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외전 5화.
레이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침 공작저로 돌아오는 벨과 아르제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루카가 말한 그 손님과 함께.
“어서 오세요, 로렌스 전하.”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레이라는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또 불쑥 찾아오시니, 폐하께서 또 가만있지 않으시겠네요.”
“그놈은 황제이니 자유롭지 못한 건 당연하지. 난 내 조카들을 보러 올 수 있는 위치이니 어쩌겠나.”
로렌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벨과 루카를 향해 팔을 벌렸다.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가 안기자, 로렌스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주춤거리던 로렌스도 이제는 제법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종종 이렇게 두 사람에게는 비밀로 하고 아이들을 보러 공작저를 방문했는데, 그럴 때면 루이스가 길길이 날뛰었다.
이번에도 아마 구구절절 리히덴을 방문해 달라는 편지가 올 테지.
눈에 훤히 보이는 상황에 레이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아르제오는 조금 기뻐 보여서 만족스러웠지만.
“기분 좋아 보이네요.”
슬쩍 아르제오에게 다가선 레이라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픽 웃으며 아이들과 로렌스를 바라보던 아르제오가 흠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야, 짓궂네.”
“짓궂다니요, 제오가 좋아 보이니 저도 좋아서요.”
“뭐야, 이번엔 설레게.”
눈을 가늘게 뜨고 슬쩍 달라붙는 그를 보며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그런데, 못 보던 아이도 함께 있는군. 루카 또래로 보이는 걸로 봐서 셋째일 리는 없고.”
“이 애는 해리예요, 삼촌!”
“해리?”
벨의 소개에 로렌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플로스 상단에서 일하고 싶다기에 가르쳐 보고 있어요. 마침 아이들과 또래라서 친하게 지내고 있죠.”
레이라가 설명을 덧붙이자, 로렌스가 ‘흠….’ 하고 신음을 흘리며 해리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얼른 벨을 안아 들었다.
“우리 벨을 넘보면 안 된다.”
“…예?”
어리둥절한 해리를 두고 루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벨은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겁니다!”
로렌스의 말에 오히려 기겁한 건 아르제오였다. 펄쩍 뛰며 달려가 로렌스에게서 벨을 빼앗아 안았다.
“벨은 평생 아빠랑 살 거야, 그렇지?”
그 물음에 벨이 고개를 기울이기만 해서 아르제오는 더욱 애가 탔다.
“자, 자. 벨의 앞날을 결정하기엔 아직 이르니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요.”
레이라가 중재하고 나서서야, 아르제오는 벨을 안고 공작저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벨을 빼앗긴 로렌스는 루카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상단주님.”
“응?”
레이라는 안으로 들어서려다 해리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
“저분은 누구신가요?”
“아, 아이들의 삼촌이란다.”
그렇게 말한 레이라는 싱긋 웃으며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리히덴 제국의 황자이시기도 하고.”
“예에?”
“우리도 들어가자.”
화들짝 놀란 해리를 보며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이를 이끌고 뒤늦게 저택으로 들어섰다.
로렌스의 방문 사실을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몰랐지만, 집사에게는 루카가 살짝 귀띔해 준 덕에 손님 맞을 준비는 완벽했다.
아르제오는 어째서 자신들에게가 아닌 집사에게만 말하는 거냐며 억울해했지만.
똑똑한 루카는 로렌스가 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몰라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모르면 곤란할 것을 알고 그리 한 것이었다.
그걸 보며 또 로렌스는 똑똑하다며 뿌듯한 얼굴로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엔 발루아에서 얼마나 머무실 예정이십니까?”
로렌스를 위해 준비된 만찬을 즐기며 아르제오가 물었다.
“글쎄. 한동안 있을 생각이다.”
그 대답에 아르제오와 레이라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로렌스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루이스가 더 난리를 칠 테니까.
“이제는 저희 입장도 고려해 주시면 참 감사하겠습니다만.”
아르제오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로렌스가 작게 웃었다.
“형이 되어서 조카들 예뻐하는 것도 문제란 말이냐.”
“그게 문제겠습니까? 폐하께서 난리를 치시니 그러죠.”
“이제는 폐하라고 불러도 뭐라고 하지 않느냐?”
“어쩌겠습니까, 폐하인 것을.”
아르제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별수가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루이스는 로렌스보다 호칭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전하’보다는 ‘형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매번 말했을 정도로.
그러니 이제는 폐하라고 부르는 게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매번 서운해했다. 물론, 루카와 벨에게는 곧 죽어도 삼촌이라 부르라며 억지를 부렸지만.
형님은 포기해도 그 부분은 포기할 수 없다나 뭐라나.
덕분에 아이들은 여전히 루이스를 삼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형님께선 언제 정착하실 생각이십니까?”
“오늘따라 이 형님에게 관심이 많군.”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아졌으니.”
