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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106)화 (106/122)

<106화>

“저, 저를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 전 독사 같은 건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짐을 전부 다시 확인해.”

“예.”

아르제오의 말에 유진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배는 이미 공작가로 향했으니 어차피 여기 있는 이들 중, 섬을 빠져나갈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아직 길이 열리는 시간이 아니었고, 열린다고 해도 도망치면 범인으로 간주할 테니.

배에서 짐을 다시 내리고 유심히 살피던 유진은 빈 짐 바구니를 발견했다.

비어 있다는 건, 무언가를 담아 가지고 와서 섬에 두었다는 것.

섬에서 준 약초는 따로 분류해 두었고, 디몬이 준비한 것 중에 레이라가 받은 것은 없었다.

“이건 뭡니까?”

유진의 싸늘한 물음에 바구니 앞에 앉아 있던,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픽 웃었다.

그 작은 실소는 이내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번졌다.

유진은 즉시 눈앞의 여자와 그 여자를 지키려는 남자를 제압했다.

“이래 놓고도 거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저,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날카로운 아르제오의 시선을 받아내던 디몬이 이를 악물고 남자와 여자에게 달려들어 뺨을 올려붙였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여자가 옆으로 나뒹굴었다.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작정한 게야! 사정사정하기에 짐꾼으로 써 줬더니 이런 일을 벌여?!”

남자는 이를 악물고 벌게진 뺨으로 디몬을 노려보았다.

나가떨어진 여자는 그 반동으로 후드가 벗겨졌는데, 아래 감춰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디몬은 그녀가 누군지 모를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국이었으며, 발루아 쪽 일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유진과 아르제오는 알아보았다.

후드 아래로 감춰졌던 주황색 머리칼이 드러나자, 아르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라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린 유진이 말했다.

“유배지를 벗어나는 것 또한 중죄가 아닙니까?”

유진의 말에 엘라가 저택을 가리키며 답했다.

“저 여자는 이제 죽을 거야. 나만 모든 걸 잃은 채로 끝날 순 없지.”

“제정신이 아니군.”

실실 웃는 엘라를 보며 아르제오와 유진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 위에 있는 저택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내겐 시간이 아주 많았는데도?”

하지만 이어진 엘라의 말에 아르제오가 얼굴을 굳혔다.

“유진, 공작가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저들을 감시해라.”

“예.”

아르제오는 유진의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고 달려 나갔다.

등 뒤에서 엘라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려왔다.

제 앞을 가로막는 뱀은 전부 머리를 날려 버리며 달렸다. 그리고 저택에 가까워질 무렵,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제오는 더욱 미칠 듯이 달려 저택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레이라!”

안에서는 로라가 기다란 막대기로 뱀을 위협하고 있었다.

레이라는 소파 위에 올라가 다리를 끌어안고 있었고, 로라가 그런 그녀의 앞을 버티고 있었다.

막대기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니 뱀은 다가오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그 근처에는 깨진 꽃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고 던진 듯 보였다.

“제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부르는 레이라를 확인한 즉시 아르제오는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 머리가 날아간 뱀이 풀썩 쓰러졌다.

“레이라, 괜찮….”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선 아르제오가 손을 뻗다가 말끝을 흐렸다.

소파 뒤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뱀을 발견한 탓이었다.

“레이라…!”

아르제오는 즉시 레이라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다른 팔로 달려드는 뱀을 막았다.

콱.

“꺄악! 아가씨! 아르제오 님!”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린 아르제오는 뱀을 떨쳐내고는 목을 쳤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제오, 물렸어요…?”

아르제오가 슬쩍 제 왼팔을 뒤로 감추려는데, 로라가 얼른 그 팔을 붙잡았다.

“일단 겉옷 벗으세요, 어서!”

사색이 된 로라는 아르제오의 겉옷을 벗기고 팔뚝을 세게 묶었다. 독이 더 퍼지면 안 된다며.

날이 추워져 겉옷이 두꺼운 덕에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얕은 상처로도 독이 들어갔을 테니 상황은 심각했다.

“잠시만 계세요. 집안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로라, 위험해.”

“괜찮습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다치는 것보다 나아요.”

“로라…!”

로라는 막대기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문과 창문 등을 확인했다.

또 밖에서 뱀이 흘러들어올 구멍이 없는지. 들어와 있는 독사는 없는지.

로라가 돌아올 즈음, 레이라는 소파에 아르제오를 눕히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안 돼….”

그의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레이라의 손목을 간절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

“독에 드는 약초가 있어요. 레벤도 피워 올 테니 잠시 기다려요.”

“아가씨!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밖에 독사가 저렇게 많은데! 공작가에서 사람이 오길 기다려야 해요!”

“기다릴 시간 없어. 저 뱀의 독은 시간을 지체하면 치명적이야.”

비단 저 뱀독이 아니더라도, 어떤 독이든 시간을 지체해 몸 전체에 퍼지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터였다.

“안, 안 돼…. 레이라.”

