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외전 1화.
진통이 시작되고, 레이라의 비명이 들리며 아르제오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제가 어쩌자고 그녀에게 이 고통을 또 겪게 하는가.
하지만 곧 진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
루카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엄마 아파요? 괜찮은 거예요?”
“루, 루카?”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은 금세 또르르 떨어져 내렸고, 루카의 울먹임은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엉엉 우는 루카를 보니 아르제오는 절로 진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이를 번쩍 안아 토닥였다.
“괜찮아, 루카.”
“루, 루카 님! 방에 계시지 않아서 찾았습니다!”
아르제오의 품에 폭 안긴 루카가 훌쩍이는 사이 멀리에서 하녀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오늘은 제가 대신 동화책을 읽어 드리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방으로 돌아가요, 네?”
하녀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루카를 달래 보려 했지만, 루카는 아르제오에게 안겨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루카 님….”
“괜찮다, 내가 안고 있지.”
“하지만….”
하녀가 말끝을 흐리며 레이라의 비명이 들려오는 방을 힐끔거렸다.
아이에게는 너무 크나큰 공포일 터였다.
“내가 방으로 함께 가지.”
“예? 아, 예.”
원래 아르제오는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때까지 아르제오는 절대 그 방앞을 벗어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루카가 함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루카와 함께 그 앞에 계속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나중에 레이라에게 크게 혼이 날 테니 말이다.
그곳을 벗어나고 나서도 루카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고, 아르제오의 품에 파묻은 얼굴도 들지 못했다.
“루카.”
그가 부드럽게 불러도 루카는 대답도 하지 못할 만큼 울기만 했다.
방으로 돌아가 루카를 안은 상태로 침대에 앉은 아르제오는 한참이나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엄마는 괜찮아.”
그는 한참이나 레이라가 괜찮다는 것을 가만히 속삭였다.
“아빠, 엄마는 왜 아픈 거예요?”
그 질문에 아르제오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이내 차근차근, 루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 주었다.
아기가 태어나는 건 그만큼 엄청난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기에 엄마와 아빠는 아기를 엄청나게 사랑한다는 것도.
저렇게 아픈 건 기억도 안 난다고 할 만큼 루카를 사랑한다고 하니, 아이는 조금 안심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다가 루카는 이내 잠이 들었다. 눈가가 빨갛게 부어올라, 아르제오는 이 모습을 보고 레이라가 분명 자신을 혼내겠구나, 싶었다.
저녁때쯤 진통이 시작되었으니 루카가 모르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이도 분명 엄청나게 놀랐을 것이다.
아르제오는 루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그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서둘러 산파와 있는 레이라에게 향했다.
루카 때는 진통 시간도 길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향하는 도중 레이라의 비명이 멎은 것을 깨달은 아르제오는 냅다 달렸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던 방 앞에 다다르니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루카는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안심하던 헤레이스는 아르제오를 발견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잠들었어.”
여전히 루카가 걱정되었지만, 아르제오는 곧 시선을 돌렸다. 산파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건강한 여자아이였다.
“수고했어.”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아르제오는 저도 모르게 울먹이고 있었다.
고통을 느낀 건 자신인데도 어쩐지 아르제오가 더 아파했던 듯 보였다.
레이라는 싱긋 웃으며 산파가 제 품에 안겨 준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진통은 정말이지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끔찍했다. 하지만 그 고통 끝에 아이를 이렇게 품에 안는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쭈글쭈글하고 조금 웃음이 나게 생겼다. 하지만 레이라와 아르제오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딸아이이니 그대를 닮았으면 좋겠네.”
“제오를 닮으면 틀림없는 미인이 될 텐데도요?”
“그대를 닮아도 엄청난 미인으로 자랄 거야.”
“하지만 벌써 제오를 닮은 것 같아요.”
레이라는 품 안의 딸아이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너무나도 작고 연약한 생명체.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행복한 일일까.
그녀가 감동에 젖어 있을 즈음, 산파가 다시 나타나 하녀들과 아기를 데려갔다. 레이라는 피를 조금 많이 흘렸으니 쉬어야 한다며.
* * *
두 사람의 딸, 벨과 첫째 루카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고는 플로스 상단에서 큰 도서관을 만들었다.
플로스 상단은 크게 성장해, 대륙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루카가 7살이 되던 해에는 수도에도 커다랗게 도서관이 생겼다.
언젠가 레이라가 리히덴에서 보았던,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누구든 자유롭게 미래를 택할 수 있도록. 루카와 벨이 자유롭게 제 미래를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런 마음을 담아서 플로스 상단은 대서고를 만들었다.
