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08)화 (108/122)

<108화>

“이자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폐하.”

차갑기만 한 로이드의 시선에도 엘라는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2황자 전하를 끔찍이 아끼던 루텐 백작이십니다.”

노엘이 로이드의 손에 죽고, 종적을 감췄던 이였다.

“노엘 전하를 직접 제거하신 폐하도 원망하고 있고, 폐하께서 그 자리에 오르실 수 있도록 도운 공녀도 그에게는 원망의 대상이지요.”

로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러니 레이라를 해치는 것에 뜻이 맞아 함께 움직였다는 건가.”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엘라는 정말로 황홀한 듯이 웃었다. 그러니 점점 더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로이드는 루텐 백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텐은 줄곧 입을 꾹 다문 채로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있었다.

“변명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군. 그냥 죽여 달라는 건가?”

“…죽이십시오.”

루텐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냥 자신을 죽이라는.

“노엘 전하께 하신 것처럼, 저도 그냥 죽이십시오. 어차피 그게 폐하의 방식인 것이 아닙니까?”

루텐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삶을 포기하니 속에 담아 둔 말들이 술술 나왔다.

어차피 죽게 될 테니,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고도 꼭 노엘 전하를 죽이셔야 했습니까?”

루텐의 말에 로이드가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잘도 말하는군. 루텐, 네놈은 종적을 감춘 덕에 살아남은 놈일 텐데. 반역을 꾸민 자들 사이에서 말이지.”

“노엘 전하께서 발루아를 다스리시는 것이 보고 싶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으시니까요!”

루텐을 바라보는 로이드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엘라는 그 옆에서 팔을 벌리며 웃었다.

“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폐하. 제가 다 안아 드릴 테니까요.”

로이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곁에 있던 세실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러자 로이드는 손을 내리고는 차갑게 죄인 두 사람을 바라봤다.

로이드는 좋은 황제가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레이라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바라는 것일 테니.

그럼에도 저들은 예외였다. 살려 둘 가치가 없었다.

“반역을 꾀할 때는 열심히 쫓아다니다, 다들 맞서 싸우다 죽는 걸 보자마자 도망친 이가 입만 살았군.”

루텐은 저리 말했지만, 이제까지 살아남은 건 가장 먼저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노엘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것도 아니고, 맞서 싸우지도 않았다. 그래 놓고 저리 위선적인 말이라니.

“지금 이 대륙에서 레이라를 위협하는 건,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것도 발루아 내에서 그녀를 해하려 했다니. 다른 왕국들이 들고 일어나도 할 말이 없었다.

레이라의 영향력은 황궁 기사단과 병사들에게도 퍼져 있었다. 니타 왕국에서 무사히 돌아온 일로 말이다.

“그녀를 위협하는 건 싹을 잘라야지.”

그렇게 말하며 로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둘을 사형에 처해라. 모두에게 본보기로 보여. 레이라를 건들면 어찌 되는지.”

“예, 폐하.”

세실의 대답과 함께 병사들이 두 사람을 거칠게 이끌었다.

“잠깐, 폐하! 폐하의 손으로 절 죽여 주세요! 폐하! 그렇게라도 폐하의 기억 속에 남을 겁니다!”

처음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엘라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로이드는 조금의 시선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알현실을 벗어났다.

“그런 하찮은 일에 쓸 시간은 없다.”

등 뒤에서 엘라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로이드는 그 무엇보다도 레이라를 우선시했다.

“아, 저….”

알현실을 나서니 근처에서 서성이던 작은 아이가 조심스럽게 로이드를 불렀다.

고개를 돌린 로이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 아이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아….”

겁먹은 아이의 표정에 로이드는 한차례 제 얼굴을 문지르고는 조금은 어색하게, 아이를 불렀다.

“알폰스, 무슨 일이지?”

“폐, 폐하. 오, 오늘 수업을 일찍 마쳤는데, 어머니를 만나러 가도 될까요?”

그렇게 물으며 알폰스는 알현실 문을 힐끔거렸다.

아마도 안에서 있었던 일을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허한다.”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로이드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아, 감사합니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알폰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로이드는 그곳을 벗어났다.

모든 것이 숨을 막히게 했다. 하지만 견뎌야 했다. 레이라가 제게 바라는 유일한 것, 그것을 위해서라도.

다음날 오후, 엘라와 루텐은 공개처형 되었다.

국경의 수호자,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니타 왕국에서 발루아의 병사들을 구하고 환자들에게 이로운 약초를 제공하는 레이라.

감히 그녀를 죽이려 한 건, 구할 수도 있는 환자들을 다시 위험으로 밀어 넣는 것과 같다고 제국민들은 외쳤다.

그들은 처형이 당연하다며, 처형장에 찾아와 두 사람에게 힘껏 돌을 던졌다.