그녀는 제 손목을 붙잡은 아르제오의 손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레벤은 바로 집 앞에서 피워도 되니까….”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였지만, 아르제오는 절대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제오, 이거 놔요. 금방 다녀오면 되니까. 네? 제발….”

레이라는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안, 돼.”

제발 놓아 달라고 울어도 아르제오는 절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지켜보던 로라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원망 가득한 눈으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그때, 창밖으로 검을 휘두르는 유진이 보였다. 그 주변으로 공작가의 기사들도.

“아가씨! 공작가에서 사람이 왔어요!”

레이라는 로라의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 아르제오의 손을 토닥였다.

“공작가 사람들이 왔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놔 줘요.”

줄곧 꽉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아르제오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대로 툭,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함께 레이라는 제 심장도 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지금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레이라는 창밖을 지켜보는 로라에게서 막대기를 낚아채 저택의 문을 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곧장 제 뒤로 문을 닫았다.

“로라, 제오를 부탁해.”

“예, 아가씨!”

문 너머의 로라가 크게 대답하는 것을 확인한 레이라는 걸음을 뗐다.

“아가씨, 뛰시면…!”

당황한 기사 하나가 주변의 독사들을 처리하며 레이라의 뒤로 따라붙었다.

“상단주!”

“유진! 제오가 독사에게 물렸어요! 약초와 레벤 꽃잎을 구하러 갈 거니까 도와줘요!”

“예.”

아르제오가 물렸다는 말에 유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레이라가 약초밭까지 가는 길에 장애물이 없도록 유진이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주변의 기사들이 놀랄 정도의 실력이었다.

약초밭에 도착한 레이라는 털썩 무릎을 꿇고 곧장 필요한 약초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레벤의 씨앗에도 제 피를 잔뜩 머금게 하고는 꽃을 피웠다. 피를 더 많이 머금으면 더 효력이 좋아질까 싶어서.

지금은 그런 작은 것에라도 기대야 했다.

그렇게 꽃잎과 약초를 챙긴 레이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지끈거리는 두통에 얼굴을 찌푸리자, 주변의 독사들을 처리한 유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가 다시 걸음을 떼려는데, 유진이 다가섰다.

“아가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유진은 검을 크게 휘둘러 검기를 날려 독사들을 처리하고는 검을 갈무리하고는 레이라를 번쩍 안았다.

“뛰시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합니다.”

“저희가 엄호하겠습니다!”

유진이 그녀를 안고 달리니, 기사들이 독사들을 빠르게 처리했다.

그녀가 혼자 뛰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였다.

‘제발, 제발….’

유진의 도움으로 레이라는, 빠르게 약초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

기사들과 유진이 섬 전체를 돌며 독사를 해치웠다.

공작가 사람들을 데려온 뱃사공은 디몬의 요구에도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자연스레 디몬과 짐꾼들은 시타델 섬을 벗어나지 못하고, 해안가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에는 기사들이, 그리고 뒤늦게 소식을 접한 미켈이 다른 기사들과 함께 탄 배가 다시 섬으로 들어섰다.

독사를 푼 섬에 오고 싶은 이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미켈은 그 무엇보다도 레이라의 상태가 먼저였다.

“아가씨는! 아가씨는 괜찮으시오?”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미켈이 소리쳤고, 디몬과 일행을 감시하던 기사가 어서 가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미켈은 기사들과 함께 섬 안으로 들어섰다.

득실거리던 독사들은 꽤 정리된 상태였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미켈의 안전을 위해 기사 몇이 의사를 따랐고, 먼저 도착했던 기사들도 검을 들고 저택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아가씨!”

진료 가방을 든 미켈이 레이라를 애타게 찾으며 저택으로 뛰어들었다.

“미켈! 잘 왔어요, 어서 제오 상태 좀 봐줘요!”

“예?”

미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라는 안색이 좋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소파에 누운 아르제오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얼굴을 굳히고 다가선 미켈이 그를 살피는 동안, 레이라는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유진도, 로라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미켈이 오기 전, 약초를 빻아 뱀에게 물린 상처에 바르고 레벤의 꽃잎을 달여 그에게 먹였다.

그녀가 약초를 가지러 저택을 나설 때부터 정신을 잃은 아르제오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레벤을 달여 먹이고 상처에 약초를 바르자 표정은 점차 편안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고, 정신도 차리지 못했다.

혹시라도 아르제오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사로잡힌 레이라는 발만 동동 굴렀다.

그의 상태를 유심히 살핀 미켈이 물었다.

“아가씨, 어떤 약초를 쓰셨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레이라는 떨리는 손으로 남은 약초를 미켈에게 보였다.

‘이게 최선이었다.’

그녀가 선택한 약초가 저 독사의 독에는 최선이었다. 레벤을 달여 먹였으니, 그것도 최선이었다.

다만 아르제오의 체력이 버텨 줄지가 문제였다.

미켈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굳은 표정으로 레이라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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