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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101)화 (101/122)

<101화>

지난밤.

먼저 잠이 든 레이라를 아르제오는 은은한 불빛에 의지해 가만히 바라보았다.

살을 맞대고 누워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도 더 가슴 벅찬 감동이었다.

이렇게 누워 함께 잠들고, 함께 눈을 뜨는 것. 그리고 앞으로는 매일이 그런 행복으로 가득 찰 거라는 생각에 아르제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잠든 레이라의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누른 아르제오는 빈틈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이 행복이, 마냥 줄곧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음날 눈을 뜨고 난 뒤로도, 부르기 전까지는 찾아오지 말라고 일러 둔 덕에 두 사람은 방해받지 않았다.

아르제오는 눈을 뜨자마자 또다시 레이라의 얼굴 이곳저곳에 뽀뽀를 퍼부었고, 그녀는 키득거리며 그를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요.”

“싫어.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몸을 일으키려는 레이라를 덥석 끌어안은 아르제오가 졸린 목소리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살결이 훅 다가오자, 레이라는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아르제오가 눈앞에 보이니 그녀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레이라가 눈을 질끈 감아 버리니 아르제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쩐지 더 괴롭히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오늘은 이쯤 하기로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알겠어, 일어날게.”

레이라는 조금 부끄러운 듯 얇은 이불로 몸을 가리고 일어나 얼른 부드러운 실크 가운을 걸쳤다.

그러고선 분명 흐트러졌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선 레이라는 곧 숨을 훅 들이켜야 했다.

“제오! 이게 뭐예요!”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레이라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아르제오를 홱 노려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덮었다.

“…내가 너무했네.”

“이건 너무했어요.”

“그렇게까지 한 줄 몰랐어.”

레이라는 드레스룸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조금 전 레이라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인 아르제오는 제 뺨을 두어 번 내려쳤다.

* * *

결혼식으로부터 정확히 열흘. 아르제오가 조금 더 둘만 있자며 고집을 부린 탓에 두 사람은 열흘이나 섬을 나서지 않았다.

하녀들은 식사를 준비하거나 부를 때 외에는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숨은 건지 레이라가 의문을 가질 만큼.

두 사람은 약초밭을 돌보고, 섬을 산책하기도 하며 정말이지 여유로운 열흘을 보냈다.

밤만 되면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고 말이다.

아르제오는 여전히 둘만 있는 시간을 더 원했지만, 이 이상 일을 미뤄둘 수는 없어서 공작저로 돌아왔다.

“이야, 오랜만에 뵙네요.”

공작저로 돌아가니 헤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큼….”

잔뜩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레이라를 보며 헤레이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런 그녀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진심으로 행복해 보여서, 헤레이스 역시 진심으로 기뻤다.

“일이 밀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님. 뛰어난 사람이 많아서 일 처리에 문제도 없었어요.”

“그, 그래?”

“예, 특히 형님의 보좌관께서 일을 아주 열심히 하셨습니다. 덕분에 제가 좀 편했습니다.”

헤레이스의 말에 레이라는 눈을 빛냈다. 결혼식에서도 얘기했었지만, 역시 아주 뛰어난 인재임이 증명되었으니 꼭 함께 일하고 싶었다.

“유진이 옛날부터 일은 잘했어.”

“그럼 어서 유진이 도망가기 전에 고용하러 가야겠어요.”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는 가벼운 걸음으로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유진에게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도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가 훤히 보여서 헤레이스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유진은 공작가에서 아르제오에게 내어주었던 방에서 임시로 지내고 있었다.

벌써 완벽하게 적응을 마쳤는지 유진은 플로스 상단 일을 척척 해내고 있었다.

“유진!”

레이라가 반가움을 드러내며 나타나자, 유진이 화색을 띠고 그녀를 맞이했다.

“공녀님! 드디어 오셨군요! 아, 아니지, 이제 공녀님이라고 하면 안 되죠. 흠…. 뭐라고 해야 하죠?”

“글쎄요? 그냥 이름이면 될 것 같은데.”

“그럴까요? 레이라 님?”

능구렁이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유진을 아르제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전하께서 그리 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 부르라 하셨는걸요?”

“난 전하라고 부르지 않냐.”

“황자 전하시니까요.”

“그럼 황자비 저하라고 부르던지.”

“전 딱히 황족이 된 건….”

레이라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말끝을 흐리는데, 뒤따라온 헤레이스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자, 자. 호칭 정리는 나중에 하시고 일부터 보시죠?”

아르제오는 헤레이스의 말에 걸음을 떼면서도 눈을 가늘게 뜨고 유진을 흘겨보았다.

그들은 방 소파에 둘러앉아 그동안 처리한 서류들을 살피며 얘기를 나눴다.

