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여전하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제 아이까지 끌어들여 결국에는 포레스티아의 사람을 리히덴에 들이려고 할 줄은.
“…앞으로는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물론, 아이도 보실 수 없으실 겁니다.”
결국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뭐야? 그게 감히 아비에게 할 소리냐!”
눈을 부릅뜨며 인상을 찌푸리는 제 아비를 보며 아르제오는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으니, 실망도 하지 않는 것뿐.
만나게 하면 분명 루카에게 상처 되는 말을 할 터였다. 그리고 그건 불필요한 상처였다. 꼭 겪지 않아도 되는.
“저 역시, 아버지로서 제 아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르제오의 서늘한 눈빛에 선황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몸 건강히 지내세요.”
“거기 서라, 서라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선황의 역정에도 아르제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히 그곳을 벗어났다.
등 뒤로 흥분한 선황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황궁의와 안절부절못하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마저도 뒤로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 레이라와 루카를 보고 싶었다. 그 둘만이 이 마음은 진정시켜 주고, 허한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 테니.
아르제오는 그곳을 빠르게 벗어나 자신들이 머무는 궁으로 돌아갔다.
마침 레이라와 루카는 정원을 산책하는 중이었고 저 멀리 루이스가 달려오는 것도 보였다.
그 뒤를 질린 얼굴로 따르는 믹도, 아닌 척하며 함께 나타난 로렌스도.
‘…원래 그랬지.’
그래, 원래 그랬었다. 아버지는 없는 존재로 여기고 살았다. 원래부터 제게는 형제들만이 가족의 전부였으니.
“루카!”
루이스가 환하게 웃으며 루카에게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에 맞춰 로렌스도 걸음을 서둘렀다.
“삼촌들!”
그새 친해지기라도 한 건지 루카는 폴짝폴짝 뛰며 루이스와 로렌스에게 달려갔다.
레이라가 위험하니 뛰지 말라고 말했지만, 루카가 더 빨랐다. 금세 루이스와 로렌스의 품에 폭 안겼으니.
“벌써 친해졌나 보네.”
“아, 제오. 왔어요?”
고개를 돌렸던 레이라는 아르제오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눈치챘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어두웠다.
“…왜 그래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묻자, 아르제오는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덮었다.
마른세수하며 감정을 덮어낸 그는 살포시 레이라의 품에 기댔다.
“역시 루카를 만나게 하는 건 안 되겠어.”
그 말은 아르제오가 만나고 온 선황이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루카가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서, 선황과 만나게 할 수는 없다고.
그리고 그로 인해 아르제오가 또 상처받았다는 걸.
레이라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그것 외에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곁에 있을 거라고.
그녀의 손길에 아르제오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여전하시더라고…. 변하지 않으시네.”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그게 당연했다.
아르제오는 한숨과 함께 헛웃음을 흘렸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저도 모르게 있었나 보다.
드디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조금은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기를.
하지만 여전히 포레스티아를 탐내는 것으로 보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에 루카까지 끌어들이려고 하니 말이다.
레이라의 토닥이는 손길에 아르제오의 마음은 점차 진정되었다.
“엄마! 나도!”
아르제오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는데 루카가 달려와 함께 레이라의 품에 안겼다.
“아이가 보는데 이런 애정행각 괜찮은 거야?”
픽 웃으며 말하던 루이스는 고개를 든 아르제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선황을 만나러 가는 건 알고 있었다. 아르제오의 표정이 저렇다는 건, 아마도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뜻.
“로렌스 삼촌, 오늘 루카랑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어, 어, 그래…. 그럴게.”
루카의 물음에 어색하게 대답하는 로렌스를 보며 루이스가 두 사람에게 다가섰다.
“결과가 그다지 좋진 않은 모양이네.”
“루카는 보여드리지 않을 겁니다.”
“결국 그렇게 됐군.”
루이스는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 그 변화는 강요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엄마, 삼촌들도 왔으니까 이제 가요!”
“그래, 그럴까?”
그들은 다 함께 예정대로 피크닉을 즐겼다. 그곳이 황궁 정원이라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따스한 햇볕과 가벼운 도시락. 거기에 진심으로 즐거운 듯이 활짝 웃는 루카.
루카의 미소만으로도 모두는 절로 따라 웃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이를 향한 사이, 레이라가 슬쩍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이전의 세 사람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있다면 그건 아주 오래전이겠지.
날카로운 이빨을 세운 듯했던 로렌스의 분위기와 태도도 지금은 전혀 달랐다.
루카를 보는 시선은 부드럽기만 했다.
‘우리 루카는 대단하네.’
싱긋 웃은 레이라는 다시 루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예상대로, 루이스와 로렌스가 긴 시간 황위를 두고 대립했던 탓에 함께 식사했던 적도 손에 꼽았다.
“아빠.”
“그래, 루카. 왜?”
“삼촌들은 서로 닮았네요?”
“응?”