전에는 반대였던 것 같은데, 로렌스가 저리 능글맞게 대할 때면 아르제오는 뚱한 얼굴로 외면하곤 했다. 그걸 곁에서 지켜보는 레이라는 그저 재미있었지만.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영지도 마다하고 지내시니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르제오가 마지못해 덧붙인 말에 로렌스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대로, 로렌스는 루이스가 내리는 영지도 마다했다. 그러고는 종종 발루아로 넘어와 이렇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젠 어딘가에 묶여 있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이리 종종 예쁜 조카들을 보려면 어딘가에 메여 있지 않은 게 편하다. 혼자 훌훌 어디든 다닐 수 있으니.”
“형님은 형님만의 자유를 찾으신 듯합니다.”
“그런 셈이지.”
로렌스는 이제, 그리도 자유를 갈망하던 아르제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리도 편안한 것을, 어찌 오랜 시간 그리도 고집을 부렸나 싶을 정도였다.
“리히덴은 요즘 어떤가요?”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묻자, 로렌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도르륵 굴렸다.
“확실히, 리히덴도…. 전보다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았나 싶다.”
루이스는 병든 부분을 과감히 도려냈다. 비리를 저지르는 귀족들을 과감히 처단했고, 로렌스는 그저 묵묵히 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르제오가 마지막에 선택한 것이 어째서 루이스였는지, 스스로 지켜보았다.
아르제오의 선택은 오로지 레이라를 위해 바뀌었다. 하지만 지켜보니 루이스가 황제가 된 건 틀리지 않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때의 자신은 고집스러웠고, 눈이 가려져 있었으니. 신분을 중히 여겼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자신은 좋은 황제가 되지는 못했을 거라고 로렌스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저 리히덴을 강국으로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을 것이라고.
그런 것들을 인정하고 나니, 로렌스는 한층 여유로워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게. 뭐, 덕분에 나는 자유롭게 조카들을 볼 수 있어서 좋고.”
아마도 루이스가 황제가 되고 제일 분해하는 부분은 그것일 것이다. 원하는 만큼 루카와 벨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로렌스가 발루아는 방문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서신은 공작가로 보내곤 했다.
로렌스만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건 불공평하니, 리히덴을 방문해 달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아르제오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던 로렌스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의 옆에 자리를 차지한 해리가 빤히 로렌스를 관찰하고 있었다.
함께 식사까지 하며 지내는 것을 보니, 사용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로렌스가 보기에 해리는 굉장히 묘한 존재감이었다.
“상단 일을 배우고 싶어 해서 데려왔다고 했나. 벌써 일을 시작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가 아닌가.”
“아직 기본적인 것들을 배우고 있을 뿐입니다.”
“친구예요.”
조심스럽게 대답하던 해리는 이어진 루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와 함께 자라는 건 좋죠. 제게 유진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아이들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아르제오가 슬쩍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부려 먹으시는데요.”
그리고 함께 자리에 있던 유진이 뚱한 얼굴로 덧붙였다.
“리히덴에 두고 가지 말라고 부득불 따라붙었잖아.”
“전 상단주께 고용된 몸이라, 따지고 보면 절 데려온 건 부인이시죠.”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혼자 발루아로 온 것 때문에 한동안 토라져 있었으니까.”
아르제오의 말에 유진이 입술을 비죽이는 것을 보며 레이라와 로렌스가 작게 웃었다.
어른들이 대화하는 걸 가만히 살피던 루카가 집사에게 눈짓하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 디저트는 정원에서 먹을게요. 편하게 시간 보내세요.”
“루카, 저녁에는 삼촌과 외출할까?”
“네, 좋아요.”
아이들이 자리를 비우자, 그들은 곧이어 리히덴의 내정과 발루아와의 관계 등에 관해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날씨가 좋으니 정원으로 나온 아이들을 위해, 테이블에 잔뜩 디저트가 놓였다.
단 것을 즐기는 벨은 그걸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맛있겠다.”
작게 웃으며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벨을 힐끔거린 해리가 몰래 웃었다.
“이렇게 맛있는데 왜 오빠는 안 좋아해?”
달콤한 푸딩을 떠먹은 벨이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루카에게 물었다. 루카도 해리도, 분명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단것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해리는 굳이 고르자면 디저트보다는 푸짐한 식사를 원했고, 루카는 단것보다는 상큼한 쪽을 더 선호했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니까.”
“해리도 디저트를 별로 좋아하진 않아. 신기해.”
“근데 벨.”
“응?”
“왜 나는 오빠라고 부르면서 해리한테는 오빠라고 안 해?”
루카는 순수한 궁금증에 물었다. 벨을 슬쩍 해리를 힐끔거리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오빠는 오빠지만, 해리는 해리니까.”
“뭐야, 그게.”
루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픽 웃었지만, 해리는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근데, 저녁 외출은 삼촌이랑 오빠랑 둘이 가는 거야?”
“그런가. 왜? 벨도 가려고?”
“움….”
벨을 스푼을 입에 물고 고민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삼촌이랑 오빠의 저녁 외출은 재미없어.”
단호하게 말하는 벨의 모습에 루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녁 외출에서는 뭘 하는데요?”
둘의 대화에 해리가 궁금한 듯 묻자, 루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같이 가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