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가능하다면, 요청이 있을 시에 그렇게 할 예정이에요.”
“요청서는 따로, 공작가로 보내 주시면 검토 후에 섬 출입 허가 여부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라의 말에 유진이 얼른 덧붙였다. 요청한다고 누구나 들여 보내주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괜히 누구든 갈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그 말이 밖으로 퍼지기라도 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했다.
너도나도 섬에 방문하겠다고 나서면, 통제하기 어려워지니 말이다.
유진의 말에 참석자들은 모두가 돌아가면 당장 방문 요청서부터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류회 이후, 시타델 섬에 방문 요청을 하고 승인이 나면 약초밭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약초밭을 보고 싶다며 공작가로 요청서를 넣었고, 덕분에 유진은 아주 바빠졌다.
* * *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던 로이드는 시종장에게 차를 내오라 일렀다.
일전에 니타 왕국으로 꽃잎을 보내며, 레이라가 그에게도 꽃잎을 보내겠다고 했었다.
니타 왕국으로 떠났던 병사들이 모두 제국으로 귀환했을 즈음에, 황궁으로 그 꽃잎이 도착했다.
로이드는 여전히 잠을 편히 잘 수 없었고, 지끈거리는 두통을 달고 살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연스럽게 레이라가 보낸 꽃잎을 띄운 차를 찾았다.
귀한 레벤의 꽃잎이라 그런지, 확실히 마시고 나면 두통이 가셨다.
어떨 때는 아예 차를 들고 레이라가 머물던 궁으로 향해, 차를 마시고는 잠까지 잤다.
황제궁은 비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로이드는 거의 레이라의 궁과 집무실만 드나들었다.
자연스레 궁인들과 귀족들은 로이드가 레이라를 잊지 못하였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혼인의 서약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저 당분간은 새 황후 얘기를 꺼낼 수도 없게 되었다며 저들끼리 떠들기만 했다.
하지만 로이드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뒤를 이를 황태자가 없는 건 오래 지켜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곧이어 시종장이 레벤의 꽃잎을 띄운 차를 내왔다.
그걸 한 모금 들이켠 로이드는 한결 차분해진 분위기로 눈앞의 세실에게 물었다.
“아이는, 찾았나?”
“제 어미와 배를 타고 떠나려는 것을 붙잡았습니다. 현재, 다시 수도로 모셔오는 중입니다.”
“…그렇군.”
로이드의 눈빛은 서늘하고, 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세실은 어렵지 않게 황제가 그 아이를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마치 금기어처럼 느껴져서.
“그 여자에게는 수도 외곽에 지낼 곳을 마련해 주도록. 그리고 아이만 내게 데려와.”
“예, 폐하.”
세실이 집무실을 나서자, 로이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조급하게 차를 머금었다.
지금은 살얼음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후사 얘기를 쉬쉬하는 것일 터.
하지만 기회만 보이면 귀족들은 로이드에게 새 황후를 맞으라 목소리를 키울 것이었다.
그러기 전에, 그 아이를 황태자로 삼을 것이다.
로이드의 시선은 자연스레 아직도 집무실 한구석에 놓인 검으로 향했다. 검에 묻은 피는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로이드는 저걸 평생 치울 생각이 없었다. 단 한시도 잊지 않을 테니.
자신이 한 일, 그리고 지금 이리로 데려오고 있는 아이에게 할 일을 말이다.
‘노엘이 남긴 아이가 차기 황제가 될 거다.’
그리고 레이라가 없으니 로이드는 이대로 아무도 맞이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노엘의 아이에게는 황위 다툼 따위 겪지 않게 할 터였다. 그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일 테니.
* * *
루이스는 시타델 섬 방문 이후 정식으로 플로스 상단과 약초 거래를 체결했다. 몇 차례 제안서가 오가고, 꼼꼼히 확인 후에 맺어진 거래였다.
아르제오는 제 형님이라고 해서 봐줘서는 안 된다며 더욱 유심히 서류를 살폈고, 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이스는 포레스티아를 얻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확실하게도 포레스티아의 ‘호의’는 얻어냈다.
정작 공녀와 결혼한 아르제오는 리히덴을 떠나 돌아오지도 않으니 리히덴의 귀족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로렌스마저 제 궁에 틀어박히거나 어딘가로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니.
황제의 유일한 선택지는 루이스였고, 귀족들의 지지까지 얻어내 황제는 약속대로 루이스를 황태자로 만들었다.
그 소식이 포레스티아령까지 들려올 즈음, 플로스 상단은 벌써 다섯 번째로 시타델 섬 방문자 요청에 답신을 쓰고 있었다.
“요청자가 끊이질 않네요.”
“그러게요.”
한숨을 폭 내쉰 유진은 웃으며 대답하는 레이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남은 일은 제가 할 테니 그만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레이라. 안색이 좋지 않군.”
“약간 나른하고 졸린 것뿐인데요.”
아쉬운 듯이 웃는 그녀에게서 아르제오가 서류를 빼앗았다.
“여차하면 전하께서 대신 일하실 겁니다.”
“그래, 유진이 정 일을 못 하겠다고 하면 내가 대신할 테니 그대는 좀 쉬어.”
