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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107)화 (107/122)

<107화>

“잘하셨습니다, 아가씨. 이 이상의 처방은 해 드릴 수 없어요.”

“그럼, 그럼 어떻게 해요? 제오가 정신을 차리지 않아요.”

“일단은 조금 더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침대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치료는 더 해 보겠지만, 회복할 수 있을지는 아르제오 님의 체력에 달렸습니다.”

미켈의 말에 레이라는 충격받은 듯 휘청였다.

“아가씨, 괜찮으실 거예요.”

재빨리 그녀를 부축한 로라가 괜찮을 거라며 다독였다.

아르제오는 배를 타고 공작저로 옮길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시타델 섬의 저택에 머물러야 했다.

아르제오를 침대에 눕힌 미켈은 레이라가 가져온 약초와 제가 가진 약들을 제조해 그에게 먹였다.

그날 밤은 아르제오가 고열에 시달려, 레이라와 미켈은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시로 레벤을 달인 물을 입으로 흘려보냈지만,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레이라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르제오에게 레벤 약물을 먹이려고 애썼다.

그를 레이라와 미켈에게 맡긴 유진은 마탑에 다녀오겠다며 섬을 나섰다.

“제오, 제발….”

제발 무사히 일어나만 줘요.

레이라는 밤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아르제오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아가씨,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있을 테니 쉬시지요.”

“그래요, 아가씨. 아기에게 좋지 않습니다.”

미켈과 로라가 말렸지만, 레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태의 아르제오를 두고 어찌 잠이 오겠는가.

어차피 잠을 설칠 자신을 알기에, 마음이라도 편하도록 그를 보고 있을 생각이었다.

“정 그러시면 편안한 소파라도 옮기게 하겠습니다.”

미켈과 로라는 마음 같아서는 침대를 옮기고 싶었지만, 레이라는 눕지 않을 터였다.

아르제오가 자신을 지키다 독사에 물려 쓰러졌으니, 편안하게 있고 싶지 않을 터였다.

섬에 와 있던 공작가 기사들이 폭신한 소파를 침대 옆으로 옮겨 주어, 레이라는 거기에 앉았다.

아르제오의 상처 부위는 밤새 많이 가라앉았다.

붓지도 않았고, 덧나지도 않았다.

좋은 약초였던 덕도 있지만, 문 것이 다른 독사가 아니라 우드 스네이크였기 때문이라고 미켈은 생각했다.

그나마 섬에 나타난 독사가 다른 종이 아니라 그거라서 다행이라고.

다른 독사였으면 즉사했을 터였다. 맹독을 품은 독사는 그 정도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드 스네이크는 나무 사이에 있으면 몸을 숨기기가 수월했고, 그들이 가진 독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물리면 손발이 저릿해지며 고열에 시달리지만, 다른 독사들처럼 즉사하는 독은 아니었다.

독 자체가 맹독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치명적이었다.

몸을 마비시키는 것으로 시작되고, 지독한 고열이 끝내는 생명을 앗아가는 독이었다.

하지만 시타델에는 효능이 뛰어난 약초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레벤을 피울 수 있는 레이라가 있었다.

훌륭한 응급처치까지 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미켈은 제 생각을 고스란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도, 그가 지금 괴로워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레이라가 괴로워하는 것도.

물론 다른 독사보다도 생존율이 높다뿐이지, 체력이 버티지 못하면 이 고열과 고통에 질 터였다.

미켈 스스로도 괜찮을 거라 최면을 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자가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미켈은 두 사람 모두가 걱정되어 미간을 찌푸렸다.

섬은 저택 안팎으로 공작가 기사들이 둘러쌌다.

언제 또 독사가 나타날지 모르고, 레이라야말로, 절대로 독사에 물리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독사에 물리게 되면, 그녀는 목숨을 구할지 몰라도 배 속의 아이는 잃게 될 테니까.

그러니 아르제오도 제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그녀를 지켰을 터였다.

꼭 그게 아니어도 그는 레이라를 목숨 걸고 지켰겠지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미켈이 미간을 찌푸리고 얕은 한숨을 내쉬자, 소파에 앉은 채로 잠든 듯 보였던 레이라가 물었다.

“아가씨, 안 주무셨습니까?”

“잠이 안 오네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아기도 생각하셔야죠.”

미켈의 말에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제 배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 버텨 줘. 아빠가 눈을 뜰 때까지만.’

* * *

유진은 시타델 섬을 나서며 죄인 둘을 이끌고 공작저로 향했다.

디몬은 이 일에 대한 완전한 결백을 증명하지는 못해서 공작령 내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감시를 위한 공작가 기사들 몇과 함께.

“유진!”

소식을 듣고 막 공작저를 나서던 헤레이스가 유진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리고 곧, 유진의 뒤로 기사들이 끌고 오는 남자와 여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들이 그런 짓을 벌인 건가?”

“예, 공자님.”

