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09)화 (109/122)

<109화>

“앞으로는 시타델 섬에 방문객을 받지 않으려고 해요.”

아르제오가 어느 정도 회복한 뒤, 레이라는 유진과 젬마, 토니까지 모아 놓고 말했다.

그녀의 의견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항의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상단주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르제오를 다치게 했다. 그것도 이틀이나 사경을 헤매게 했으니 레이라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꼼꼼히 확인한다고 해도, 완전히 위험을 차단하는 방법은 아예 방문객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을 노렸어도 이제는 강경하게 나갈 참이었는데, 아르제오를 건드렸다. 그리고 그건 레이라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사람을 위협하는 건 말이다. 게다가 이제 그녀를 위협하는 것도, 배 속의 아이까지 위협하는 것이니 절대 두고 보지 않을 참이었다.

이번 일을 벌인 범인들은 이미 현장에서 잡혔다. 그리고 그들의 끝이 어땠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범인들이 잡혔다고 해도, 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유진은 레이라의 뜻대로 하면 된다고 했고, 젬마와 토니도 거기에 동의했다.

이쪽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방문객을 받은 것인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그 의견에 반대하는 이는 없으니 금세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네 사람은 상단 일로 한참이나 회의를 진행했다.

약초를 전달할 국가들과 거래 내용, 앞으로 다룰 약초들에 대해서.

토니의 보고로는 의사 중 일부는 상단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약초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그 약초로 약을 만들어 제공하는 건 어떠냐고.

레이라는 나쁘지 않은 생각 같다며 토니에게 지원하는 의사들 파악을 맡겼다.

회의를 마친 레이라는 곧장 방에서 쉬고 있는 아르제오에게 향했다.

느긋하게 앉아 책을 읽던 그는 문이 열리자 고개를 돌렸다.

“회의 끝났어?”

“네.”

레이라를 발견한 즉시 책을 덮은 아르제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슬쩍 입술을 비죽이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내가 들으면 곤란한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제오는 아직 쉬어야 해요.”

아르제오는 회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을 두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 괜찮아. 내가 요 며칠 레벤 달인 차를 몇 잔을 마셨는지 알아?”

독사에 물려 쓰러진 이후부터 아르제오는 물보다 레벤 차를 더 많이 마셨다.

눈을 뜬 뒤로는 미켈이 따로 제조한 해독제까지 먹었으니 이제 정말 괜찮았다. 하지만 레이라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입 맞춰 줘요.”

괜찮다는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가 뚱한 얼굴로 요구했다.

물론 평소였다면 굳이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아르제오가 먼저 입을 맞췄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그대는 가끔 치사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봐요. 미켈이 보름은 안정을 취하고 조심하라고 했죠?”

“보름은 너무 길어….”

아르제오는 힘이 다 빠진다는 얼굴로 레이라의 어깨에 풀썩 기댔다.

해독제까지 먹었지만, 우드 스네이크의 독이 완전히 빠지기까지는 보름이 걸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레이라와 가벼운 입맞춤도 안 된다고 단단히 일렀다.

그녀는 물론, 아이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아르제오는 절대 레이라에게 입을 맞출 수 없었다.

어깨에 기대 투덜거리던 그는 곧 레이라의 배를 살포시 매만졌다.

“아빠가 이렇게 힘들게 노력하고 있단다. 아가, 널 위해서 말이야.”

아르제오의 중얼거림에 그녀가 작게 웃었다.

“어서 쉬어요.”

“그대 얼굴을 보고 있는 게 휴식이야. 그러니 그대도 좀 쉬는 게 어때? 피곤하지?”

“그렇지 않아도 쉬려고 온 거예요. 제오랑 같이.”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아르제오를 침대로 이끌었다.

레이라는 최근, 점점 배가 불러 오고 있었다. 그리고 임신 전과는 다르게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다.

똑똑.

“아가씨, 유진입니다.”

“아, 네.”

침대에 막 누운 참이었는데, 유진이 찾아와 레이라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회의했는데 왜 또 찾아오는 거야.”

기껏 그녀와 함께 누웠는데 방해꾼이 나타나 아르제오는 투덜거리며 따라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선 유진은 아르제오의 원망 가득한 눈초리에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굳이 두 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유진.”

“신경 쓰지 말라니? 신경 써야지! 그대도 나도, 안정을 취해야 하는 몸들이니까.”

반박하는 아르제오의 입을 레이라가 틀어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에요?”

“리히덴에서 서신이 와서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리히덴에서요?”

“예. 아가씨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죠.”

“내 휴식은?”

“전하께서는 알아서 쉬시니 괜찮습니다.”

“유진이 냉정해졌어.”

투덜거리는 아르제오를 보며 픽 웃은 레이라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누가 연상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유진이었다.

“리히덴에서는 누가? 루이스 형님인가?”