유진은 앞으로의 상단 운영 방향과 의사들과 계속 교류하는 것이 어떠냐며 추천했다.

“확실히, 의사들과의 교류는 좋은 생각인 것 같네.”

아르제오가 동의하자 레이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에 하르센 백작가가 주최하는 파티에 갔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녀는 의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니 의사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는 반가웠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규모가 너무 크지 않도록 준비할까요?”

두 사람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유진이 매끄럽게 물었다.

“유진은 정말 일을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레이라님.”

“그럼 교류회는 유진에게 맡길게요.”

“예.”

유진과 대화를 마친 레이라는 상단이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녀가 섬에 머물면서 약초만 몇 차례 하녀들에게 건네 공작가로 옮겼으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일을 맡기니 생각보다 편안하다는 생각에 레이라는 앞으로 식물을 기르는 것에만 전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레이라와 아르제오가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진의 덕이 컸다.

의사들과의 교류회에 관한 건 유진과 헤레이스 선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니 진행이 매끄러웠다.

상단을 활발히 운영하기 시작한 이후로, 대륙으로 퍼져나간 플로스 상단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런 플로스 상단에서 주최하는 교류회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널렸다.

하지만 참석하고 싶은 모든 이들을 초대할 수는 없으니, 유진이 추리고 추려 명단을 작성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플로스 상단의 초대장을 받은 것이 암묵적인 신호로 통했다. 초대장을 받은 저 사람에게 줄을 서야 한다는 신호.

교류회는 수도에 있는 공작가 소유의 저택에서 열리게 되었다.

당분간 수도로 다시 올라오는 일이 없을 거라 예상했던 레이라는 조금 걱정스럽게 아르제오를 살폈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수도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장소였다.

레이라는 자객의 습격을 받은 일을 아직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고, 그건 아르제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궁에 가는 것도 아니고, 저택에서 교류회만 마치고 다시 공작령으로 돌아갈 테니 괜찮을 터였다.

교류회는 흡사 회의처럼 준비되었는데, 이는 참석하는 이들이 대부분 의사라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단정히 차려입은 의사들이 하나둘, 저택에 도착하고, 뒤이어 하르센 백작 부부가 도착했다.

“공녀님! 이리 건강한 모습을 뵈니 정말 마음이 놓입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해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 그간 편지로만 안부를 물어서 그런지, 이리 얼굴을 보니 좋네요.”

백작 부인과 레이라가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백작이 부인의 어깨를 살포시 토닥였다.

“저까지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녀가 미소로 인사를 받자, 백작 부부도 곧 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공녀님이라는 호칭이 괜찮은 거냐며 백작이 부인에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 레이라는 작게 웃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참석한 모두가 레이라에게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내심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었다는 말들을 꺼내는 것을, 그녀는 흘려들었다.

함께 참석한 유진이 주도적으로 교류회를 이끌어 나갔고,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참석자들과 질문을 주고받으며 대화했다.

그리고 의학 지식과 약초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그들은 슬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참, 그 얘기 들으셨어요?”

“뭘요?”

수도의 큰 진료소에서 온 원장의 조수가 하르센 백작 부인에게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폐위되어 지방으로 쫓겨난 홀든 영애 있지 않습니까?”

“그랬죠.”

백작 부인은 조금 민감한 주제에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라의 눈치를 살폈다.

“글쎄, 그 홀든 영애가 유배지에서 사라졌다지 뭡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은근슬쩍 이쪽 얘기에 주목하고 있던 다른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쩐지 레이라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폐위되어 유배된 전 황후. 그리고 유배지에서 사라진 것까지.

물론 그 지방은 그 어떤 자연재해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디로 사라졌답니까?”

“그건 모르죠. 병사들 눈을 피해서 도망친 건지, 납치된 건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얘기를 꺼낸 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엘라의 행방을 모른다는 말만 덧붙였다.

슬쩍 레이라의 눈치를 살피던 하르센 백작 부인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크흠, 그보다 얼마 전 시타델 섬의 약초밭에 방문자를 받았다면서요?”

“아, 네. 약초 거래를 하는데 환경을 보고 싶다는 요청이 있어서요. 제게 특별한 분이기도 했고요.”

레이라의 대답에 교류회에 참석한 이들이 한차례 술렁였다. 그중 눈치를 살피던 의사 하나가 조급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하고 물었다.

“앞으로도 같은 요청이 있을 시에, 방문을 허락하실 예정입니까?”

총대는 그가 멨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사항이었다.

다들 내심, 시타델 섬의 약초밭이 보고 싶었으니.

그들의 기대 가득한 눈들을 훑은 레이라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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