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15)화 (115/122)

<115화>

외전 2화.

알폰스는 설마 레이라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당황했다.

크게 떴던 눈에 동요가 드러났고, 알폰스는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아 그걸 감췄다.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레이라도 딱히 그런 대답을 예상하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면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자신을 사랑해 주고 아껴 주던 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이니 말이다.

하루아침에 어미와 둘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 떠나던 길에 다시 붙잡혀 황궁으로 돌아왔었다.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던 순간 로이드는 전혀 다른 제안을 했었다.

그를 황태자로 삼을 것이라는. 그러니 황후를 들이지 않는 제 방패가 되어, 황태자가 되라고 말이다.

그 대가로 알폰스는 차기 황제가 되어 노엘이 원했던 세상을 네 손으로 만들어 보라고.

그리고 로이드는 정말로 아직까지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

긴 시간이 지나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이제는 알폰스도 그 마음이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레이라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아이도 둘이나 있었고.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성군으로서 제국을 다스리시니 그리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노엘과 반역을 꾀하던 이들을 철저하게 숙청했을 당시에는 로이드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두려워하는 이들도 많았고. 하지만 지금은 정말 제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저도, 같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녀에게 알폰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이라는 조금 의외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저도 그리 오래 원망하지는 않았답니다. 그저 폐하께서 성군이 되시길 바랄 뿐이었죠.”

그녀의 경우, 로이드의 태도가 달라진 지는 꽤 됐던지라 퍽 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처음 시타델로 유배될 때도, 원망보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마저 들었으니.

알폰스는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찻잔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금 식어버린 레벤 차를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제가 시간을 너무 오래 빼앗은 듯싶네요. 시타델 부인께서는 바쁘실 텐데.”

“황태자 전하만큼 바쁠까요.”

“오늘은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알폰스가 옅은 미소를 머금자 레이라도 몸을 일으켰다.

“전하께선 그분을 많이 닮으셨네요. 분명 좋은 황제가 되실 테니, 이 제국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과찬이십니다.”

그렇지만 슬쩍 웃는 알폰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 아비를 닮았다는 말은, 좀처럼 들을 수 없었으니까.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네, 저도요.”

싱긋 웃는 레이라를 뒤로하고, 알폰스는 먼저 그곳을 벗어났다.

황태자를 배웅한 그녀는 다시 휴식실로 돌아갔다.

이미 식어 버린 찻잔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로이드가 여전히 저리 고집스레 홀로 지내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제가 무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입을 닫았다.

똑똑.

고요한 휴식실에 노크 소리가 들려 레이라가 작게 대답하니,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엄마!”

“어머, 벨.”

아르제오를 닮아 짙푸른 머리칼에 은회색 눈동자. 하지만 생김새는 레이라를 더 닮아있었다.

“늦길래 모시러 왔지.”

벨의 뒤로 아르제오가 고개를 쏙 들이밀며 싱긋 웃었다.

“루카는?”

레이라가 문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유진에게 검술 수업을 받고 있어. 벨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기에 데려왔지.”

벨은 레이라에게 폭 안기며 말했다.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응, 엄마도 우리 벨 보고 싶었어.”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예쁜 아이였다.

루카와 벨은 공작가뿐만 아니라, 온 공작령의 사랑을 받는 아이들이었다.

레이라는 벨의 손을 잡고 휴식실을 빠져나왔다.

“마침 얼마 전에 책이 새로 들어왔는데, 보고 갈래?”

“좋아요!”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벨을 보며 새 책을 들여놓는 코너로 향했다.

벨은 얼마 전까지도 도서관 안에 마련한,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 가득한 코너에만 있었는데, 이제는 동화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쪽으로 다가가니 어쩐지 조금 불미스러운 목소리들이 들렸다.

“넌 도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야?”

“그 더러운 손으로 책들을 만질 건 아니지?”

“플로스 상단의 도서관이라기에 마음에 들었는데, 이곳은 출입도 통제하지 않는 거야?”

고작해야 루카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정도의 아이들 같아 보였다.

그들이 둘러싼 것은 작고 허름한 아이 한 명.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즉시 걸음을 멈춘 레이라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책을 살피는 어른들은 몇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저 아이들의 보호자로 보이는 이들은 대놓고 방관했다.

슬쩍 시선을 더 돌리니, 도서관의 관리인과 직원들은 다른 일로 바빠 이쪽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녀가 얕은 한숨을 내쉬는데, 손을 붙잡고 있던 벨이 빽 소리쳤다.

“야! 너희들 뭐 하는 거야!”

