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외전 4화.
해리가 공작저로 온 뒤에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루카의 수업량만큼은 아니었지만, 해리도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선생을 붙여 주었다.
해리는 공작저에 도착한 날 난생처음으로 좋은 침대에서 좋은 옷을 입고 잠이 들었다.
이렇게 폭신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있구나, 하고 처음 생각한 날이었다.
선생님을 소개받고, 공부를 시작하며 해리는 한동안 바쁘게 지냈다. 공작저에 적응도 해야 했고.
아이는 똑똑했고, 유진은 후에 유능한 인재가 된다면 좋은 일이라며 가끔 공부를 봐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해리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오전 중에는 레이라가 자주 이른 시간에 시타델 섬에 다녀오곤 했다. 그 일정에 동행하고 싶어서 평소보다도 더 일찍 일어났다.
“좋은 아침.”
혹시나 레이라가 벌써 출발했을까 봐 두리번거리며 방을 나선 해리는 곧장 루카와 마주쳤다.
“좋은 아침이에요.”
해리의 깍듯한 대답에 루카는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해리도 은근히 고집이 세단 말이야.”
여러 번 편하게 대해도 된다고 했건만 해리는 어쩐지 루카에게 그럴 수 없었다.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루카가 불편하거나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은근히 많았고, 해리는 루카가 좋았다.
다만 레이라와 비슷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그런 태도가 나오는 것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이르네?”
자연스럽게 함께 걸으며 루카가 물었다.
“레이라 님의 시타델 일정에 따라가고 싶어서요. 루카 님도 가시죠?”
“그 님자 좀 빼줘. 말 편하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대신 그러기로 했잖아.”
“아…. 네, 루카.”
이 역시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고쳐지지 않아서 루카는 엄한 얼굴로 말했다. 그에 해리는 어색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제야 루카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이른 아침부터 섬에 다녀올 준비를 하던 레이라는 루카와 해리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둘이네?”
“네, 어머니와 함께 섬에 다녀오고 싶어서요.”
“든든하네.”
레이라는 한 손에는 루카, 다른 손에는 해리의 손을 잡고 공작저를 나섰다.
아르제오는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지만, 늦잠을 자는 벨을 위해 늘 남아 있었다. 덕분에 그녀와 시타델까지 동행하는 건 주로 루카였다. 오늘은 해리까지 함께였지만.
루카는 매일 아침 레이라와 함께 시타델 산책을 즐겼다.
하루에 한 번 드러나는, 시타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 하지만 그 길은 푹 젖고 좁아서 마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었다.
매번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번거로우니 플로스 상단은 거기에 튼튼한 다리를 만들었다.
바쁠 땐 마차를 타고 다녔지만, 이른 오전에는 비교적 한가하니 레이라와 루카는 주로 걸어서 다녔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풍경도 예뻐서, 다리 위를 느긋하게 걷는 것도 좋았다.
루카가 이렇게나 자랄 동안, 시타델 섬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레이라와 아르제오가 종종 섬에서 지낼 때 쓰는 저택 외에도, 섬에는 조그마한 집이 생겼다.
플로스 상단에서 일하는 몇 식물학자가 그곳에서 머물며 섬의 식물들을 연구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도, 레이라가 피워내는 것처럼 식물을 키우지는 못했다.
아직 시타델 섬에서 그들 자력으로 식물을 키우는 것도 버거운 단계였다.
난폭하게 영양분을 흡수하는 섬의 거대한 나무들 때문에 힘없는 씨앗은 금세 메말랐다.
“어때? 이렇게 걸으니 기분 좋지?”
다리를 다 건널 무렵 레이라가 해리에게 물었다. 루카도 같은 걸 물으려던 참이었는지 해리의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제게 시선이 쏠리는 것이 긴장되는지 해리는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작가에서 지내는 건 어때? 공부는 재밌니?”
“아, 네. 재미있어요.”
해리는 수줍은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공작가에서 지내는 건 너무나 꿈만 같았다. 줄곧 학대당하며 자랐으니, 이런 호사는 말 그대로 꿈과 같았다.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해리는 똑똑해서 배우는 게 빠르대요. 금방 플로스에서 일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 그렇지는….”
오히려 루카가 자신하듯이 말하자 해리는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붉혔다.
처음 해리를 데려오며 조금 걱정은 있었다.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하지만 그러한 환경에 해리를 계속 둘 수도 없어서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걱정과는 다르게 해리는 아이들과 아주 잘 지냈다. 주로 루카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벨이 종종 그를 찾는 듯했다.
섬으로 들어선 세 사람은 곧장 약초밭으로 향했다.
레이라와 루카가 늘 비슷한 시간에 섬을 방문하니, 식물학자들이 미리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그저 일과와 같은 일이니 굳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데도 학자들은 듣질 않았다.
“오셨습니까, 상단주 님.”
“좋은 아침이에요.”
약초밭에 다다른 그녀에게 학자들이 몰려들자, 루카가 해리를 이끌었다.
연구의 성과는 좀 어떤지,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학자들이 얘기를 꺼냈다.
