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아침에 눈을 뜨니 언제 들어온 건지, 아르제오가 옆에 누워 있었다.
레이라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에 아르제오가 부스스 눈을 뜨자, 레이라가 재빨리 손을 거뒀다.
“아, 깨웠어요? 미안해요.”
“으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르제오는 웅얼거리며 레이라의 손을 붙잡아 다시 제 뺨에 올려놓았다.
쪽.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고. 그러고는 만족한 듯이 다시 잠들었다.
그 모습에 픽 웃음이 터진 레이라는 가만히 그의 뺨을 매만졌다.
조금 더 아르제오의 얼굴을 응시하던 레이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눈도 뜨지 못하던 아르제오가 벌떡 따라 일어났다.
“일어나려고?”
“아, 네. 오늘은 왠지 뭐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 뭐로 준비할까?”
“음…. 샐러드나 샌드위치…. 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잠시만 기다려. 금방 가져올게.”
“아, 제가 가면….”
자신이 식당으로 가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아르제오는 그 입술을 쪽 입을 맞춰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더니 옷을 챙겨입고 방을 나섰다.
그 사이 로라가 방으로 들어와 레이라는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한 준비를 마친 레이라를 위해 하녀가 먼저 레벤을 띄운 차를 내왔다.
이제는 침대를 조금 벗어나고 싶었던 레이라는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찻잔을 반쯤 비웠을 즈음, 아르제오가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숄을 두르고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고개를 돌렸다.
“자, 샐러드랑 샌드위치.”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아르제오가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었다. 언제 시간이 이리도 빠르게 흐른 것인지.
“자, 샌드위치 먼저 먹어 보자.”
아르제오는 샌드위치 접시를 레이라의 앞으로 밀며 말했다. 샐러드보다는 샌드위치가 든든할 테고, 조금이라도 먹는다면 더 든든한 쪽이 나을 테니까.
레이라는 샌드위치를 베어 오물거리더니 꿀꺽 넘겼다. 그 과정을 아르제오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지켜보았다.
“괜찮아…?”
“네, 괜찮은 거 같아요.”
그녀가 한입 더 샌드위치를 베어 물자, 아르제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때서야 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레이라는 입덧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심할 때는 샌드위치 두 입이 한계였다. 아예 먹지 못하는 때도 많았고.
고기류나 푸짐한 식사를 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샌드위치 하나를 거의 다 먹고, 샐러드도 조금 먹었다.
“속은? 아직 괜찮아?”
“네, 괜찮아요. 이제 슬슬 입덧도 끝나나 봐요.”
“그럼 디저트도 먹을 수 있겠다.”
“디저트요?”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주방장이 직접 딸기 셔벗을 들고 나타났다.
“아가씨, 드시고 싶으시다던 딸기 셔벗입니다.”
“어머.”
그녀는 놀란 얼굴로 제 앞에 놓이는 딸기 셔벗을 바라봤다.
전날 딸기가 먹고 싶다고 말하고, 딸기를 찾아오겠다며 아르제오가 저택을 나섰었다.
하지만 지금 시기에는 딸기를 구하기 어려울 터라 레이라는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정말 딸기를 구해 왔어요?”
“그럼. 그대는 내가 못 구해올 거라고 생각한 거야? 레벤의 씨앗도 찾았는데?”
“정확히는 제오가 찾았다고 하기 어렵지 않아요?”
“그런 건 정확하게 따지지 말자.”
레이라가 작게 웃으며 스푼을 들었다.
날이 쌀쌀해지는데, 어쩜 이리 차가운 것이 먹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딸기 셔벗을 떠먹자 입안에 차갑고 상큼한 딸기향이 퍼졌다.
레벤 차 이외에는 전부 먹는 것이 고통 그 자체였는데, 새콤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레이라가 맛있는 듯 다시 딸기 셔벗을 떠먹으니, 지켜보던 아르제오와 주방장이 크게 안심하는 것이 보였다.
셔벗을 떠먹던 레이라는 스푼을 입에 물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직 딸기 수확 철이 아니라서 찾기 힘들었을 텐데….”
“그대가 딸기를 먹고 싶어 한다고 했더니, 온 공작가가 혈안이 되어 딸기를 찾으려고 하니까. 그러니 이런 시기에도 딸기를 구해 오지. 맛있어?”
부드러운 아르제오의 표정에 레이라가 살며시 뺨을 붉혔다.
“네, 맛있어요.”
음식이 맛있다고 느낀 게 얼마 만인지.
“모두의 마음이 담겨 있어서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 곁에 있던 주방장은 눈물까지 머금으며 환하게 웃었다.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운 사람일까.
아르제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턱까지 괴고 셔벗을 먹는 그녀를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 * *
정성이 담긴 딸기 셔벗 이후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레이라의 입덧도 점차 잠잠해졌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던 시기, 레이라는 입덧 때문에 미뤄 두었던 마지막 방문객을 받을 준비를 했다.
“정말 괜찮아? 아직도 조금밖에 못 먹는데.”
아르제오가 안절부절못하며 걱정하니 레이라는 안심시키려는 듯 웃었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힘드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저쪽은 언제든 일정을 미뤄도 괜찮다고 했으니까요. 아가씨의 몸이 최우선입니다.”
유진마저 불안한 듯이 레이라에게 말했다.
“정말. 괜찮다는데 다들 그러네요. 미켈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더 좋다고 했어요. 산책도 꾸준히 하고요. 어차피 섬에는 줄곧 잠깐씩 다녀왔으니까 괜찮아요.”
