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12)화 (112/122)

<112화>

“뭐?”

쪽.

놀라 되묻는 아르제오에게 레이라가 짧게 입을 맞췄다.

“싫어요?”

“그럴 리가 있어?”

“그럼 해 줘요.”

“의도가 너무 뻔하잖아.”

아르제오가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그 목소리가 퍽 달가웠다.

투덜거려도, 불만이 있어도, 저런 목소리로 말하면 결국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그이기에.

“그래도 넘어올 거잖아요.”

“이렇게 유혹하는데 어떻게 버텨.”

“그래요. 이제부터는 계속 유혹할 거예요.”

레이라는 아르제오의 뺨에 한번, 그리고 다시 입술에 한 번 입을 맞췄다.

“있죠. 저는 루카가 너무 예뻐서, 진통했던 건 기억도 안 나요.”

“루카가 사랑스러운 거랑 별개야. 난 똑똑히 기억하니까.”

“그래도 들어줄 거죠? 제가 원하니까.”

레이라는 계속해서 그에게 입 맞추며 싱긋 웃었다. 그에 아르제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대는 정말이지, 치사해.”

그녀가 유혹하면 그는 버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 괴로운 진통을 다시 보는 건 여전히 두려웠다.

“제오한테는 그런 편이죠.”

레이라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이번엔 진하게 그에게 입을 맞췄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언제까지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게 둘 수는 없었다.

숲에 홀로 들어서는 게 두렵다면, 옆에서 함께 걸어 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제 진통에 대한 두려움만큼은 어찌할 수도 없기에 그가 극복해야 했다. 그렇다고 진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그녀 자신은 루카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 고통을 전부 잊었는데, 아르제오만 기억하고 있었다.

아르제오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레이라의 입맞춤이 길어지며 더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

* * *

“오늘은 루카와 함께 제도를 구경시켜 줄 예정이었는데 말이지.”

“요 며칠 줄곧 루카와 붙어 계시지 않았습니까. 안 바쁘십니까?”

아르제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묻자, 루이스의 곁에 있던 보좌관 믹이 대신 대답했다.

“루카 님과 시간을 보내시려, 모든 일은 루카 님이 주무시는 시간에 해결하고 계십니다.”

‘괴물인가.’

믹의 대답에 아르제오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쩐지 최근 루이스의 눈 밑이 거뭇거뭇하다 싶었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웃은 레이라는 믹에게 말했다.

“리히덴으로 오는 길에 말린 레벤 꽃잎을 가져왔어요. 그걸로 폐하께 차를 내어드리는 게 좋겠어요.”

“예,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폐하, 오늘은 함께 로렌스 전하를 뵈러 가기로 했으니 봐주세요.”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하는 수 없군.”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들이 다시 공작령으로 돌아가면, 루카를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해졌었다.

믹이 루이스의 등을 떠밀며 오늘은 정상적인 시간에 업무를 보고 쉬시라고 잔소리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루이스가 집무실로 떠난 뒤,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루카를 데리고 황궁을 벗어났다.

로렌스가 황궁을 떠난 건 아니었지만, 그는 주로 황궁 밖을 나다닌다고 했다.

종종 자신의 궁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낸다고.

그렇다고 귀족들과 접촉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저 밖에서 사람들이 어찌 살아가는지 지켜보는 것이라고.

주변에서는 루이스에게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는 듯했지만, 정작 황제는 로렌스를 의심하지 않았다.

본인 입으로 루이스에게, 그저 황궁 밖의 삶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로렌스는 그런 식의 눈속임을 펼치며 일을 꾸밀 성격은 아니었다. 그건 누구보다도 아르제오와 루이스가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미리 들은 정보로, 로렌스가 최근 자주 나타나 시간을 보낸다는 곳으로 향했다.

제도는 여전히 활기찼다. 루이스가 즉위하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겠지만.

각각 한쪽씩 손을 붙든 루카는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잘 아는 아르제오는 로렌스가 어디에서 무엇을 지켜보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광장에서 가장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레이라와 루카를 앉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금방 모셔올 테니까.”

“여기 계시는 게 아닌가요?”

“더 위에 계실 것 같은데, 루카를 데리고 가기에는 위험해서.”

“위요?”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르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픽 웃었다.

“아빠, 어디 가요?”

그녀와 똑같은 표정으로 루카가 물으니 아르제오는 걸음을 떼기가 힘겨웠다. 그는 루카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며 대답했다.

“삼촌 데려올게, 여기서 기다려.”

“네, 아빠.”

아르제오는 레스토랑을 나서며 레이라가 마실 차와 루카를 위한 간식을 주문했다.