루카가 해리와 함께 약초밭을 지나 섬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레이라는, 한결 편안하게 학자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상단주 님은 늘 바쁘시네요.”
슬쩍 레이라를 돌아보며 루카를 따라나선 해리가 작게 말했다. 그에 루카가 픽 웃었다.
“어머니를 찾는 사람이 많으니까. 가자, 내가 안내할게.”
“네, 루카.”
해리는 공작저에 적응하느라 시타델을 제대로 방문할 틈이 없었다.
여러 번 함께 시타델을 오기로 하고도 번번이 다른 일이 생겨서 무산되었다. 그래서 해리는 이 이른 아침에 루카와 레이라의 일정에 따라나선 거였다.
평소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났지만, 섬에 와 보니 루카가 왜 매일같이 그녀와 동행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죽음의 섬이라고까지 불렸던 이곳에는 새소리가 가득했다. 푸르르고, 상쾌한 풀 내음이 가득한 곳.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니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지?”
주변을 살피는 해리를 관찰하던 루카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네.”
싫을 리가 없는 풍경이었다.
“해리는 정말 식물학자가 되어서 상단에서 일할 거야?”
“네, 루카는요?”
“난 글쎄…. 아직은 정하지 않았어. 재밌는 게 너무 많거든.”
루카는 공부도 재미있었고, 검술도 재미있었다. 레이라는 나중에 무얼 하고 싶은지는 여유롭게 생각해도 된다고 했다. 천천히, 즐기면서 이것저것 해본 다음에 루카가 정하면 된다고.
“너도, 네가 좋아서 하는 거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른 것도 경험해 보는 게 좋아.”
루카의 말에 해리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힘들게 살아와서 그런지, 저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맞지 않고 무사히 지나는 날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이 해리에게는 당연했다. 그러니 제가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볼 기회도 없었다.
“좋아서 하는 거….”
가만히 혼자 중얼거리며 걸음을 떼는 해리를 보며 루카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시타델에서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두 아이는 어느새 약초를 돌보고 있는 레이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흙을 매만지며 청록빛이 땅으로 스며들자, 꽃과 약초들은 생기를 머금었다.
루카를 뒤따라 돌아오던 해리는 그걸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플로스 상단이 유명한 이유는 그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레이라의 힘이 컸다.
그런 힘을 직접 눈으로 보니, 해리는 제가 살아남을 길은 플로스 상단에서 일하는 것뿐이라고 더욱 강하게 생각했다.
대단하다는 생각 외에도, 어쩐지 그저,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 표정을 확인한 루카가 가만히 웃었다.
감히 다가설 수 없다고 느끼는 얼굴. 루카는 그런 얼굴로 레이라를 보는 이들을 많이 목격했다.
그 역시 처음 그녀의 능력을 보았을 때는 비슷한 얼굴을 했으리라. 지금도 이런 광경을 볼 때면 괜스레 제가 자랑스러웠다.
약초를 돌본 뒤에 레이라는 얌전히 지켜보며 기다리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만 돌아갈까?”
“네, 어머니.”
식물을 돌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너무 늦어지면 벨과 아르제오가 투덜거릴 테니 말이다.
다시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에는 해리의 표정이 한결 더 밝았다. 플로스 상단에서 일하게 해달라며 무작정 매달린 것이 뿌듯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전 역시, 플로스 상단에서 일하고 싶어요.”
다리를 다 건널 즈음, 해리가 루카에게 작게 말했다.
“그래?”
생각보다 결정이 빨라서 루카는 조금 의아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네, 식물학자든 다른 뭐든. 전 플로스 상단에서 일하고 싶어요.”
섬에서 루카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처럼, 이건 뚜렷하게 해리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애초에 상단에 관심이 있었으니 레이라와 아르제오에게 매달렸었다.
아직 결정한 건 플로스 상단이라는 목적지뿐이었다. 어떤 일을 할지는, 루카의 말대로 조금 더 고민해야 할 것 같았다.
공작저로 돌아온 레이라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였으면, 시타델에서 돌아올 즈음 벨과 아르제오가 공작저 앞까지 나와 그녀를 반길 터였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
의아한 얼굴로 공작저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벨과 아르제오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그녀를 맞이하러 나온 건 두 사람 대신 로라였다.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응. 제오랑 벨은?”
“아, 손님이 오셔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손님?”
올 사람이 있었나, 싶은 마음에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오셨나 보네요.”
하지만 그녀와 다르게 차분한 루카를 보며 레이라가 물었다.
“올 사람이 있었니?”
“네. 연락을 받았었으니까요.”
“연락?”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레이라는 눈을 깜박이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자, 루카가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니, 아버지께는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자신들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루카에게 연락할 사람.
“설마….”
누구인지 짐작이 간 레이라는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길 바라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루카는 작게 웃었다.
“어머니의 짐작이 맞을 거예요. 슬슬 도착하실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거든요.”
루카의 확인 사살에 레이라는 이마를 짚었다.
“…또 한바탕 시끄러워지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