레이라는 모두가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와중에도 종종 시타델 섬에 다녀왔다. 그 섬의 식물들은 그녀가 없으면 안 되니까.
물론, 아르제오가 동행해서 약초를 돌볼 때 외에는 줄곧 안고 있어서 힘들지도 않았다.
그마저도 며칠에 한 번씩만 모두가 겨우 허락할 정도였지만.
레이라의 먹는 양도 조금씩 늘어나고, 혈색도 좋아졌다. 게다가 그녀가 저리 고집을 부리니 유진은 방문객 일정을 예정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방문객은 먼 타국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요청서를 보낸 직후 들떠서 발루아로 왔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레이라의 임신으로 일정이 늦어지자,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모두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방문 당일의 짐꾼만 현지에서 고용할 생각으로.
기한 없는 기다림이었지만, 이건 그 나라에 큰 이익이었다.
이리 기다리게 했으니, 플로스 상단과의 거래에 유리한 위치에 올라설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방문 일정이 잡혔다.
일정이 잡힌 뒤에야 그 방문객, 린타 왕국에서 온 디몬은 짐꾼을 모집했다.
짐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공작가에 전달할 선물과 거래하여 곧장 약초를 받아 갈 생각이었으니 짐꾼이 필요했다.
그 모집에 어떤 남자가 후드를 뒤집어쓴 제 아내와 함께 나타났다.
“포레스티아 공작령은 사람을 귀히 여기기로 유명하죠. 영지민들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긴다고요. 부디 불쌍한 사람 구원한다 여기시고 짐꾼으로 써 주십시오.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공작가 쪽에서도 나리를 좋게 보실 것입니다.”
디몬은 허름한 남자와 제 아내라며 데려온 여자를 훑어보았다.
어차피 짐꾼은 필요했고, 남자가 비실비실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내가 동행하게 해 달라고는 했지만, 저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아량을 베풀어 포레스티아에 좋은 인상을 심어두면 나쁠 것 없었다. 그러기 위해 지금껏 제국에서 기다린 것도 있었고.
“정말 좋은 인상을 심어 주게 되면, 네놈 몫은 후하게 쳐 주마.”
“감사합니다, 나리.”
남자는 디몬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고, 후드를 쓴 여자도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 * *
린타 왕국에서 온 사신은 일정에 맞춰 수도에서 공작령으로 내려왔다.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조금 더 이르게 시타델 섬의 저택으로 향했다.
약초를 잠시 돌보고 따뜻한 곳에서 방문객을 기다렸다.
그러니 디몬을 섬으로 가는 해안가에서 맞이한 건 유진이었다.
“디몬 님이시군요. 시타델 섬의 안내를 맡은 상단주의 보좌관, 유진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음으로, 유진은 이제 두 사람 모두의 보좌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걸맞은 일을 하고 있었고.
디몬은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고도 레이라가 직접 맞이하지 않는 것이 조금 불만이었지만, 섬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에 마음을 풀었다.
“한데, 짐이 많으시군요.”
“아, 왕국에서 가져온 소소한 선물입니다. 가능하다면, 거래 체결하고 받아 갈 수 있는 약초를 곧장 받아 가고 싶어서요.”
“그러셨군요.”
유진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선물을 옮기는 짐꾼들을 훑었다.
‘과연 레이라 님께서 받으실지.’
선물에서 시선을 거둔 유진은 디몬에게 말했다.
“저들을 전부 섬으로 데려가실 건 아니겠죠?”
“안 됩니까? 안 된다면 몇 명만이라도 데려가죠. 직접 전해 드릴 물건도 있고, 말씀드렸다시피 약초를 조금이라도 받아 가고 싶습니다.”
“상단주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머지않아 그들은 배를 타고 시타델 섬으로 향했다.
섬의 해안가에는 아르제오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날이 추우니 레이라는 저택에 있으라고 단단히 일러둔 뒤 말이다.
배에서 내린 디몬은 예를 갖추는 유진을 보고는 아르제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린타 왕국에서 온 디몬입니다. 이번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상단주는 홑몸이 아니니 섬의 저택에서 기다리시라 했습니다.”
“아, 예.”
다른 사람을 상단주로 칭하는 것 보니, 이 남자도 상단주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에 디몬은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기대하는 것만큼의 대접이 돌아오지 않는 듯해서.
하지만 그걸 따질 수는 없으니 디몬은 순순히 두 사람을 따라 시타델 섬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도착하자, 레이라가 두툼한 숄을 두르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 이것도 더 두르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까지 두르면 더울 거야.”
그녀의 뒤를 두툼한 담요를 든 로라가 뒤따르고 있었다.
“저분이 플로스 상단의 주인이십니다.”
유진의 말에 디몬의 시선이 레이라를 향했다.
가녀린 몸을 보니, 그동안 줄곧 몸이 좋지 않다고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몸으로 어찌 약초들을 키워내는지….’
포레스티아가 가진다는 그 특별한 힘이 아니라면, 분명 불가능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디몬은 레이라를 따라나섰다.
“약초밭은 이쪽입니다.”
그들이 레이라의 안내를 받으며 약초밭으로 향한 사이, 디몬은 짐꾼들을 저택 앞에서 기다리게 했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는 가만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슬쩍 눈짓을 주니 그 옆에 서 있던 후드를 쓴 여자가 짐 바구니를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몰래, 슬쩍 그곳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