그러고는 근처의 담벼락을 타고 올라섰다. 거기에서 지붕으로 타고 올라간 아르제오는, 한눈에 로렌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형님께서 이곳을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건물의 위로 올라선 아르제오가 로렌스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넋을 놓고 광장의 사람들을 바라보던 로렌스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픽 웃었다.

“잘도 이곳에 있는 줄 알았구나.”

“이곳을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저였습니다. 종종 올라왔던 것도 저고요.”

“그래, 그랬지. 이렇게 앉아 있으니 그때 네가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다.”

너무 높거나 너무 위험하지 않은 곳. 올라갈 수 있는 높이지만, 아무도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곳. 게다가 광장이 한눈에 보이는 곳.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이 잘 보여서 아르제오는 종종 그곳을 찾았었다.

“이곳이 마음에 드십니까?”

아르제오가 스스럼없이 로렌스의 옆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나쁘지 않네.”

광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덕에 간간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힐끔 바라본 로렌스의 옆얼굴은 전보다 생각이 많아진 듯했다.

“여유로운 시간 보내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아래 레스토랑에서 저희 루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님의 사색보다 기다리는 아들이 더 중요하다는 거군.”

“당연하죠.”

단칼에 돌아온 대답에 로렌스는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아르제오의 이런 모습은 실로 너무 오랜만이어서 정겨울 지경이었다.

한동안은 명령과 보고, 그런 딱딱한 것들만 둘 사이에 오갔으니 말이다.

“첫 만남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로렌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아르제오도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은 가볍게 그곳에서 내려와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아무렇지 않게 걷던 로렌스는 계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면서부터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크흠.”

“의외네요.”

“루이스처럼 살갑게 대하는 것이 어려우니 말이야. 아이가 날 싫어하진 않겠나?”

“…그런 걱정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르제오의 말에 로렌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첫 조카이니 그럴 수 있나.”

그 대답에 픽 웃은 아르제오는 레이라와 루카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렌스 전하.”

그들을 먼저 발견한 레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던 루카가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렌스 전하.”

“루카, 넌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이잖아.”

“아. 처음 뵙습니다, 전하.”

로렌스는 잠시 홀린 듯이 빤히 루카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일 때까지.

“…아, 크흠.”

로렌스는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어색함이 풀풀 풍기는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루카구나. 얘기 많이 들었다. 네…. 크흠, 사, 삼촌이다.”

로렌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서 남몰래 입술을 짓씹었다.

“풉….”

그런 로렌스를 보며 아르제오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어딘가 어색하고, 하지만 로렌스의 노력이 느껴져서 신선했다.

루카도 더듬더듬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로렌스에게 마음을 열었다.

아이가 저를 보며 활짝 웃을 즈음에는, 로렌스도 루이스의 호들갑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 * *

황궁에 머물면서도 아르제오는 며칠이나 선황에게 가는 것을 미뤘다.

아무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지만, 선황이 보낸 듯한 시녀 하나가 종종 근처에서 우물쭈물하다 돌아갔다.

그러니 괜히 그쪽에서 먼저 움직이기 전에 아르제오가 먼저 선황을 만나러 갔다.

침상에 누워서 아르제오를 맞은 선황은 조금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건강 악화로 황위를 물려주었다고 했는데, 정말 많이 야위어 있었다.

“…이제야 왔군.”

멍하니 앉아서 아르제오를 응시하던 선황이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이제야 물러나셨으니까요.”

가시 박힌 말에도 선황은 픽 웃었다.

“이제 물러났다고 거침이 없군.”

“아뇨. 그저 이젠 전부 상관없어진 겁니다.”

그러니 황제의 명령에도 끝내 리히덴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국경의 숲이 갖고 싶지만, 차마 두려워서 병사들을 보내지 못하는 황제가 있었으니까.

“정말 고집불통이더군.”

“그걸 이제야 아셨다니 대단하시네요.”

비꼬는 말투에 선황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아비인데, 언제까지 그런 태도를 보일 거냐. 어차피 황위는 루이스가 이었으니 이제 된 것이 아니냐?”

선황의 말에 아르제오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제 아버지는 아마도 평생,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 채로 생을 마감하겠지.

공작령이 갖고 싶어서 자신에게 황위를 강요하던 것도, 레이라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도. 그저 그것만이 지금 그의 태도에 대한 이유라고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여전하시군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어찌하여 혼자 왔느냐. 황궁에는 아이까지 함께 왔다고 들었는데.”

“보고 싶기는 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손주가 보고 싶은 건가. 아무리 자식에게 큰 애정이 없어도 말이다.

“무슨 소리냐, 당연히 보고 싶지. 루이스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지 않으냐? 형이라는 두 놈들이 아직 혼자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가 뒤를 이어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그 아이가….”

“하.”

아르제오는 끝까지 듣지도 않고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그만 좀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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