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19)화 (119/122)

<119화>

외전 6화.

루카와 로렌스의 저녁 외출은 주로 암행과 같을 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하루를 마무리하는지. 힘든 것은 없는지, 일과를 끝낸 이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무슨 대화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지켜보고 대화를 나눴다.

루카는 아직 어렸지만, 로렌스와의 이 외출을 즐겼다. 루카에게는 재미있는 일이었으니.

“해리도 가려고?”

해리도 함께 간다는 말에 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리가 궁금해하니까.”

“하지만 해리는 늘 오빠랑만 있잖아. 오빠가 외출한다길래 내가 해리랑 있으려고 했는데.”

“내가 없어도 해리는 할 일이 많아.”

“하지만 해리는 매일 오빠랑만 있잖아.”

벨이 불퉁한 얼굴로 푸딩을 푹푹 찔러댔다.

기분이 상한 듯한 벨을 보며 해리가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루카도 슬쩍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벨도 같이 갈래?”

벨은 시선을 푸딩에 고정한 채로 입술을 비죽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럼 난 먼저 갈게.”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벨은 금세 정원을 벗어나 저택으로 쏙 들어갔다.

“전 오늘은 사양하겠습니다.”

“궁금한 거 아니었어?”

“벨이 기분이 상한 것 같으니 풀어 줘야죠.”

벨이 사라진 방향을 힐끔거리며 해리가 대답하자, 루카의 미소가 짙어졌다.

“해리는 벨에게는 말을 편하게 하네. 나한테는 ‘님’자를 빼는 것도 어려워했으면서.”

눈을 가늘게 뜬 루카의 말에 해리가 귀를 붉게 물들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게…. 벨은 막무가내로 놓아주지 않아서….”

그 대답에 루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벨은 아버지를 더 닮았으니까.”

분위기나 성격은 벨이 아르제오를 더 닮았다. 그러니 막무가내인 면도, 능구렁이 같은 면도 루카보다 많았다. 그것이 퍽 귀여웠지만.

“다음번에 또 기회가 된다면 꼭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저도 먼저 가보겠습니다.”

서두르는 해리의 뒷모습을 보며 루카가 턱을 괬다.

자신들은 물론, 공작가 전체가 벨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러니 이러다가 응석받이로 자라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도 되었다.

* * *

먼저 방으로 돌아간 벨은 마침 루이스에게서 잔뜩 도착한 서신을 확인하고 있었다.

로렌스가 리히덴을 떠난 직후부터 얼마나 써댄 건지, 한꺼번에 수많은 편지가 도착했었다.

레이라와 아르제오에게는 로렌스만 아이들을 보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불평이 전부였고, 아이들에게는 다른 내용의 편지들이었다.

보고 싶다는 말로 시작해서, 갖고 싶은 것은 없는지, 요즘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하는지, 리히덴에 오고 싶지는 않은지 등을 물었다. 그리고 그 끝은 다시 보고 싶다는 말로 끝났다.

벨은 침대에 앉아 루이스의 편지들을 읽다 보니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작게 웃으며 편지들을 읽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네.”

벨의 짤막한 대답에 살며시 문을 열고 나타난 건 해리였다.

“뭐 해?”

벨은 해리를 발견하고는 편지는 내려놓았다. 루이스 덕에 한결 기분이 나아졌는데, 해리의 얼굴을 보니 또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왜?”

그래서 퍽 불퉁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루카 오빠랑 외출하는 거 아니야?”

“안 가기로 했어.”

해리의 대답에 벨은 벌써 표정이 풀어졌다. 그 변화가 뚜렷하게 보여서 더욱 주위의 사랑을 받는 것이기도 했다.

“서고에 갈 건데 같이 갈까 하고 왔는데…. 벨 바빠?”

“아니?”

벨은 재빨리 루이스의 편지를 집어던지며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가자.”

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해리와 함께 방을 나섰다. 루이스의 편지만 안타깝게 그녀의 침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고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책을 고르는 해리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턱을 괴고 그 모습을 응시하던 벨은 슬쩍 입술을 비죽이며 물었다.

“해리, 사실은 오빠랑 같이 외출하고 싶었지?”

“으, 응?”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는 것을 보니, 루카와 가고 싶었던 것이 확실했다.

벨이 눈을 가늘게 뜨자, 해리는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그럼 가 볼래?”

“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해리를 보며 벨은 마음을 굳힌 듯 걸음을 뗐다.

그러고는 해리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자, 가자!”

“어, 어? 어어?”

눈을 동그랗게 뜬 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벨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벨은 루카와 로렌스를 발견한 뒤에야 걸음을 멈췄다.

몰래 코너를 돌아 몸을 숨긴 벨을 루카와 로렌스의 동향을 살폈다.

“벨, 어떡하려고?”

“몰래 따라갈 건데?”

“왜? 같이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모르겠다는 해리의 물음에 벨이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럼 해리는 또 오빠랑만 붙어 있을 거잖아. 오늘은 나랑 있기로 했으니까 나랑 가.”

다 같이 가도 함께 있는 것 아닌가?

해리는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쩐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 응.”

그래서 얌전히 벨의 옆을 지키고 선 해리는 힐끔거리며 루카와 로렌스가 움직이는 걸 바라봤다.

