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외전 3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곤란하니, 역으로 귀족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인을 노려보던 직원들이 레이라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전에도 보고를 올린 적이 있지만, 행패를 부리는 귀족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곳은 모두가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지만, 그런 사람들을 통제할 수단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직원들은 마치 지금까지 쌓아 놓은 불만을 이 기회에 늘어놓는 듯했다.
로이드의 허락하에 만들어진 곳이어도, 콧대 높은 귀족은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태생부터가 다르다고, 아무리 황제가 승인했어도 신분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 이들.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평민들보다 자신들이 귀하지 않겠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직원들은 그런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귀족이니 함부로 대했다가는 엄벌에 처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불론 많은 사람을 마주하다 보면, 행패 부리는 것이 꼭 귀족만은 아니었다.
신분 차에 열등감을 품은 이들이 괜한 분란을 만들기도 했다.
울상을 지은 직원들이 하는 말에 레이라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저, 저희는 딱히…. 해, 행패를 부리지는 않았습니다.”
눈치를 살피던 하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어느새 그 하인의 뒤로 숨어 있었다.
그녀의 정체를 듣고는 조금 긴장한 모양새들이었다.
“이곳의 출입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책은 있어야겠네요. 일하는 분들도 모두 즐거운 곳이었으면 싶으니까요.”
레이라의 말에 하인은 아이들에게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냐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직원들에게도 그만 일하러 돌아가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너무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던 탓에 레이라는 벨과 괴롭힘당하던 그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도서관을 벗어난 그들은 근처의 디저트 가게로 들어섰다.
달콤한 향기가 가득한 곳에 들어서니 벨이 눈을 반짝이며 진열된 디저트를 바라봤다.
“벨, 너무 많이는 안 된다.”
“네, 엄마!”
힘차게 대답한 벨이 먼저 진열장으로 다가섰고, 그 뒤를 아르제오가 따랐다.
차마 쫓아가지 못하고 우물쭈물 선 아이를 보며 레이라가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췄다.
“마음껏 고르렴.”
“…하지만….”
“괜찮아, 그래도 돼. 대신 몇 가지 얘기 좀 해 줄래?”
“얘기요?”
“응. 도서관 이용에 불편한 것은 없는지, 더 필요한 것들은 없는지, 그런 것들.”
“아, 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보며 레이라가 싱긋 웃었다.
“자, 그럼 어서 고르자. 먹으면서 얘기할 테니까.”
그녀가 손을 내미니 아이는 움찔거리며 망설이다가 이내 그 손을 잡았다.
진열장으로 다가서니 벨은 케이크를 두고 고민 중이었다.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진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민하던 벨이 아이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넌 뭐로 고를…. 어? 그러고 보니까 이름을 모르네. 난 벨이야.”
벨이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자, 아이는 뺨을 붉히며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 손을 잡았다.
“난 해리야.”
회색 머리칼에 새빨간 눈동자. 해리는 무심코 시선이 머물 만큼 예쁜 아이였다.
“응, 해리. 넌 뭐 먹을 거야?”
“나는….”
아이들이 진열장을 보며 고민하는 사이, 아르제오가 직원에게 디저트를 주문했다. 벨과 해리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들로.
거기에 추가로 아이들이 고른 디저트도 주문했다.
아르제오가 따로 얘기한 덕에 그들은 탁 트인 자리 대신, 별실로 안내되었다.
테이블에 디저트가 놓이자 벨과 해리는 눈을 빛내며 디저트를 바라보았다.
“먼저 먹을까?”
“네!”
벨의 힘찬 대답에 레이라와 아르제오가 싱긋 웃었다.
“자, 해리. 이것도 먹어 봐, 맛있으니까.”
“아…. 고, 고마워….”
귀족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당할 때는 부릅떴던 두 눈이 지금은 순하기만 했다.
달콤한 케이크를 포크로 작은 입에 쏙 집어넣은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해리는 도서관에서 뭘 공부하고 있었니?”
아이들이 어느 정도 디저트를 맛볼 때까지 차를 마시며 기다린 레이라가 얘기를 꺼냈다.
포크를 입에 문 해리는 벨과 아르제오를 한차례 힐끔거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식물도감을 보고 있었어요.”
“어머, 식물도감을?”
해리의 대답에 레이라가 눈을 빛냈다.
“그대가 좋아할 만한 대답이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운 듯 아르제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무심코 손을 뻗어 레이라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귓바퀴에 걸쳤다.
자연스러운 행동에서 사랑이 묻어나서, 해리는 그게 신기한 듯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친절한 이들을 본 적은 있지만, 두 사람에게서는 남다른 온기가 느껴졌다.
“저….”
두 사람을 빤히 응시하던 해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용기를 냈다.
“저도, 플로스 상단에서 일하고 싶어요…!”
