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10)화 (110/122)

<110화>

* * *

“제오, 또 그러고 있어요?”

아기 침대 옆에 턱을 괴고 아기를 바라보는 아르제오에게 레이라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예쁘지 않아? 어쩜 이렇게 예쁠까.”

벌써 수십 번도 더 들은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턱을 괴고 아이를 응시하던 아르제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잠든 아기의 손을 톡 건드리자, 아이가 잠결에 그 손가락을 꾹 쥐었다.

아르제오는 입을 틀어막으며 감격한 얼굴로 아기에게 붙잡힌 제 손가락을 바라봤다.

* * *

아기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아르제오는 정말 단 한시도 아기와 레이라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가 상단의 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으면 줄곧 아기 옆에 붙어 있었다.

“우리 루카는 자는 얼굴도 예뻐.”

“그럼요, 누구 아들인데.”

루카와 처음 만난 순간은 감동 그 자체였다. 레이라의 비명과 긴 진통 끝에 태어난 아이.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그걸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처음 옹알이하던 순간, 처음 웃었던 순간, 처음 안아달라며 손을 뻗었던 순간.

그 순간순간들이 아르제오와 레이라에게는 전부 감동이었다.

루카는 레이라를 닮아 백금발에 청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생김새는 아르제오를 더 닮아 있었다. 그것이 또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건강하게 쑥쑥 자라 주기만 하면 더 바랄 것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 *

루카가 4살이 되던 해, 아르제오와 레이라는 루카를 데리고 리히덴 제국으로 향했다.

루이스를 황태자 자리에 앉히고 4년. 루카가 4살이 될 때까지 황제는 그 자리를 지켰다.

기어이 건강이 악화된 뒤에야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르제오가 정말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루이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난 뒤에야, 아르제오는 리히덴에 다녀오자는 말을 꺼냈다.

거기에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들은 곧장 떠날 준비를 했다.

“유진, 넌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야?”

여전히 서류에 파묻혀 사는 유진이 아르제오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전 바쁩니다.”

“그래도 가문에 얼굴은 비춰야 하지 않겠어?”

“또 무슨 말로 붙잡히라고요. 저는 연 끊은 지 오랩니다.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세요.”

무미건조한 유진의 태도에 아르제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이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군.”

“그런 집안에서 자랐으니까요. 이번에 전 동행하지 않을 테니 다녀오세요. 상단 일도 그냥 둘 수 없고요.”

“그래, 알겠다.”

아르제오는 더 권하지 않고 물러났다. 유진은 어릴 적부터 그 집안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생각하던 이였으니.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유진은 지금, 레이라가 새로 추진하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유진이 함께 가지 않으니, 그들의 호위는 자연스럽게 공작가의 기사들이 맡게 되었다.

레이라가 리히덴을 방문했을 적에 함께했던 에반과 그가 뽑은 몇 기사들이.

로라가 짐을 꾸리는 사이, 레이라는 루카와 둘이서 시타델에 다녀왔다.

가기 전에 약초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시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진의 대답을 뒤로하고 나온 아르제오는 막 저택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입술을 비죽였다.

“또 나만 두고 둘이 다녀오는 거야?”

“아빠!”

작은 루카는 오도도 달려 아르제오의 품에 안겼다. 그는 자연스레 상체를 숙여 루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빠만 두고 가면 어떡해.”

“하지만 아빠는 바쁜걸요. 그래서 엄마랑 금방 다녀왔어요!”

“그래요. 제오가 기다릴까 봐 얼른 왔는걸요.”

아르제오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레이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서 와.”

“아빠, 나도!”

귀엽게 보채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아르제오는 루카의 이마에도 가볍게 입을 맞췄다.

“준비는 다 됐죠?”

“응. 내일 출발할 거야.”

리히덴으로 떠날 준비는 마쳤다.

루카는 공작령을 벗어나는 것이 처음이라, 그저 들뜨기만 했다.

“아빠, 거기 가면 삼촌 만날 수 있어요?”

“그래. 루카를 보고 싶어서 엄청나게 기다리고 있어.”

“선물 삼촌!”

루카는 해맑게 웃으며 기뻐했다.

이제껏 선물과 편지만 보내오던 삼촌을 직접 볼 생각에 말이다.

레이라는 재잘거리며 제 곁에 딱 붙어 있는 루카를 볼 때마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 고통스러운 진통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슬슬 레이라는 루카에게도 형제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에게 헤레이스가 있는 것처럼, 루카도 서로 믿고 의지할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아르제오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긴 시간 이어졌던, 레이라가 비명을 질러대던 진통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루카를 안고 먼저 걸음을 떼는 아르제오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지….’

그녀는 이미 평소처럼 둘째를 원한다고 당당히 이야기해 봤었다.

하지만 아르제오는 그녀가 다시 그 괴로운 진통을 겪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루카가 저리도 예쁘니 둘째도 당연히 예쁘겠지.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레이라가 겪는 진통만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비명은 오래전, 국경의 숲에 홀로 들어서서 마주한 광경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 대답에 레이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르제오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싫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둘째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 건, 생각보다 상처였다. 그러니 레이라는 다시 얘기를 꺼내는 것이 어쩐지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법. 레이라는 이번 리히덴 여행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겠노라 다짐했다.