“루이스 전하께서 보내신 것도 있고, 폐하께서 보내신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온 거고요.”

아르제오는 자연스럽게 루이스에게서 온 서신으로 먼저 손을 뻗었다.

독사에 물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괜찮냐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끝자락에, 폐하께서 한 번은 리히덴으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고 덧붙였다.

황태자에 관한 일은 뜻을 굽히셨다고 말이다.

아르제오는 루이스의 서신을 확인한 뒤에 황제의 서신을 받았다.

황제의 서신을 먼저 확인하지 않는다고, 황제에 대한 모욕이라고 떠들었을 터였다. 만일 그곳이 리히덴이었다면 말이다.

황제의 서신은 루이스의 예고대로, 다시 한번 리히덴으로 돌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불안하다면, 루이스에게 선위한 뒤라도 좋다고. 그러니 한 번만 돌아와 달라고 말이다.

간절하게까지 보이는 그 서신을 읽는 아르제오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고작 이런 편지 한 장으로 마음을 돌리기엔, 황제는 너무 오래 같은 태도를 보여 왔다.

욕심 많은 사람이며, 리히덴 제국이 병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포레스티아령을 탐내는 사람.

어찌 감히 발루아에서 결혼식을 올렸냐며 분개하던 사람. 당장 돌아오라고 호통치던 사람.

그럼에도 아르제오가 끝까지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이제야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곁에서 서신을 함께 확인한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르제오는 서신을 다시 유진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볼록하게 불러오는 레이라의 배를 아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어쨌든 지금은 안 돼.”

“왜요?”

“그대도 안정을 취해야 하고. 배는 점점 불러 올 텐데, 먼 길을 다녀오는 건 몸에 무리가 갈 거야.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안 돼.”

아마도 이렇게 미루면, 아이가 태어나면 레이라의 몸이 회복할 때까지, 아이가 조금 더 자랄 때까지, 이렇게 계속 미뤄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레이라는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곁에 있던 유진도 아르제오가 아마도 이런 반응이지 않을까 예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하의 뜻이 그러하다고 전하겠습니다.”

“수고해.”

유진은 푹 쉬시라고 말한 뒤 방에서 나갔다. 그 뒷모습에 대고 아르제오는 당분간 들어오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다시 침대에 누운 아르제오는 멍하니 레이라의 탐스러운 입술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름은 너무해.”

졸린 눈을 깜박이던 레이라는 그 말에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아르제오의 손을 살포시 붙잡고는 눈을 감았다.

“저도 그래요.”

* * *

시간은 금세 흘렀고, 레이라의 배는 점점 불러왔다.

콕 누르면 터지는 것이 아니냐고 아르제오는 몇 번이나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때마다 유진은 사서 걱정한다며 꿍얼거렸다. 투덜거리는 투였지만, 표정에서는 그런 아르제오를 재미있어하는 것이 드러났다.

레이라가 진통을 시작했을 적에는 온 포레스티아가 사색이 되었다.

출산 시기가 다가올 즈음부터 줄곧 공작가에 머물던 산파 외에는 모두가 안절부절못했다.

온 저택에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지니 그럴 만도 했다.

“괜찮은 것인가? 괜찮은 거야?”

아르제오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전하, 벌써 서른일곱 번째 묻고 계십니다. 괜찮으실 겁니다.”

유진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예민하게 대답했다.

“저리 비명을 지르는데 어떡해…!”

유진의 대답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아르제오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럴 만도 했다. 레이라가 저리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니, 아르제오 성격에 어찌 불안하지 않을까.

유진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아르제오의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원래 저리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는 법이에요.”

“그래도…! 저리 비명을 지르는데…!”

“아버님은 어머님께서 저희를 낳는 두 번이나 지켜보셨지 않습니까.”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지 또 저리 비명을 들으니 불안하구나.”

아르제오만큼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 더 있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는 건 에드가뿐이었지만, 헤레이스와 데이지도 괜스레 방앞을 서성이며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첫째 아이는 더 힘든 법인데….”

비명을 듣다 못한 데이지가 작게 중얼거리자, 아르제오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더, 더 힘들면 어떡합니까…? 저는 뭘 해야….”

“그냥 기다리시면 됩니다, 전하. 그렇지 않아도 너무 안절부절못하셔서 산파에게 내쫓기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손이라도 잡아 주겠다며 곁에 있던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진통이 심해지자 자꾸 발을 동동 구른 탓에 산파에게 내쫓겼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같이 방 밖에서 저리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것이다.

레이라의 진통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르제오의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

긴 기다림 끝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에서야, 모두가 안도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산파가 문을 열고 엉엉 우는 아기를 보였다.

이렇게나 작은 생명체가 존재한다니.

아기를 마주한 아르제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나 작고 쭈글쭈글했지만, 세상에 이렇게나 귀여운 아기는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레이라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그 감격을, 그는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