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21)화 (121/122)

<121화>

외전 8화.

늦은 밤, 공작령은 어딘가 어수선했다.

기사들이 바삐 움직였고, 플로스 상단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거리에 나와 분위기를 살피던 가게 주인 하나가 플로스 상단 사람 하나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기사님들에 상단 사람들까지…. 공작령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 물음에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상단 사람이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망설이고 있는데, 근처를 지나던 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벨 아가씨께서 사라지셔서 찾고 있습니다. 혹시 못 보셨나요?”

“아이고, 포레스티아의 작은 아가씨가요? 일을 어째. 아무것도 보진 못했는데…. 저도 같이 찾겠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가게 주인은 저도 함께 찾겠다고 나섰다.

기사와 상단 사람이 그들을 지나친 이후에도, 공작령의 많은 사람들이 제 일을 접고 나와 벨을 찾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온 공작령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였으니 말이다.

점차 벨을 찾겠다는 사람들은 늘어나, 곧이어 공작령의 거의 모든 사람이 벨을 찾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특수한 넝쿨로 공작령은 봉쇄된 상황.

아이들을 납치한 이들은 공작령을 벗어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아무래도 공작령에서 중요 인물이 지금 실종 중인 듯합니다.”

“젠장. 모처럼 운 좋게 물건을 얻었으니 빨리 뜨려고 했더니만.”

“저희 같은 놈들은 공작령에 오래 머물수록 힘드니까요.”

“칫.”

짜증 섞인 대화 소리를 들으며 해리는 굳게 닫힌 짐마차의 문을 열 방법을 고민했다.

“공작령에 들어올 때는 없었는데 말이야. 이런 괴상한 거나 생기고.”

남자들이 공작령을 빙 둘러싼 거대한 넝쿨을 발로 툭툭 찼다.

“두목!”

“왔느냐.”

“이 일대를 둘러보고 왔지만, 전부 넝쿨이 있었습니다.”

“젠장! 왜 이딴 게 생겨서는!”

검이 들지 않아 불태우라고 했지만, 부하의 만류에 제지되었다. 이 밤에 불은 눈에 띌 확률이 높으니.

게다가 지금은 공작령 내부가 어수선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굴 찾기에 저리들 난리야? 빨리 찾아 버리지, 귀찮게.”

짜증 섞인 남자의 목소리에 해리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네놈들이 납치한 벨을 찾고 있겠지. 멍청한 놈들.’

온 공작령이 어수선할 정도로 공작가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다면, 그건 벨일 터였다.

들리는 얘기로는 공작령이 봉쇄되었고, 사람을 풀어 찾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갇혀 있어서는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그러니 이쪽에서도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문제는 이 짐마차의 문을 부술 힘이 그에게는 없다는 것.

‘…좀 더 몸을 단련시켜 놓을걸.’

언젠가 루카가 제게 검술 수업을 함께 듣자고 했을 때 거절하지 말걸. 책만 들고 공부하는 대신 힘도 길러 놓을걸.

해리의 나이도 아직 어리니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만무했는데도 해리는 계속 그런 생각들을 했다.

문을 부수려 시도하는 것도 어려웠다. 단번에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면, 저쪽에서 안의 행동을 예측하고는 그 앞을 막아설 테니.

“후우….”

“왜 그래, 해리?”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니 벨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입을 꾹 다물었던 해리는 얕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짐마차에서 몰래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공작가에서 너를 찾고 있을 테니까 조금만 도망쳐도 금세 도움을 청할 수 있을 텐데….”

해리는 분한 듯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문이 잠겨서?”

“…응.”

부술 수도 없는 단단한 나무 문.

해리가 살짝 고개를 떨어트리는 걸 지켜보던 벨이 몸을 일으켰다.

“문만 열면 돼?”

“어…?”

“괜찮아, 해리. 금방 문 열어줄게.”

“벨? 뭘 하려고….”

해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지만, 벨은 대답 대신 짐마차의 문 앞에 서서 나무에 손을 올렸다.

“…설마….”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레이라가 꽃을 피우던 모습과 겹쳐 보여서.

벨이 손을 올리고 힘을 불어넣자, 곧이어 툭, 하고 나무 문에서 작은 소음이 생겨났다.

그러고는 살짝 손끝으로 미니 문이 열렸다.

“어떻게….”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벨이 레이라처럼 힘을 쓸 수 있다는 건 몰랐다.

벨은 문 너머를 힐끔거리고는 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해리는 무심코 벨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어딘가 이끌리듯.

두 아이는 조심스럽게 나무 문을 밀고 짐마차를 나섰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넝쿨을 걷어차는 남자들의 짜증 섞인 음성에 해리와 벨은 걸음을 서둘렀다.

타닥, 하지만 벨이 밟은 나뭇가지 소리에 짐마차에 가까이 있던 남자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응?”

숨을 훅 들이켠 벨은 해리의 손을 붙잡고 앞에 보이는 숲을 향해 달렸다.

짐마차 근처에 있던 남자는 소리의 근원을 확인하기 위해 짐마차에 다가섰다가 열린 문을 확인했다. 그리고 근처를 달려가는 어린아이 두 명도.

“물건이 짐마차를 빠져나왔다! 도망갑니다!”

“뭐야?!”

남자들의 목소리에 해리가 벨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뛰어, 벨!”