“전 못 하겠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그렇다네. 유진이 대신 일할 테니 우린 그만 가도 되겠네.”
“예?”
이어진 아르제오의 말에 유진이 조금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이제는 유진을 놀려먹는 아르제오가 당연할 정도로 익숙했다. 유진도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저리도 매일 재미있는 표정이었다.
아르제오는 서류를 유진의 책상에 몽땅 올려놓고는, 레이라를 안아 들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니, 아르제오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럼, 레이라는 이만 쉬어야 해서. 수고해, 유진.”
황당함에 입을 벌렸던 것도 잠시, 유진은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상단주는 쉬셔야 하니까요. 어서 들어가세요.”
공작가에는 새 집무실이 생겼다. 플로스 상단을 위한.
유진과 아르제오, 그리고 레이라의 책상이 한곳에 있었다. 보고를 위해 이리저리 이동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예 한곳에 모여 일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레이라를 상단주라 부르게 되었다. 다른 호칭은 아르제오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결국은 상단주에 정착했다.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커다란 집무실을 만든 거지만, 유진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집무실을 벗어나면서도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꼭 안고 어디 아프면 안 된다며 속삭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저 사이에서 일하고 있는 거지….’
무미건조한 눈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은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서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다시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가느니 이곳에 있는 것이 백 배, 천 배는 더 나으니 말이다.
집무실을 나선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안은 채로 자신들 방으로 돌아갔다.
시타델 섬에 머물 때도 많았지만, 공작저에도 두 사람을 위한 방은 꾸며졌다.
레이라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싫은 공작가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방이었다.
방으로 가던 길에 아르제오는 하녀에게 미켈을 불러오도록 지시했다.
“정말 괜찮은데….”
아르제오가 그녀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자, 레이라가 입술을 비죽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피곤하면 쉬는 게 맞아. 그대는 너무 무리를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제오도 유진도 함께 일하고 있으니까 괜찮은걸요.”
“헤레이스가 빠진 빈자리를 채우려고 애쓰잖아.”
이어진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도르륵 눈을 굴리며 입을 다물었다.
헤레이스는 포레스티아를 이어받아야 하니 레이라가 상단 일에서 물러날 것을 권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공작가를 이어야 하니 헤레이스는 상단 일에서 손을 뗐다.
“유능한 인력은 많으니 그대는 좀 쉬어도 돼. 요새 계속 피곤해했잖아?”
“조금 나른한 것뿐이에요. 요새는 계속 자도 졸린 기분이에요.”
“그동안 무리해서 그럴 거야. 그래도 일단 미켈에게 진찰을 맡길 테니 걱정 마.”
“걱정은 제오가 하고 있잖아요.”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당연하지, 그대가 없으면 안 되잖아.”
“뭐가 안 돼요?”
“내 남은 평생 그대와 함께하기로 했는데, 그대가 없으면 의미 없잖아.”
“…조금 나른한 걸로 절 없애는 건가요?”
“조금이라도 아픈 게 싫다는 소리야. 정말, 결혼했는데 왜 아직도 나한테는 냉정한 거야?”
아르제오가 투덜거리자, 레이라가 싱긋 웃고는 그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너무 오래 자고 싶지는 않으니까 제오가 옆에 있다가 깨워 줘요.”
“나야 상관없는데….”
팔에 뺨을 찰싹 붙인 레이라가 귀여워 아르제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말끝을 흐린 그는 곧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키득거리며 말했다.
“미켈을 불렀는데 이러고 있어도 되겠어?”
그 물음에 레이라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들어와.”
그녀의 이런 귀여운 반응을 보는 일은 흔치 않으니 아르제오는 지금 순간을 만끽했다.
방문을 노크한 미켈은 곧장 문을 열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자주 꼭 붙어 있는 둘을 위한 작은 배려였다. 아니, 미켈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부르셨습니까.”
“레이라를 진찰해 주겠나? 요즘 줄곧 나른하고 피곤해해서. 오늘은 안색도 좋지 않아.”
“잠시 살피겠습니다.”
다른 것이 아닌 레이라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에 미켈은 심각한 얼굴로 다가섰다.
그녀가 아프면 온 공작가가 걱정할 테니.
그럴 뿐만 아니라, 레이라는 아파도 약초 공급을 위해 일하려 할 테고 모두는 그걸 말리느라 애쓸 터였다.
그러니 레이라는 아프기 전에 미리 챙겨야 했다.
미켈이 레이라를 진찰하는 동안, 아르제오는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상태를 살핀 미켈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아르제오를 돌아보았다.
“어떤가?”
“그게….”
미켈이 말끝을 흐리며 레이라를 힐끔거리니, 아르제오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왜,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어디가 안 좋아?”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미켈은 불안이 번지는 아르제오를 진정시키고는 레이라를 향해 돌아섰다.
“아가씨께서 아이를 가지신 모양입니다.”
“뭐…?”
미켈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되물었다.
“축하합니다, 아가씨. 임신하셨습니다.”
재차 확인하는 듯한 두 사람에게 미켈이 말하자, 레이라 저도 모르게 입가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