* * *

다음 날, 그들은 호위와 함께 공작저를 벗어났다.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에 잔뜩 들떠있던 루카는 마차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레이라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안 힘들어? 내가 안을까?”

“아뇨. 괜찮아요.”

고개를 저은 레이라는 잠든 루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루카는 어쩜 이렇게 제오를 쏙 빼닮았을까요?”

“머리칼과 눈 색은 그대를 닮았는걸? 그래서 더 예쁘지만.”

루카를 보는 아르제오의 시선에는 애정이 넘쳤다.

“돌아가면, 선황 폐하를 뵐 거죠?”

“…그래야겠지.”

그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야죠.”

“단호하네.”

“벌써 4년이나 지난걸요. 이제는 생각이 바뀌셨을 거예요.”

“글쎄.”

아르제오는 꽤 회의적인 태도였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듯이.

그 4년간, 선황은 줄곧 아르제오에게 서신을 보냈었다. 어르고 달랬다가, 분노했다가, 사과했다가, 다시 분개하기를 반복했다.

그마저도 건강이 악화하면서부터는 보내지 않았다.

건강 악화 소식과 더불어 서신까지 끊기니 레이라는 조금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설득 끝에 정해진 것이 이번 여행이었다.

“그래도 얼굴은 봬야죠. 폐하께서도 저리 선물을 보내시니 루카를 보여드려야 할 것 같고요.”

“형님은 뵐 거야.”

어린 아르제오는 늘 형제들만 의지하고 살았었다. 그러니 지금도 그에게는 두 형제 외에는 리히덴에 볼일도 없었다.

“루카가 좋아하겠네요.”

레이라는 싱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르제오를 똑 닮은 얼굴에 청록색 눈동자.

루이스가 보면 제 아우와 똑같이 생겼다며 좋아할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로렌스의 반응은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들은 곧장 국경을 넘어 리히덴으로 들어섰다.

국경을 넘자 그곳에는 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 아저씨다!”

마차에서 쿨쿨 자던 루카는 필과 재회하자 벌떡 일어났다.

리히덴과 발루아의 평화협정 이후에, 두 사람의 결혼식에 처음 발루아를 방문했던 필은 종종 공작령을 찾아왔었다.

매번 신기한 장난감을 들고 루카를 만나러 왔기 때문에 아이가 이리 반기는 것도 당연했다.

“폐하께서 보내시어, 제가 마중 나왔습니다.”

정중히 예를 갖추는 필을 보며 루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엄마, 왜 폐하께서 필 아저씨를 보내요?”

필의 눈치를 보며 입가를 가리고 속삭여 묻는 루카의 모습에 레이라가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그녀도 루카의 귓가에 작게 속삭여 주었다.

“그건 가 보면 알 거란다.”

“지금 말해 주면 안 돼요?”

“직접 보면 더 신나지 않겠니?”

“그래요?”

“응, 그럴 거야.”

그녀의 대답에 알겠다며, 루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입니다, 루카 님.”

필이 싱긋 웃으며 루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낮췄다. 루카는 황제가 보냈다고 하는 필에게 가도 되는지 레이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루카는 활짝 웃으며 필에게 달려갔다.

“필 아저씨!”

품에 폭 안기는 아이를 보며 필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얼굴은 아르제오를 닮았지만, 분위기는 레이라를 닮아서 사랑스러웠다.

필은 루카에게 마차를 타고 다시 황궁으로 향할 동안 가지고 놀라며 장난감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루이스가 기다리고 있으니 서두르자며 재촉했다.

아마도 루카를 빨리 만나고 싶은 루이스가 어지간히 필을 보챈 모양이었다.

그들은 국경에서 곧장,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며 제도의 황궁으로 향했다.

최소한의 휴식이라고 해도, 루카의 상태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루카가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모두가 마차를 멈췄다.

그렇게 도착한 황궁에는 루이스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화려한 마차가 황궁 안으로 들어서니, 루이스가 직접 그들을 맞으러 뛰쳐나갔다.

마차 안에서 황궁 안으로 들어선 것을 확인한 루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레이라와 아르제오를 바라보았다.

“왜 황궁으로 와요?”

“루카, 선물 삼촌은 황궁에 계셔.”

“그래요? 황궁에서 일하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삼촌 일하고 있는데 찾아가도 돼요?”

천진한 얼굴로 루카가 묻자, 레이라와 아르제오가 동시에 루카를 끌어안았다.

“우왁!”

“우리 루카는 어쩜 이렇게 예쁠까? 삼촌도 생각해 주고.”

“루카가 이렇게 마음이 예쁘니 당연한 일이에요.”

두 사람에게 붙잡힌 루카가 발버둥 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섰다.

“자, 내리자. 기다리실 테니.”

“네!”

아르제오가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루카는 잔뜩 들뜬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마차에서 내리자 루이스가 친히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아르제오와 레이라는 설마 황제가 직접 나와 있을 줄은 몰라서, 당황스러움에 헛웃음을 흘렸다.

루카를 발견한 루이스는 입을 틀어막고는 눈을 빛냈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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