“응!”

아이들은 힘껏 달렸다.

“잡아라!”

하지만 뒤쫓는 남자들에 의해 금세 따라잡히고 있었다.

“꺅!”

설상가상 벨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벨!”

“잡았다!”

넘어진 벨을 향해 손을 뻗는 남자가 보였다. 해리는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벨을 감쌌다.

하지만.

“으악!”

“가까이 오지 마!”

눈을 질끈 감고 벨을 감쌌던 해리는 슬쩍 다시 눈을 떴다. 통증이 느껴지기는커녕, 남자들의 비명이 들여왔기에.

“이, 이게….”

그리고 눈을 뜬 해리는 제 눈을 의심했다. 제가 감싼 벨은 땅에 손을 짚고 있었고, 땅에서 솟아난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남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벨, 이건 도대체….”

해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 이런 힘을 가진 건…. 그 상단의 상단주가…. 하지만, 조금 다른 힘이라고 분명….”

그 어떤 식물이든 키워내는 힘. 그게 플로스 상단주의 힘이었다.

땅에서 나뭇가지가 솟구치는 걸 보고 무심코 상단주의 힘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건 식물을 키우는 힘이라기에는 너무 공격적이었다.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목 언저리까지 날아들었다.

“설마, 그 상단주와 무언가 관계 있는 사람인 건….”

“제대로 짚었네.”

그때, 우왕좌왕하는 남자들에게 대신 대답하는 이가 나타났다.

땅을 짚은 채로 남자들을 잔뜩 경계하던 벨이 슬쩍 고개를 돌리고 안도했다.

“아빠!”

그리고 벨을 확인한 아르제오도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미친 자식들이 감히 내 딸을 건드려? 인생 그만 살고 싶은 모양이야.”

아르제오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남자들을 노려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주변의 기사들에게 위치를 알리기 위해 외쳤다.

“이쪽이다!”

그 목소리에 주변을 수색하던 기사들은 물론, 플로스 상단의 사람들까지도 몰려왔다.

“저놈들이다! 저놈들이 감히 우리 벨 아가씨를!”

“배짱이 두둑하군. 포레스티아령에서 플로스 상단의 아가씨를 건드리다니 말이야!”

“엘런 경.”

“예, 아르제오 님.”

달려온 기사들 사이에서 아르제오의 부름을 받은 기사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벨과 해리를 데려가게. 다친 곳은 없나 확인하고.”

“예.”

“이 자식들은 오늘 내가 족친다.”

“…예.”

엘런은 조금 마를 두고는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벨과 해리에게 다가섰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저 아저씨들이 짐마차에 태워서 거칠게 움직였어요. 짐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딪혔는데, 해리가 절 감싸서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벨이 부러 모두에게 들으란 듯이 남자들의 만행을 늘어놓았다.

“…역시 죽여야겠어.”

“아가씨, 저희는 먼저 돌아가죠. 치료가 우선이니까요. 이곳은 아르제오 님께 맡기면 됩니다.”

“네.”

엘런은 기사 몇에게 아르제오의 곁에 남을 것을 부탁하고는 벨과 해리를 데리고 그곳을 벗어났다. 물론 몰려갔던 상단 사람들도 함께.

아이들을 납치했던 남자들의 뒤는 두껍고 단단한 넝쿨, 앞은 아르제오를 포함한 공작가 기사들.

그저 평소처럼 보호자 없이 밤길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데려왔을 뿐인데. 도대체 이번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들의 실수는 포레스티아의 아이들에게 손을 댄 것이었다.

아르제오는 검을 다잡으며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내 딸을….”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무리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과거,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납치했던 이들을 그냥 넘기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다. 똑같이, 아니, 몇 배로 그녀가 받았을 고통을 돌려주었다. 옆에서 유진이 간절히 말릴 만큼 말이다.

이젠 리히덴의 황자도 아니니 유진이 말릴 일도 없었다.

“일단 체포해서 공작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곁에 있던 기사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냥은 안 되지. 저놈들이 저항할지도 모르잖아? 아, 저항이 있었다고 하자.”

“…예.”

놈들을 때려눕혀도 묵인하겠다는 기사의 대답을 받아낸 아르제오가 그대로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 * *

루카와 바쁘게 달려가던 레이라는 어수선한 거리를 힐끔거렸다.

사방에서 벨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모두가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벨과 해리를 데려가는 포레스티아의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벨!”

레이라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벨이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었다.

“엄마!”

아직 어린 나이에 이런 경험. 분명 두려웠을 터였다. 엘런의 품에 안겨 있던 벨은 내려달라고 하더니 곧장 레이라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다친 곳은 없니? 해리는?”

“괜찮아요, 엄마.”

“저도 괜찮습니다, 상단주님.”

아이들의 대답에 레이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일단은 아이들이 무사하니 모든 것이 괜찮았다.

“정말…. 걱정했잖아, 벨, 해리.”

그 옆에 선 루카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하자, 해리가 살짝 고개를 떨어트렸다.

“죄송해요, 루카.”

“얘기는 돌아가서 하자꾸나.”

벨과 해리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인 레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엘런 경, 제오는요?”

“…잔당을 처리 중이십니다.”

“그쪽은 걱정 없겠네요.”

뒤처리가 조금 곤란해질지도 모르지만.

뒷말을 삼킨 레이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만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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