눈까지 질끈 감으며 하는 말에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름한 차림에 왜소한 몸집. 많이 봐도 루카의 또래였다. 그런데 상단에서 일을 하고 싶다니.
누가 보아도 일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레이라와 아르제오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어색하게 웃자, 해리가 참담한 얼굴을 했다.
“역시…. 안 될까요?”
“응?”
“너무 어려서요? 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누구든 출입할 수 있도록 도서관을 만들어 주셔서, 그때부터 매일 책도 보고 공부했어요.”
레이라가 그 도서관을 만든 취지는 순전히 해리와 같은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누구든 신분과 상관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원하는 책이 있거든, 돈에 구애받지 않고 볼 수 있도록.
귀족들보다는 평민들을 위한 도서관이었다.
그들에게도 배움의 자유가 주어지길 바라서. 그녀가 리히덴에서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해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레이라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온기가 느껴진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따뜻한 미소였다.
“도서관은 누구든 배우고 싶은 것을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든 거란다. 해리와 같은 아이들이 원하는 미래를 선택했으면 싶어서.”
그렇게 말한 그녀는 손을 뻗어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히려 고맙네.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
고맙다는 말에도 해리는 슬쩍 레이라의 눈치만 살폈다. 그 말이 자신을 상단에서 일하게 해 주겠다는 말은 아니었으니.
“아가, 집은?”
“네?”
레이라만 바라보던 해리는 아르제오의 덤덤한 물음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해리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다가 그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 집에 가면 되겠다!”
한입 가득 케이크를 넣고 오물거리던 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집에 관한 물음에 해리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건 알 수 있었다.
그걸 집에 가기 싫은 거라고 해석한 벨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어때, 해리? 네가 원한다면 함께 갈래?”
해리는 멍하니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 플로스 상단에서 일할 수 있어요?”
“조금 더 이것저것 공부해 보고, 그래도 해리가 원한다면 나는 환영이야.”
“그럼, 그럼 갈래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해리의 모습에 벨이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는 집에 친구가 생긴다며 벨도 기뻐했다.
* * *
해리는 지금보다도 더 어릴 때 부모의 손에 의해 숙박업 가게에 넘겨졌다. 잔심부름이 가능한 아이라며 부모는 대가로 돈을 조금 받아 갔다고.
이후로 해리는 몸집이 작다는 이유로 아주 소량의 식사만이 주어졌고, 가게 주인은 온종일 쉴 새 없이 일을 시켰다.
술을 마시는 손님들이 대부분인 가게에, 머무는 이들은 적어서 해리에게 방을 내어주는 건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해리는 밤늦은 시간까지 접시를 치우며 일해야 했다.
취객에게 얻어맞는 일도 많았고, 주인장에게도 학대받아 왔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제게는 잘 곳과 적은 식사라도 주어졌으니. 길거리로 나가면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그 폭력을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발 때리지 말아 달라 빌기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들은 것이 플로스 상단의 도서관 얘기였다. 손님들이 떠드는 플로스 상단의 이야기를 엿들은 해리는 비로소 도망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여 도달한 것이, 포레스티아 공작가였다.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다녀왔어, 루카.”
아직 일곱 살인데 제법 얌전해진 루카의 마중에 레이라가 기분 좋게 웃었다.
벨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카는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건 순전히 아르제오가 읽어 준 동화책에 여동생은 오빠가 지켜야 하고, 듬직해야 한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오빠의 역할에 꽤 집중한 모양이라 내버려 두었더니, 요새는 루카의 애교를 보기가 지나치게 어려웠다. 그게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조금 서운했지만.
루카는 그들의 뒤를 따라온 해리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루카, 이쪽은 해리라고 한단다.”
레이라는 루카의 눈높이에 맞춰 해리를 소개했다.
“도서관에 갔다가 만난 아이야. 식물 공부를 하는데, 후에는 플로스 상단에서 일하고 싶다네. 그래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어서 함께 왔어. 루카 생각은 어때?”
그녀의 설명에 루카는 빤히 해리를 바라보았다. 허름한 차림의 왜소한 아이. 어쩐지 심판대에 놓인 것 같은 기분으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싱긋 웃으며 레이라에게 고개를 끄덕인 루카는 먼저 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 난 루카야.”
그 모습은 레이라와 퍽 닮아있었다.
생김새는 아르제오와 더 가까웠지만, 머리칼과 눈 색 때문인지 분위기는 레이라와 더 닮은 듯했다.
해리는 조금 망설이며 레이라와 아르제오의 눈치를 살폈다.
“자, 손 이렇게 잡아야지!”
그리고 망설이는 해리의 손을 벨이 덥석 잡아서 루카와 악수를 시켰다.
얼결에 붙잡은 손을, 루카는 기분 좋게 웃으며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벨은 그들의 악수를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해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낯설고, 그러나 조금 따뜻해서 어쩐지 마음이 간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