레이라는 가끔씩 대서고를 드나들며 그곳이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이는지 확인했다.
아이들이 더 어릴 때는 함께 오기도 했지만, 오늘은 혼자였다.
아르제오는 수도 방문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다른 곳에 가는 걸 더 좋아했으니.
‘사람들이 많아졌네.’
안을 둘러본 레이라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수도에도 도서관이 생기고 벌써 3년이 지났다.
준비한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그녀는 리히덴에서 보았던 도서관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와 같은 곳이 발루아에도 생기니 꽤 보람찼다.
책장 사이를 느릿하게 거닐며 안을 살핀 레이라가 더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조용하고, 전문 서적으로 넘쳐났다.
리히덴에서 보았던 도서관도 이런 느낌이었으니까.
“아, 시타델 부인이 아니십니까.”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조용한 곳이니만큼 목소리를 낮춰 레이라를 부르는 이가 있었다.
레이라는 포레스티아 공녀 대신 시타델 부인, 플로스 상단주라고 불리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아,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의젓하게 자란 알폰스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알폰스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왔다. 제법 자라고 나니, 노엘과 꼭 빼닮은 얼굴이었다.
“훌륭한 서고군요.”
“감사합니다, 전하.”
황태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말을 꺼냈다.
“혹시 잠시 시간을 내어줄 수 있습니까?”
“예, 그럼요.”
알폰스의 조심스러운 요청에 레이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황태자를 서고의 작은 휴식실로 안내했다. 플로스 상단에서 운영하는 곳이니, 간혹 상단 사람이 일 때문에 들렀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었다.
그곳에서 레이라는 레벤 차를 내어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알폰스는 풍겨오는 차향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폐하께서 늘 드시는 차군요.”
“두통이 심하시다기에 매달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레벤은 이제 피울 수 없는 꽃이라 불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적의 꽃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레이라 외에는 피우지 못했고, 시타델 섬에서 키운 레벤의 효능은 상상을 뛰어넘었으니.
종종 말린 꽃잎을 제공했기에 그 덕을 보는 사람들을 늘어났지만,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귀한 것을 로이드는 매달 받았고, 아마도 그 덕에 지금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을 터였다.
알폰스는 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타델 부인과는 한번,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좀처럼 황궁 연회에도 나오지 않으시니까요.”
“저도 최대한 참석하려고는 하지만 상단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요.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네요.”
그런 이유가 아님을 알지만 알폰스는 지적하지 않았다.
레이라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고, 로이드가 한 일들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한 건,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예. 제가 아는 것이라면, 대답해드릴게요.”
레이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니 알폰스는 잠시 망설였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 꺼내어 보지 못했던 말이니까.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시선을 살짝 떨어트리며 묻는 알폰스를 보며 레이라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노엘의 아이인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알폰스를 후계로 둔 로이드가 다른 황후를 들이지 않은 것도.
이렇게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말이다.
안타까웠지만, 그녀가 로이드에게 기대하는 건 성군으로서의 행보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로이드는 그 기대에 잘 부응하고 있었다.
발루아는 날로 발전했고, 비리 귀족들은 날로 줄었다.
확실히 노엘이 바라던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분명 노엘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 고운 심성을 빌미로 귀족들이 그를 지지했고,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크게 바뀌어 로이드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많았지만.
“그런 분이셨군요….”
짤막한 대답에 알폰스가 조금 서글프게 웃었다.
“…반역을 일으키지 않으셨으면, 지금도 살아계셨겠죠.”
레이라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두 형제 사이의 일이니. 다만, 리히덴에서 비슷한 황위 다툼을 하는 걸 보고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만일 노엘이, 황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발루아의 힘이 되고자 했다면. 제 어미의 욕심을 꺾고 로이드와 뜻을 함께했다면.
그랬다면 좀 더 다른 결과를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제 와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생각들이지만.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알폰스는 레이라가 대답이 없자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 딱 한 번, 아버님의 산소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저 인사 한 번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런 곳에 계시니 찾는 사람이라고는 어머님과 저뿐이거든요.”
알폰스도 이제는 알 터였다. 노엘이 그런 곳에 묻힌 것을, 로이드가 모를 리가 없다는 걸.
그저 묵인하고 있을 뿐. 하지만 아마 찾아가지는 못할 터였다.
레이라는 가만히 알폰스를 응시하다가 입을 뗐다.
“폐하를…. 원망하고 계시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