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05)화 (105/122)

<105화>

“오오, 이게 그 유명한 약초밭이군요.”

디몬은 부러 과한 반응을 보이며 약초밭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다른 약초밭과 무엇이 다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없으니 영혼 없는 반응만 해댔다.

그리고 세 사람은 그런 디몬의 반응만으로도 정말 약초에 관심이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약초밭을 안내하던 레이라는 그저 미소로 디몬을 마주했다.

약초에 관심이 없을 수는 있었다. 관심이 없어도 뛰어난 약효가 있다면, 그 나라에 원하는 의사가 있을 테니.

이쪽은 거래만 제대로 체결하면 될 일이었다.

“아, 그보다 상단주님. 린타 왕국에서 제국으로 올 때, 소소하지만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아….”

약초밭을 대충 훑어본 디몬이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에 레이라는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린타 왕국에서만 나는 독특한 색의 광석입니다. 소소하지만 받아 주시죠.”

디몬은 소소하다는 말을 강조했지만, 그 왕국에서만 나는 독특한 색의 광석은 아주 귀하고 비싼 값에 거래되는 물건이었다.

그걸 아는 유진이 아르제오와 레이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진이 슬쩍 고개를 젓는 것을 확인한 아르제오가 나서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런 선물은 받지 않습니다. 약초에 대한 값만 치르면 얼마든지 약초를 공급하니, 이런 건 불필요합니다.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고요.”

“정말 소소한 겁니다. 이리 직접 가져왔는데, 거절하시면 제가 난감합니다.”

그러지 말고 받으라며 디몬이 상자를 내밀자, 아르제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희 상단은 어디에서도 이런 건 일절 받지 않습니다.”

“저는 상단주께 드리고 있는 겁니다.”

디몬은 기분이 상한 듯 아르제오를 흘겨보았다.

“그의 말이 맞아요. 저희는 정당한 약초값 외에는 그 무엇도 받지 않아요.”

“하지만, 제국에서 이리 귀한 걸 어찌 또 구하신단 말입니까…! 린다 왕국과의 교류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받지 않으면, 공작가에서 이 광석을 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레이라가 되묻자, 디몬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이 제국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는 생각해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디몬이 쉬이 물러나지 않자, 유진이 제지하고 나섰다.

“상단주께서는 기다리신 것에 대해 보답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 선물은 받지 않으시겠다니 넣어두시지요.”

“들고 가실 약초를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걸로 그냥 넘어가시죠.”

유진의 뒤를 이어 아르제오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자, 그제야 디몬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니 어쩔 수 없군요.”

애초에 디몬의 목적이 약초라는 걸 아는 유진은 그 태도를 아니꼽게 지켜보았다.

“죄송하지만, 날이 차니 상단주께서는 이만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방문 일정은 이쯤 하도록 하죠.”

“아, 예. 그러시죠.”

이렇게까지 선물을 하나도 받지 않으니 그 짐꾼들을 시켜 다른 것들도 전부 가지고 돌아가야 했다.

디몬은 돌아간다는 말에 짐꾼들을 불렀다.

아르제오가 저택에 미리 준비했던 약초를 짐꾼에게 건넸고, 디몬은 짐꾼들을 이끌고 먼저 해안가로 나섰다.

“제가 배웅하고 오겠습니다. 이제 공작저로 돌아가실 거죠?”

“아, 네. 유진이 배웅하는 동안 약초들을 다시 한번 보고 돌아갈 거예요.”

“네. 그럼 해안가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유진이 먼저 섬을 나서고, 약초밭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뒤를 로라가 따라나섰다.

“아까 그 사람, 약초에 별로 관심 없어 보이던데.”

“그렇죠?”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나라의 의사들은 관심이 많을 거예요. 그러니 이리 먼 길을 왔을 테고요. 저희는 약초가 악용되지 않게 잘 관리하고, 약초를 공급하기만 하면 되죠.”

“그대 말이 맞아.”

싱긋 웃은 아르제오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뒤따르던 로라는 이제 이 정도 애정행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서 약초만 보고 돌아가요. 조금 피곤하네요.”

“역시 방문 일정 받는 게 아니었어. 어서 가서 쉬자.”

피곤하다는 말에 아르제오는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약초밭에서만 내려줄 거야.”

“제오는 정말 과보호예요.”

“맞아. 난 과보호야.”

그렇게 그녀를 안고 약초밭에 다다른 아르제오는 조심스럽게 레이라를 내려주었다.

싱그러운 약초밭은 오로지 레이라가 주는 기운에 의지해 자라났다.

마치 맛있는 걸 한번 맛본 아이가, 다른 건 먹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레이라가 땅에 손을 올리고 힘을 흘려보내는데, 돌연 평소와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스슥, 스슥, 하고 무언가 기어가는 듯한 불길한 소리.

그 소리를 제일 먼저 눈치챈 건 아르제오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주변을 훑다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레이라!”

아르제오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릴 즈음, 레이라도 그 소리의 정체를 발견했다.

“세상에….”

“꺄악!”

약초들 사이로, 그리고 주변의 풀숲 사이로 뱀들이 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발견한 로라는 비명까지 내질렀다.

“뛰어!”

