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루이스는 루카를 보기 위해 4년이나 기다렸다.
발루아로 찾아가면 만날 수 있었겠지만,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제 형제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면 결국엔 굽히고 들어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아르제오는 끝끝내, 루이스에게 선위하기 전까지는 리히덴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건강이 악화되고, 귀족들의 지지로 권력 구도는 루이스에게 확연히 기울어 있었다.
4년이면 오래 기다렸다. 더는 기력이 없는 선황은 루이스에게 선위했고, 아르제오는 그제야 리히덴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풍경을 슬쩍 훑어본 아르제오는 픽 웃으며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눈을 빛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이스와 그런 그를 보고 놀라 레이라의 뒤에 숨은 루카.
“어, 엄마….”
레이라의 치맛자락을 움켜쥐는 루카를 보며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괜찮아, 루카. 저분이 선물 삼촌이란다.”
“저분이요?”
“그래. 리히덴의 황제이시자, 루카의 삼촌이시기도 하지.”
“황제 폐하요?”
레이라의 말에 루카는 숨을 훅 들이켰다.
“황제 폐하가 삼촌이에요?”
“아빠가 황족이니까.”
“아빠가 황족이에요?”
루카의 4년 인생에서 제일 큰 충격을 받은 날이었다.
넋이 나간 루카에게 다가선 루이스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싱긋 웃었다.
“안녕?”
루카는 여전히 레이라의 뒤에 숨은 상태로 망설이면서도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폐하.”
아직 제대로 황궁 예절을 익힌 게 아닌 루카가 조금 어색하게 인사했다.
“정말 아르제오와 똑 닮았구나.”
“전 엄마도 닮았어요!”
“그래, 그러네.”
고개를 끄덕인 루이스는 루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 아우는 백금발도 잘 어울리는구나.”
“전 이쪽에 있습니다만, 폐하.”
“아, 그랬지.”
루이스는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만찬을 준비했다며 웃었다.
말은 아르제오와 레이라에게 해도, 시선은 루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루카도 처음에는 조금 낯설어하더니 곧잘 루이스를 따랐다.
아이가 재잘거리며 곁에서 떠들자,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느껴지는 작은 손에 루이스는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줄곧 만나고 싶었던 만큼,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선황께는…. 가 볼 건가?”
만찬을 함께 즐기고, 루카를 위한 디저트가 식탁에 올려졌을 즈음 루이스가 물었다.
과일 셔벗을 보며 신이 난 루카가 듣지 못하도록 조금 목소리를 낮춰서.
아르제오는 여전히 조금 회의적인 태도였다. 물론 루이스는 그 마음을 백번 이해했지만.
“가 보기는 하겠죠. 그게 저 혼자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르제오의 대답에 루이스는 과일 셔벗을 떠먹는 루카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리 예쁘기만 한 아이를 보고도 과연 선황은 여전히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할까?
그런 의문은 들었지만,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 보아왔지만, 줄곧 그랬으니 말이다.
“리히덴에는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
“아, 볼일이 끝나면 곧장 돌아갈 생각이에요.”
“볼일?”
레이라의 대답에 루이스가 되묻자, 그녀는 슬쩍 아르제오를 바라보았다.
선황과의 일이 해결되면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빨리 가는군. 좀 더 느긋하게 있어도 될 텐데.”
그 대답에 루이스가 아쉬운 듯이 루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타델을 오래 비울 수는 없어서요.”
레이라의 시선은 루이스를 따라서 루카에게 향했다.
앞에 놓인 과일 셔벗을 다 먹은 루카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루카 님, 저와 먼저 방으로 가보시겠어요?”
디저트까지 다 먹은 루카에게 로라가 다가섰다.
그들의 짐은 이미 도착과 동시에 루이스의 지시대로 아르제오의 궁으로 옮겨놓았다.
로라는 루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께서 또 선물을 준비해 놓으신 모양입니다.”
로라의 말에 루카는 활짝 웃었다.
“엄마는요?”
“응, 금방 갈게.”
레이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카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루카.”
“네?”
“가기 전에 잊은 거 없니?”
그녀의 말에 루카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민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린 듯 쪼르르 루이스에게 달려갔다.
루카는 의자에 앉은 루이스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삼촌 폐하!”
그러더니 다시 오도도 달려 로라와 함께 사라졌다.
루이스는 제 심장을 부여잡고 비장한 얼굴로 아르제오에게 말했다.
“루카는 계속 리히덴에 있는 게 어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물론 단칼에 거절당했지만 말이다.
“뭐…. 루카를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네 마음도 이해는 한다.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전혀 모르겠으니. 하지만 이제 많이 쇠약해지셨으니, 네가 먼저 만나 보고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루카가 자리를 떠나자, 루이스는 한결 편안하게 말을 꺼냈다.