두 사람이 곧 저택을 나서자, 벨과 해리도 뒤를 이었다.

“벨 아가씨? 어디 가십니까?”

“아, 오빠랑 삼촌 외출에 따라가요. 다녀올게요!”

“아, 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당연히 로렌스가 보호자로서 동행하는 거라 여긴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벨과 해리를 배웅했다.

날이 저물며 조금 쌀쌀해지자, 해리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벨에게 물었다.

“벨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냥 합류하는 게 어때? 벨 겉옷도 너무 얇은 것 같은데.”

“그래? 안 추운데.”

벨은 뚱한 얼굴로 제 겉옷을 살피다가 곧 고개를 홱 돌렸다.

“움직인다, 따라가자.”

“아…. 응.”

루카와 로렌스가 움직이는 걸 발견한 벨은 막무가내로 해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데도 꽤나 활기찬 거리를 걸었다.

거리 이곳저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벨과 해리는 루카와 로렌스를 뒤쫓고 있던 것도 잊고 거리 구경에 푹 빠졌다.

“축제가 아니어도 사람이 많네.”

“최근 공작령에 방문하는 사람이 늘어서 그럴걸?”

“왜?”

“플로스 상단에서 새로 인력을 뽑는다고 공고를 내서 그럴걸? 그 외에도 거래를 트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공작령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막힘없이 설명하는 해리를 보며 벨은 감탄사를 흘렸다.

“해리 똑똑하구나?”

“상단에서 일하려고 공부하니까 알아야지.”

벨이 치켜세우니 해리는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

거리 구경에, 해리와의 대화도 재미있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벨이 외쳤다.

“오빠랑 삼촌 놓쳤다!”

“아.”

그녀의 말에 뒤늦게 주변을 살핀 해리도 낭패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공작령이 평화로워도 밤거리를 어린아이들만 다니는 건 위험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외부인이 부쩍 늘어난 상황이라서 더욱 그러했다.

주변을 둘러본 해리가 먼저 벨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만 돌아가자. 밤길은 위험해.”

“아….”

낮아진 해리의 목소리에 벨은 슬쩍 눈을 굴렸다.

루카와 로렌스를 놓친 지금은 더 고집부릴 수도 없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사이를 다시 힐끔거렸지만, 루카와 로렌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응….”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벨이 대답하자, 해리는 곧 그녀를 이끌고 걸음을 뗐다.

“다음에 다 같이 와서 더 느긋하게 구경하자.”

“응!”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라는 말에 벨은 표정을 풀었다.

다음을 기약한다는 건, 언제까지나 함께 있겠다는 말과 같으니까.

“있잖아, 해리.”

“응.”

“플로스 상단에서 일하고 그러면 계속 공작가에 있을 거지?”

“그렇지? 상단주께서 계시니까.”

해리의 확답을 받아내니 벨은 더욱 기분이 좋아진 듯 작게 웃었다.

“그럼 됐어.”

해리와 함께 공작저로 돌아가기 위해 기분 좋게 걸음을 내딛는데, 두 아이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나타났다.

“애들만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아닌가?”

낯선 사내가 길을 막아서자 해리는 반사적으로 벨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자신의 뒤로 숨기며 말했다.

“…삼촌과 함께 왔습니다.”

그 대답에 남자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한참 전부터 너희만 있던데.”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놓쳐서 그럽니다.”

“그럼 함께 찾아 줄까?”

“괜찮습니다.”

“어허, 어린애들만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한 시간이야.”

남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다가서자, 해리와 벨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야, 너희만 다니는 게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

“저희는 괜찮습니다.”

남자가 다가서면, 두 아이는 뒷걸음질 치기가 반복되었다. 아이들이 경계를 늦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남자가 점점 표정을 굳혔다.

“도와주겠다는데 왜들 이러실까?”

“…….”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는 남자를 보며 해리는 벨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자, 아저씨랑 가자. 삼촌 찾아 줄게.”

남자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보며 해리는 마음을 굳혔다.

“벨.”

“뛰어, 해리!”

그가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벨이 먼저 해리의 손을 붙잡고 뛰기 시작했다.

“아, 저것들이 귀찮게 이씨….”

사람들 사이를 휘저으며 빠르게 달려 나가는 아이들을 남자가 금세 뒤쫓았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한들, 아이들이 성인 남성의 속도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해리, 잡힐 것 같아!”

“조금만 더 빨리, 벨!”

뒤를 슬쩍 돌아본 벨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해리는 평소 검술 훈련이나 단련을 한 것이 아니라서 성인 남성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있는 힘껏 달렸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남자에게 붙잡혔다. 그 우악스러운 손에 붙잡힌 해리가 발버둥 치며 벨만이라도 도망시키려 했다.

“벨, 뛰어!”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너만이라도 도망치란다고 곧장 도망칠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누군가 뒤쫓아온다는 공포에, 혼자라는 불안감이 더해질 뿐이었다.

이제 겨우 일곱 살인 벨은 어서 도망치라는 해리의 말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리고 몸을 틀어 도망치려는데, 남자의 동료로 보이는 이에게 붙잡혔다.

“혼자서 이런 어린애 둘도 못 잡냐?”

“시끄러워.”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걸 본 해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 혼자라면 모를까, 벨까지 붙잡혔다는 사실에 해리는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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