루카의 뜬금없는 말에 루이스와 로렌스가 저도 모르게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스워서 레이라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삼촌들이랑 아빠랑도 닮았어요.”
이어진 루카의 말에 두 형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르제오를 향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평소 그다지 서로 닮았다고 인식하지 않아서 조금 미묘한 표정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까르륵 웃은 루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번엔 제 얼굴을 가리켰다.
“전 아빠도 닮았으니까 그럼 삼촌들이랑도 닮았나 봐요!”
배시시 웃는 루카를 보며 모두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 보군.”
픽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렌스를 시작으로, 닮았다는 말에 감격한 루이스.
“우리 루카는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할까?”
“그러게요. 루카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눈을 빛내며 사랑스럽게 루카를 보는 아르제오와 레이라까지.
아르제오는 벌써, 오전에 선황을 만났던 일은 잊어버렸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만 곁에 있어 준다면,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견딜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시간도 나쁘지 않군.”
“그러네요.”
로렌스의 작은 중얼거림에 루이스가 맞장구쳤다.
루카가 있으니 그들 사이에서 웃음은 끊이질 않았고, 형제들 사이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만끽하는 평화였다.
* * *
웃음 가득한 피크닉이 끝나고, 루카는 로렌스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오늘은 삼촌과 자겠다며 떼를 썼다.
어째서 그 삼촌이 자신이 아니라 로렌스인 것이냐며 루이스는 충격을 금치 못했고.
로렌스는 조금 어색하게, 그러나 명백히 기뻐하는 모습으로 루카의 손을 붙잡고 돌아갔다.
루이스는 그 모습은 분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둘만 남는 밤이 되니, 아르제오는 조금 긴장되었다.
최근 들어, 레이라가 자신을 유혹하는 횟수가 늘었으니 말이다.
잘 준비를 마친 아르제오가 조금 뻣뻣하게 침대로 향했다.
“왔어요?”
침대에 먼저 앉아 책을 읽던 레이라는 그를 발견하고는 책을 덮었다.
과연 오늘은 어떤 유혹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아르제오는 사실 긴장이 아니라 그저 기대하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책을 덮은 레이라는 먼저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러고는 피곤한 듯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아르제오는 그런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물었다.
“자려고?”
“네? 왜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는 걸 보니, 그녀는 정말 잠을 청할 생각인 듯 보였다.
그에 아르제오는 불퉁한 얼굴로 이불을 젖혔다.
“…오늘은 왜…. 유혹 안 해?”
중간에 망설임이 섞인 그 질문에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곧 웃음을 터트렸다.
“제오가 곤란해하기에 오늘은 그만두려고 했는데요?”
레이라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그 얼굴에 아르제오는 어쩐지 분했다. 귀까지 빨갛게 물들였지만.
“딱히 곤란해한 건….”
그가 말끝을 흐리자 레이라가 상체를 일으켰다.
“곤란해한 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뒷말을 재촉하는 태도에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늘따라 또 사람 미치게 예쁘네.’
그런 그녀의 목선, 입술, 눈빛까지 유난히 예뻐 보였다.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한 아르제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 귀까지 붉히며 부끄러워했냐는 듯이.
“그럼 오늘은, 내가 유혹해 볼까.”
태세 전환이 빠른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뭐야, 유혹하려는데 왜 웃어?”
그녀의 웃음에 아르제오가 조금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좋아서요. 제오가 유혹하면, 전 홀랑 넘어갈 테니까요.”
그 낮은 웃음소리에 아르제오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백금발이 손가락 사이에 얽히는 것이 기분 좋았다. 희고 고운 살결에 입을 맞추는 것도.
아르제오는 놓고 싶지 않다는 듯 레이라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날 밤은 어쩐지 다른 날과는 다르게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더욱 원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레이라는 얼마 안 가 다시 눈을 떴다.
잠든 사이에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는지 아르제오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멀뚱멀뚱 눈앞의 맨살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제오는 잠든 얼굴도 예쁘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지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예쁘다’라는 생각을 하는 걸 알았으면 아르제오가 분한 얼굴로 반박했을 테지만.
“…왜 벌써 깼어.”
“아, 깨웠어요? 미안해요.”
눈을 감은 채로 말하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서둘러 손을 뗐다.
그러자 그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손을 붙잡아 다시 제 얼굴에 올렸다.
그 행동에 레이라는 작게 웃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놀랍네, 나도 마침 같은 말을 하려고 했어.”
픽 웃은 아르제오가 살포시 눈을 떴다.
졸린 눈이었지만 레이라를 보는 시선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사랑해.”
그날은 아침까지, 둘은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길지 않았지만, 의미 있었던 리히덴 여행으로 그들에게는 가족이 한 명 더 생겼다.
큰 행복을 안겨준 루카와 더불어 더욱 크나큰 행복을 안겨 줄 아이가 또 한 명.
아르제오 덕에 레이라는 꿈꾸던 것들을 전부 얻었다.
조금 두려울 만큼의 행복과 함께.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