아르제오에게는 마지막으로 선황을 본 것이 벌써 4년도 더 전이었다. 레이라와 리히덴을 함께 방문했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그리고 그때도 황제는 포레스티아령을 욕심내며 레이라의 기분을 상하게 했었다.
이후로 줄곧 보내온 편지에서도 크게 달라진 점을 그는 느끼지 못했다.
루카는 이제 고작 4살인데, 아이가 괜한 말을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형님, 제가 부모가 되어 보니 더욱 확실히 알겠습니다.”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제오가 대뜸 말을 꺼냈다.
“무엇을?”
“부모가 아이를 어찌 대해야 하는지요.”
그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루이스는 곧장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 선황에게서 제대로 된 아버지의 애정을 받은 이는 없었으니까.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가족을 보며, 그리고 루카를 대하는 레이라를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아무리 황제라는 자리에 있으니 제한되는 것이 많다고 해도, 선황은 자신들에게 그래서는 안 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감싸 주던 어머니마저 사라지고, 세 형제에게는 황족의 의무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로렌스와 루이스의 사이가 귀족들의 속살거림으로 틀어질 때도 선황은 방관했다.
경쟁을 이루어 승리한 자가, 더욱 강한 자가 리히덴을 다스리게 되면 이득일 뿐이라면서.
황위 다툼의 끝에는 어느 한쪽이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 둘의 사이를 위해 애쓴 것은 아르제오뿐이었다.
어찌 아비가 제 자식들에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루카가 생기고 나니 아르제오는 더더욱 선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제가 혼자 뵙겠습니다.”
고작 4살이라고는 해도, 상대의 표정과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르제오는 루카가 괜한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도 제 할아버지에게서 말이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해라.”
짧은 대화를 끝으로 루이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이곳에 있는 동안 루카와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군. 당장 오늘부터. 루카는 오늘 삼촌과 자야겠다.”
“예? 잠깐, 형님-.”
루이스는 아르제오가 붙잡으려는 것을 눈치채고는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지만, 레이라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저희도 그만 돌아가요, 제오.”
“아, 응. 피곤하지?”
루이스를 따라나서려던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말에 곧장 방향을 틀었다.
두 사람은 만찬장을 벗어나, 4년 만에 아르제오가 머물던 황자궁으로 향했다.
로라는 루카가 황제궁으로 불려갔다는 것을 전하고는 곧장 따라서 그쪽으로 갔다.
아르제오는 궁의 시녀들에게 찾기 전까지는 나타나지 말 것을 지시하고는 레이라와 방으로 들어섰다.
긴 여행으로 지친 두 사람은 방에 딸린 욕실에서 따끈하게 몸을 데우고 나왔다. 아르제오가 나서서 머리를 말려 주니,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네.”
느리게 깜빡이는 그녀의 눈꺼풀을 보며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레이라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러 눈을 부릅뜨는 모습이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자, 다 됐다.”
부드러운 백금발을 손가락으로 얽어 보던 아르제오가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폭신한 침대에 살포시 눕혔다.
안락한 감각에 레이라는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만 같아서 기를 쓰고 정신을 붙잡았다.
“왜 안 자고 버텨?”
옆으로 누워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아르제오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제오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레이라는 굳게 결심한 듯 벌떡 몸까지 일으켜 앉았다. 그런 그녀를 따라 아르제오도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하고 싶은 얘기?”
전혀 무슨 얘기인지 감도 잡지 못하는 듯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레이라는 막상 얘기를 꺼내려고 하니 어쩐지 떨려서 길게 심호흡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아르제오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냐며 웃었다.
“저는….”
레이라는 운을 떼고서도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불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여서, 아르제오는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무슨 말이든. 그대가 하는 말이면.”
그가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자, 레이라는 긴 숨을 내뱉으며 점차 진정했다.
폭 안겨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자, 아르제오가 살며시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본 레이라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힘겹게 얘기를 꺼냈다.
“전 둘째를 갖고 싶어요.”
대뜸 내뱉은 말에 아르제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
“제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지만, 전 둘째를 낳고 싶어요. 루카에게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거든요.”
갑작스러운 얘기에 당황했던 아르제오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레이라는 덥석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읍?”
두 뺨을 붙잡힌 아르제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선 피하지 말아요.”
마주한 그녀의 시선에는 꼭 대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렇기에 아르제오는 이 상황을 은근슬쩍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대가 아픈 건 싫어.”
그 나름대로 힘겹게 꺼낸 말이었다. 아르제오는 아직까지 진통으로 비명을 내지르던 레이라의 모습이 또렷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경의 숲에서 수천 번도 더 보았던 참극도 말이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아르제오는 여전히 숲에 홀로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아는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번엔 물러설 생각이 없는 그녀는 아르제오의 뺨을 붙잡은 채로 말했다.
“그럼, 키스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