그 한마디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벨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벨의 말에 레이라와 아르제오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여럿이서 한 명을 괴롭히는 건 비겁한 짓이라는 것도 몰라?”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또박또박 말하는 벨은 어여쁘기만 했다.

모진 말을 해대던 아이들도 입을 헤 벌리고 벨을 바라보았다.

벨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레이라의 손을 놓았다.

손을 허리에 척 올린 벨은 성큼성큼 걸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쭉 편 벨은 그대로 괴롭힘당하던 허름한 아이의 앞을 버티고 섰다.

“이 도서관은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야. 플로스 상단 도서관인 걸 알면서 그런 것도 몰라?”

허리춤에 올린 손, 뾰로통한 표정까지 벨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넋을 놓고 벨을 바라보던 아이 중 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아무리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 해도, 이 제국에서 귀족이랑 평민이 같을 수는 없잖아. 신분 차이라는 것이 있다고.”

그러자 벨은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

“알 게 뭐야.”

그러더니 제 뒤의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자, 일어나.”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벨의 손을 잡았다. 그 붉은 눈으로 벨을 빤히 바라보는데, 남자아이치고는 퍽 예쁜 얼굴이었다.

저보다 작은 아이의 손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 어쩐지 아이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네, 네가 신분 차이나 그런 것들을 몰라도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어!”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는 말에 벨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는 거야’하고 생각하는 게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말해 볼 수 있니?”

얌전히 벨을 지켜보던 레이라가 차분하게 물었다.

“네?”

무리의 아이는 화들짝 놀라 레이라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제국에는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이 있지. 그렇다면 네가 주장하는 그 차이는 무엇이니?”

그녀의 말에 아이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대답 못 하면서 아는 척한 거네.”

허름한 아이의 손을 붙잡은 채로 벨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아이를 이끌고 아르제오에게 다가갔다.

벨의 지적에 얼굴까지 벌게진 귀족 아이는 횡설수설하며, 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

“귀족은 평민들보다 귀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해요!”

“무슨 일이시죠?”

아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자, 근처를 지키고 있던 하인이 다가왔다. 경계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째서 저 허름한 아이를 감싸느냐는 의문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여럿이서 한 아이를 괴롭히기에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차분한 레이라의 대답에 하인은 경멸 어린 표정으로 벨의 손에 잡힌 아이를 힐끔거렸다.

“괴롭힘이라니요? 도련님께서 저런 아이가 어찌 이곳에 출입할 수 있었는지를 따지고 계셨던 것 같은데요.”

하인의 불손한 태도에 아르제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자, 벨이 얼른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 도서관 출입에 신분 제한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요.”

“하,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말이지요. 이곳에서 그런 걸 모르는 이도 있습니까?”

“저놈이….”

하인이 레이라를 비웃으며 말하자, 아르제오가 참지 못하고 나서려던 찰나.

“앗, 상단주님! 이곳에 계셨습니까!”

도서관 직원 하나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표정으로 하인을 마주하던 레이라는 싱긋 웃으며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고가 많네.”

“그럴 리가요! 일도 재밌습니다.”

“상단주…?”

직원의 말에 눈앞의 하인이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래, 당신이 무례하게 말대답하던 이 사람, 플로스 상단의 주인이다.”

당장이라도 저 하인의 주둥이를 틀어막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아르제오가 나지막이 말했다.

낮아진 목소리가 마치 으르렁거리는 것 같아서 하인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대들 말이 맞는 것도 같네. 모두가 출입할 수 있게 만드니, 너희 같은 것들이 생기잖아. 안 그래?”

어깨를 으쓱이며 들으란 듯이 말하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하는 수 없다는 듯 픽 웃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직원의 물음에 아르제오가 하인과 귀족가 아이들을 가리켰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더군. 어찌 이 도서관에 평민이 있냐며 레이라에게 소리를 지르지 뭐야.”

소리를 지른 적은 없었지만, 아르제오의 과장을 정정하기도 전에 직원이 분개했다.

“이곳에서 신분을 따지는 것은 금기입니다! 누구든 원하는 것을 선택해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만드신 곳이란 말입니다!”

직원이 목소리를 높이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들리는 내용에, 다른 직원들까지 눈썹을 치켜올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도서관 내에서는 귀족 신분이 중요하지 않은 걸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황제 폐하께서도 승인하신 일인 걸 어기는 거면, 폐하의 명을 어긴 게 되지 않겠습니까?”

황제까지 들먹이는 직원들을 보며 하인과 아이들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 상황에 레이라는 조금 난처했지만, 아르제오는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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