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맹세와 축복의 말들이 오가고, 모두의 축복 속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마쳤다.
제일 뒤늦게 공작가 사람에게 신분을 밝히고 섬으로 들어왔던 로렌스는, 맨 뒤에서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원래대로라면 로렌스는 아르제오의 형제로서 루이스의 옆에서 함께 축복의 말을 건넸어야 했다. 하지만 로렌스는 그 역할을 마다했다.
긴 시간, 저 좋을 대로만 이용했는데 이제 와 제가 축복하는 것도 어쩐지 우스워서.
하객을 향해 돌아섰던 아르제오는 저 멀리 로렌스를 발견하고는 찰나 굳어졌었다.
초대해 놓고는 저런 얼굴로 맞이하다니. 로렌스는 어쩐지 입안이 썼다.
하지만 놀란 얼굴이던 아르제오는 곧 조금 안심한 듯, 표정을 풀며 웃었다. 로렌스는 그 미소를 마주하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나는 뭘 위해….’
도대체 무얼 위해 그리도 그 자리에 집착했던 걸까.
자신이 꼭 황태자가 아니어도, 형제들은 자신을 향해 저리 웃어 주는데 말이다.
로렌스는 픽 웃으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러자 아르제오가 레이라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로렌스를 따라나섰다.
해안가로 가는 길을 걷던 로렌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어째서 날 따라 나오는 거냐, 이 중요한 날에 신부의 옆에 붙어 있지 않고.”
“…왜 그냥 가십니까?”
“그럼 그냥 가지, 춤이라도 추고 가랴?”
“…그런 농담 안 어울리십니다.”
“그렇지.”
로렌스는 이게 무슨 한심한 농담이냐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아르제오가 더 자신을 따라 해변가로 나서기 전에 걸음을 멈췄다.
빙글 돌아선 로렌스는 아르제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저 보러 왔을 뿐이다.”
황태자도, 그 누구도 아닌 그저 형으로서.
“네가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말이야.”
로렌스는 줄곧, 아르제오가 얘기하는 자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족한 것 없는 황궁에서 태어나, 누리는 것들이 있으니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의무도 있는 거라고.
누릴 것은 누리면서 의무에서 도망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자유인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와 지켜본 아르제오의 자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황궁에서 누리던 모든 것들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들보다도 더,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그가 택한 자유였다.
다른 그 어떤 것들보다도,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로렌스는 두 사람이 참 서로 닮은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잘 어울리네.”
픽 웃은 로렌스는 나지막한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등을 돌렸다.
“피로연까지 참석할 여유는 없어서 먼저 가마.”
대충 손을 휘 흔들 로렌스는 걸음을 뗐다.
“…나중에 보자.”
나지막이 덧붙인 그 말에 아르제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고는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픽 웃고 로렌스를 배웅했다.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형님.”
한동안 ‘전하’라는 호칭만 들었던 로렌스는 미소를 머금고 시타델 섬을 벗어났다.
생각보다도,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황위도, 제 권력, 자리,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제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참하고, 아무것도 없는 그런 처지가 될 것을 걱정했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집착하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으니 다른 것들이 보였고, 마음이 가벼웠다.
로렌스는 실로 오랜만에 아주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로렌스를 배웅하고 돌아온 아르제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레이라에게로 다가갔다.
아르제오는 손을 휘휘 저으며 필과 유진을 그녀에게서 떼어놨다.
“너무 가까워.”
“저희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 중이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전하.”
“앞으로의 일? 무슨 일인데?”
아르제오가 의아한 듯 물으니 유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비죽였다.
“전하 덕분에 전 황자 전하 보좌관에서 하루아침에 길가에 버려진 고양이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뭐라는 거야, 고양이는 귀엽거든.”
“…정말 너무하시네요.”
“자, 자, 너무 그러시지들 마세요. 그래서 지금 유진님을 위해 공녀님께서 고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필이 중재에 나서자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레이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레이라를 고민시켜. 오늘 같은 날은 나 이외에 누구도 생각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제 앞날은요!”
“네 가문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싫습니다!”
유진은 주먹을 불끈 쥐고 원망 가득한 눈으로 아르제오를 흘겨보았다.
“제가 가문으로 돌아가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빤히 아시면서!”
울먹이기까지 하는 것 같아 레이라가 웃으며 유진을 다독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유진. 유진은 유능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가 제오에게 부탁하려고 했던걸요.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요.”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싱긋 웃는 그녀를 보며 이번에는 아르제오가 입술을 비죽였다.