레이라를 내려놓을 수 없는 아르제오는 로라를 이끌고 다시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자신들이 지나온 길에도 중간중간 뱀이 보였다. 마치 나무껍질 같은 무늬의 가죽을 가진 갈색 뱀.

“꺄아악!”

그 뱀이 가까이 기어 오자, 로라가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얗게 질린 세 사람은 재빨리 섬의 저택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로라가 바들바들 떨며 휘청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르제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레이라에게 다가와 그녀를 살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시진 않았죠?”

“난 괜찮아….”

괜찮다고는 했지만, 레이라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황이 이러하여 놀랐을 터였다.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아르제오가 표정을 굳혔다.

“제오, 밖의 저 뱀은….”

“그래,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건 독사야.”

겉면이 나무껍질 같은 저 뱀들은 사납고 난폭하기로 유명한 뱀이었다. 독을 품고 있기도 했고.

“저런 게 도대체 왜 시타델에….”

“일단 레이라, 여기서 나오지 말고 기다려.”

“나가려고요? 저 뱀은 독사예요!”

레이라가 불안한 듯이 아르제오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는 저택 내에 있던 제 검을 챙기며 그녀를 토닥였다.

“괜찮아. 가서 유진을 불러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제오…!”

불안해하는 레이라를 두고 가는 것이 아르제오도 내키지 않았다.

“레이라, 괜찮아.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 안전한 게 확인되면 데리러 올게.”

“하지만….”

“그대는 지금 지켜야 할 아이가 있잖아. 로라도 곁에 있을 테니 괜찮아.”

휘청이는 그녀를 아르제오가 단단히 붙잡았다.

“아가씨, 괜찮으실 겁니다. 제가 곁에 있을게요.”

로라가 그녀를 폭신한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히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아르제오는 저택을 나섰다.

저택 근처에도 독사들이 득실거리며 몰려 있었다.

아르제오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훑고는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잡는 건 생각보다 오랜만이었다.

‘실력이 녹슨 건 아니겠지. 그럼 죽겠는데.’

픽 웃은 그가 검을 휘둘러 검기를 날리자, 일직선으로 뱀들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렇게 길을 만들며 아르제오는 유진이 있을 해안가로 달려갔다.

“보셨죠? 아르제오 님이라면 분명 괜찮을 거예요.”

소파에 앉은 레이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매만졌다.

“로라, 갑자기 어떻게 시타델에 독사가 있는 걸까….”

그것도 저렇게 많이. 게다가 그녀가 먼저 와 있었을 때는 없던 뱀들이.

‘제오도 같은 생각을 했으니 유진에게 간 거겠지.’

독사가 득실거리는 위험한 밖에 아르제오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를 믿어야 했다.

“…저들과의 거래는 보류해야겠어.”

“예, 아가씨. 하지만 지금은 일단 진정하세요. 아기씨까지 놀라셨을 거예요. 공작저로 돌아가면 미켈에게 먼저 보여야겠어요.”

로라의 말에 레이라가 마음을 진정시키려 심호흡하며 제 배를 쓰다듬었다.

* * *

“유진! 멈춰라!”

아르제오는 막 해안가를 벗어나려는 배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유진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아르제오가 그리 말하니 일단 배를 멈췄다.

“잠시 기다리시죠.”

게다가 아르제오는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디몬은 어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오랜 시간 걸쳐 드디어 약초를 손에 넣었고, 거래도 체결될 터였다. 그러니 이제 린타 왕국으로 금의환향하는 일만 남았는데 말이다.

검을 들고 나타난 아르제오는 굳은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전부 배에서 내려! 아무도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하게 해.”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살벌한 아르제오의 얼굴에 유진마저 당황했다.

“전부 배에서 내려. 섬으로 가져왔던 짐들을 다시 살펴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명부터 해 주셔야…!”

엉거주춤한 짐꾼들이 눈치를 살폈고, 디몬이 강하게 항의했다.

“섬에 독사가 득실거린다.”

“예? 상단주는,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아르제오의 대답에 유진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세, 세상에 그런 일이….”

디몬도 불안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거기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는 서늘한 시선으로 배에서 내리는 디몬 일행을 훑으며 말했다.

“이 섬에 출입이 가능한 건, 공작가가 허락한 사람들뿐. 오전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런 건 없었다.”

시타델 섬에는 본래 아무것도 살지 않는 땅.

레이라의 힘으로 이제 겨우 날아다니는 새가 쉬어가는 정도였다. 그런 곳에 뱀이 살 리가 없었다.

“짐 검사를 다시 해. 당장 다 내려. 아무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

“자, 잠깐,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저는 오랜 시간 기다려, 그저 약초밭을 보기 위해…!”

“유진, 서둘러라. 그리고 아무도 이 섬에서 나가지 못하게 해.”

“예, 전하.”

유진의 대답에 디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전하? 전하라니, 그 호칭은….’

아르제오는 뱃사공에게 홀로 배를 타고 건너가 공작가에 섬의 상황을 알리라고 일렀다.

레이라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니,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어 뱃사공은 서둘러 배를 돌렸다.

“잠깐, 그 배는 우리가…!”

배를 붙잡으려는 디몬에게 아르제오가 살벌하게 읊조렸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어. 지금 겨우 참고 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