주황색 머리칼의 여자를 확인한 헤레이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얼굴을 잊을 리도 없었다. 레이라를 황후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보란 듯이 그 자리에 앉았던 후작 영애.

“당신…!”

“공자님, 저는 섬의 독사를 처리하기 위해 잠시 마탑에 다녀올까 합니다. 이 죄인들을, 공자님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무언가를 눌러 참는 듯, 주먹을 움켜쥔 헤레이스가 한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죄인을 헤레이스에게 맡긴 유진은 그 길로 공작저를 벗어났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기사들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묻자, 헤레이스는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이 여자는 죄인이다. 거기에 유배지까지 벗어났지. 내 멋대로 처리할 수는 없겠군.”

헤레이스는 마른세수하며 제 감정을 추슬렀다.

“황궁에 연통을 넣어라. 이 죄인들을 끌고 폐하를 뵈러 갈 것이다.”

“예, 공자님.”

그 말에 엘라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디몬에게 맞아 터진 입술이 따끔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시 만나겠네요, 폐하.’

소리 없이 웃는 엘라를 발견한 기사가 소름이 끼치는 듯 고개를 돌렸다.

‘기왕이면 그 여자를 죽이고 만나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리하여 스스로 버리고, 갈망하다 포기한 여자가 죽은 소식을 듣고 일그러진 로이드의 얼굴을 감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이 떠드는 모양새를 보니, 뱀에 물린 건 레이라가 아니라 남편 쪽인 모양이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레이라는 괴로워할 테니.

헤레이스는 곧장 죄인 둘을 이끌고 황궁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로이드는 그들을 알현실에서 맞이했다.

죄인 호송임을 이미 밝혀서인지, 알현실에는 병사들이 경계를 갖추고 있었다.

헤레이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수고가 많네, 공자.”

알현 요청과 함께, 로이드는 이미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죄인이 유배지를 탈출하다니, 감시를 맡은 병사들도 치죄를 면하기 힘들겠군.”

엘라를 내려다보는 로이드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공자는 어찌하길 바라는가.”

로이드는 엘라에게서 서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헤레이스에게 물었다.

엘라는 그 순간, 로이드의 시선이 저만을 향하는 것에 짜릿함을 느꼈다.

“뵙고 싶었습니다, 폐하.”

헤레이스가 무언가 대답하기도 전에 엘라가 입을 열었다.

“죄인에게 발언권을 준 적은 없다.”

미간을 찌푸린 로이드가 보기도 싫다는 듯 헤레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던 그는 엘라 쪽으로는 일절 시선도 주지 않으며 말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 죄인은, 유배로는 모자랐던 모양이니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거나 아니면….”

헤레이스는 서늘한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채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 뒷말은 로이드가 대신 이었다.

“죽이거나.”

살벌한 그 말에도 엘라는 그저 웃기만 했다. 로이드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달갑다는 듯이.

“뵙고 싶었습니다, 폐하…. 너무, 너무도.”

그 목소리도 너무나 듣고 싶었다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헤레이스마저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럽군.”

로이드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세실이 병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들이 엘라에게 재갈을 물렸다.

“공자의 뜻은 잘 알겠다. 이쪽에서 처리하지. 죄인이 유배지를 벗어난 것 또한, 병사들의 관리 소홀이다.”

“송구합니다, 폐하.”

헤레이스는 재갈을 물고도 히죽거리며 웃는 엘라를 힐끔거리고는 돌아섰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직 섬이 완전히 안전하지 않으니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는, 다치지 않았겠지?”

그 짧은 찰나, 로이드는 이 질문을 입에 담을지 말지 수백 번 고민했다.

하지만 헤레이스가 떠나고 나면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질문이 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헤레이스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어디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군….”

시타델 섬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직후에도 물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연락 내용에 없었으니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헤레이스의 대답에 저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라는 이미 다른 이의 부인이 된 것도 알았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것도.

‘꽃잎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다시는 받지 못할 거라 여겼던 그녀의 꽃잎을 다시 받고 있으니 로이드는 그걸로 만족해야 했다.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헤레이스는 로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알현실을 벗어났다.

황제가 레이라에 대한 것을 묻는 것에 대해 헤레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묻는 것에 대답할 뿐.

이제는 그저, 언젠가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얘기했던 대로 로이드가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저 발루아의 황제로서만.

헤레이스가 알현실을 벗어나고 나서야 로이드는 엘라의 재갈을 다시 풀게 했다.

“옆의 남자는 누구지.”

“제가 다른 사내를 만나는 것이 거슬리십니까?”

엘라의 말에 로이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유배지로 떠날 때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태도를 보였던 엘라였다.

‘정신을 놓은 건가.’

비참해지는 제 신세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는 이들은 몇 번인가 본 적 있었다.

로이드 역시,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만일 레이라가 폭풍우에 휩쓸려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면 그랬을 터이니.

하지만 그게 면죄부는 되지 못했다.

로이드는 이유가 무엇이든, 레이라를 위협하는 것은 싹을 자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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