레이라를 시기하고 그녀의 자리를 탐내던 엘라는, 그녀와 정반대의 결말을 맞았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신뢰받는 레이라와 다르게, 엘라는 비난받고 미움받는 결말을 맞았다. 그것이 국민에게서든, 로이드에게서든.

‘미움으로나마 기억에 남으면 다행이겠지.’

날아오는 돌을 맞는 엘라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전날 알현실에서 떠나는 로이드의 뒷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그는 정말 조금도, 자신을 떠올려주지 않을 거라는 걸.

* * *

아르제오는 꼬박 이틀을 사경을 헤매다 겨우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뜨기 전, 엘라와 루텐 백작은 공개처형 되었다. 헤레이스는 그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레이라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르제오가 눈을 뜨기 전까지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했으니 구태여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아르제오는 눈을 뜨자마자 손을 붙잡고 있던 레이라에게 물었다.

“레이라,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그 물음에 레이라는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 그걸 제오가 묻는 거예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레이라가 말하자, 당황한 아르제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아야 했지만.

“괜찮아요?”

“아직 그리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레이라와 함께 줄곧 곁에 있던 미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신이 드셔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오래 잤나?”

“이틀은 못 깨어나셨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래서 아가씨는 이틀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뭐? 그건 안 되는데. 레이라, 어서 눈 좀 붙여.”

아르제오가 걱정스러운 듯 레이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여전히 잔뜩 눈물을 머금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제 걱정할 때에요?”

“하지만 아가씨, 지금은 아르제오 님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벌써 이틀이나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습니다. 아기도 걱정되니 부디 쉬시지요. 치료는 제가 하겠습니다.”

미켈의 말에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레이라, 눈 빨개.”

사실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피로감에 한계가 와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그녀를 보며 아르제오가 이불을 슬쩍 걷었다.

그러고는 넓은 침대의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나랑 떨어지기 싫은 거면, 여기 누워.”

곁에 있던 미켈은 아르제오의 상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세요. 그리해서 아가씨께서 쉬실 수만 있다면, 제발 그리하세요.”

아르제오의 상처는 벌써 꽤 아물어 있었다. 레이라는 미켈의 대답에 조심스럽게 그 옆에 누웠다.

“그럼 잠시만, 쉴게요.”

그렇게 말하며 살포시 눈을 감은 그녀는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실은 줄곧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피로했지만, 아르제오가 깨어나지 못한 상황에 잠을 청할 순 없었다.

분명, 끔찍한 악몽을 꾸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곧이어 그녀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자, 미켈이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 괜찮아.”

아르제오는 살포시 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용케 살았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레이라 덕분에 살아남은 걸 테지만.

“밖은 어떤가.”

아르제오가 누워 있던 곳은 시타델 저택의 침실이었다. 즉, 아직 섬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공작가 기사분들이 이 저택을 둘러싸고 호위 중이십니다.”

“독사는?”

“대부분 정리한 듯싶습니다만, 완벽히 잡아냈다고 하기엔 불안하니 호위를 서고 있습니다. 보좌관께서 이 일을 해결하겠다고 이틀 전에 마탑으로 향하셨고요.”

“마탑이라.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겠군.”

미켈은 고작 이틀인데 벌써 돌아온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하며 넘겼다.

“일단 이 약부터 드세요. 그동안 레벤을 새로 달여 오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열을 내리기 위한 물수건, 줄곧 그의 입으로 흘려보내려 애쓴 레벤을 달인 약. 그 옆에 늘어진 다른 약초들과 약, 포션.

지난 이틀간 미켈과 레이라가 했을 고생이 눈에 훤했다.

“고맙다.”

“그러시면 앞으로는 다치지 마시죠. 아가씨까지 저리 무리하시니 제 수명이 깎이는 기분입니다.”

미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고작 이틀 만에 퀭해진 눈으로 말했다.

그에 픽 웃은 아르제오가 의사가 건네는 약을 삼켰다.

미켈이 주는 레벤 약물까지 마시고 나서, 아르제오는 다시 잠이 들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곤히 잠든 두 사람을 보며 미켈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이 일로 디몬은 플로스 상단과의 거래에서 상당히 불리해졌다.

거래 진행이 불가능해질 뻔한 것을, 린타 왕국의 환자들을 가엾이 여긴 레이라가 거래를 체결시켰다.

다만 그건 왕국과의 거래이지, 디몬과의 거래가 아니었다.

디몬은 오랜 시간 발루아 제국에 머물렀지만, 큰 수확 없이 제 모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르제오가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니, 그들은 곧장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즈음 유진도 마탑에서 돌아왔는데, 신기한 아티펙트를 들고 돌아왔다.

‘독’을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섬에 존재할 수 없도록 감지, 처치하도록 만든 아티펙트였다.

기사들이 독사를 수색하는 건 위험하니 더욱 확실히 위협이 되는 것을 섬에서 치울 수 있도록.

물론 그 대가로, 유진은 플로스 상단 측 상단주 보좌관으로서 마탑과 거래를 진행해야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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