“…그저, 기본을 다져 놓을 필요는 있을 것 같아서요.”

“흐응.”

루카가 콧소리를 내며 씩 웃었다. 해리는 그런 루카를 보며 그저 슬쩍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곁에 있는 사람 한 명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적어도 제가 함께 있을 때 벨이 다치는 일은 없도록.

이번과 같은 일이 생겨도, 그녀만은 도망칠 수 있는 틈을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루카의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모르자, 해리는 귀 끝이 화끈거렸다.

“얼마 전 그 일 때문에?”

“…네.”

고개를 살짝 떨어트리며 하는 대답에 루카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벨을 지키려고?”

“크흠….”

괜스레 헛기침하며 고개를 더욱 떨어트리는 해리를 보며 루카는 결국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 * *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리는 루카의 검술 수업에 함께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를 루카에게는 솔직히 털어놓았는데, 레이라와 아르제오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 탈출에서 스스로 느꼈던 무력감을 극복하고자 시작한 일이라는 걸.

그리고 둘이 검술 수업을 시작한 이후로 벨은 매일 간식을 들고 훈련장으로 두 사람을 찾아갔다.

오늘도 주방에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를 챙긴 벨이 열심히 훈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간식은 뭐니, 벨?”

바구니를 든 아이를 발견한 레이라가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샌드위치요. 훈련량을 늘린다는 것 같아서요. 지금은 많이 먹어야 하는 시기래요.”

진지한 얼굴로 바구니를 들고 훈련장으로 향하는 벨의 뒤를, 레이라와 아르제오가 얌전히 뒤따랐다.

유진의 검술 수업이 끝났을 시간에 맞춰서 훈련장으로 가니, 여유롭게 그곳을 나서는 유진이 보였다.

“유진!”

“아, 아가씨 오셨습니까.”

벨은 얼른 유진에게 다가서며 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건넸다.

“유진도 많이 먹어요!”

“아가씨께서 직접 주시니 영광입니다.”

유진에게 샌드위치를 나눠준 벨은 곧장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루카와 해리는 매일 수업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개인 훈련 시간을 가졌다.

“간식 가져왔어!”

“오.”

벨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니 루카와 해리가 목검을 내려놓았다.

“자, 해리. 많이 먹어.”

샌드위치와 음료를 해리에게 건네는 벨을 보며 루카가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오빠보다도 해리를 더 챙긴다고 말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훈련장 안의 아이들을 지켜보던 레이라와 아르제오가 그 모습에 작게 웃었다.

유진에게 듣기로는, 벨이 가진 능력은 조금 더 공격에 특화된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그 납치범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위협한 것도 벨이었고.

하지만 벨은 유진에게 절대 해리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저 레이라와 비슷한 느낌의 힘이라고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함께 간식을 먹으며 웃는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즐거운 것만은 확실했다.

해리를 살뜰히 살피는 벨과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해리,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웃는 루카.

“제오.”

“응?”

“나중에 벨이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거예요, 하고 누군가를 데려오면 어떨 것 같아요?”

“반쯤 죽여 놔야지.”

흐뭇한 미소로 아이들을 보던 레이라 아르제오의 대답게 고개를 돌렸다.

“제오는 안 맞았잖아요.”

“난 상황이 급박했잖아. 그리고 난 무려 국경의 숲을 혼자 넘어온 사람이란 말이야.”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는 아르제오를 흘겨보며 레이라가 픽 웃었다.

그러면서 다시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 아르제오를 만난 것이 그녀는 무엇보다도 큰 행운이라고 여겼다.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그는 운명이라고 덧붙였지만.

이제는 제법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레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도 각자 많은 일을 겪으며 성장하겠구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일 뿐이겠구나.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들을 바라보던 레이라는 이내 천천히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제 곁에 착 달라붙은 아르제오를 올려다보고는 충동적으로 그 뺨에 입을 맞췄다.

쪽.

“그만 들어가요.”

그녀의 행동에 아르제오는 유혹하듯 웃으며 허리에 팔을 둘렀다.

“방으로?”

능글맞은 아르제오를 밀어내며 레이라는 먼저 걸음을 뗐다.

그녀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이제는 매일이 행복했다.

햇살도 적당하고, 바람이 선선히 부는 날들이었다.

마치 식물이 자라나기 딱 좋은 날처럼.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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