“저희와의 거래도 부디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세요, 공녀님.”
“그럼요, 필.”
레이라의 대답에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필은 공작가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두 분.”
“아, 마르첼라. 고마워요.”
하객이라고는 공작가 사람들과 리히덴에서 온 몇 사람들. 마르첼라는 그녀의 드레스를 만든 덕분에 참석할 수 있었다.
“감히 제가 만든 것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드레스예요.”
“과연 아름답군.”
잘 만들었다는 아르제오의 칭찬이 이어지자, 마르첼라가 뿌듯한 듯 웃었다.
“저야말로, 이런 멋진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에 레이라는 수줍게 웃었다. 열심히 꽃을 심고 섬을 가꾼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시타델 섬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심상치 않은 거대함을 자랑하는 나무들은 싱그러웠고, 나무에 쉬어가는 새소리도 듣기 좋았다. 신랑과 신부가 걸었던 꽃길도, 그 주변을 둘러싼 꽃밭도 동화 속에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마르첼라는 레이라의 치장을 돕는 역할도 있어서 유일하게 발루아에서 초대된, 공작가 외의 사람이었다.
“행복해 보이셔서 좋네요. 공녀님을 보니, 저도 생각이 조금 바뀔 것 같아요.”
마르첼라의 눈빛에 아련함이 비쳤다. 레이라는 그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구태여 마담의 생각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마담의 생각이 저절로 바뀔 만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변할 거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르제오를 만난 건 정말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것도 폭풍우에 휩쓸려 파도처럼 아르제오에게 밀려갔으니.
“그러네요. 저도 공녀님처럼 언젠가, 제 생각을 바꿔 줄 사람과 만나면 좋겠어요.”
“그러길 바랄게요.”
마르첼라는 레이라의 화장을 가볍게 고치고는 피로연을 즐기러 자리를 떴다.
과하게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아니어서 식 직후 피로연에도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불편함이 없었다.
포레스티아의 기사들과 하녀들이 하나같이 매달려 레이라에게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어디에도 가지 말고 저택에 남아 달라고 애원했다.
결국, 각각 기사단장과 하녀장에게 끌려갔지만 말이다.
시타델 섬에는 웃음이 넘쳐났다. 아르제오와 레이라의 바람대로, 두 사람의 결혼식은 소중한 이들이 마냥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공작 부부는 연신 레이라를 붙잡고 그녀가 이리 행복하게 웃는 결혼식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상처받아서 다시는 결혼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을 줄 알았다고. 물론 어떤 선택을 했어도 레이라를 존중했을 터였다.
어느 정도 피로연을 즐기고 나자, 아르제오는 레이라가 헤레이스와 얘기하고 있는 틈을 타 공작 부부에게 다가갔다.
“결혼 축하합니다.”
싱긋 웃는 공작의 말에 아르제오가 슬쩍 입술을 비죽였다.
“말씀 편하게 하시기로 하고 또 그러십니다.”
“그래요, 당신. 그만 놀려요.”
데이지가 아르제오를 토닥이며 에드가를 흘겨보자, 공작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공작 부부는 아르제오를 이제 가족으로서 받아들였다. 레이라를 구해준 은인,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
“저….”
아르제오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얘기를 꺼냈다.
“식이 끝나면, 당분간 섬의 저택에서 지낼까 합니다.”
당당히 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신선했다. 에드가는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공작을 확인한 데이지가 싱긋 웃으며 아르제오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미 그리하도록 지시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데이지가 짙은 미소를 머금자 아르제오는 슬쩍 귀 끝을 붉혔다.
“자, 자, 식도 거의 끝나가니 우리도 이제 그만 돌아가죠.”
데이지가 에드가의 등을 떠밀며 주변에 눈치를 주자, 피로연을 즐기던 이들이 재빨리 정리를 시작했다.
로라와 시중을 들 하녀 몇이 저택에 남기로 했는데, 그들이 먼저 레이라를 이끌고 저택으로 사라졌다.
필과 유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제오를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던 탓에, 루이스가 두 사람의 등을 떠밀어야 했다.
정리를 마치고 저택으로 들어간 아르제오는 씻고 난 후에 목욕 가운만을 걸치고 방문 앞에 섰다.
“후….”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인데, 막상 이 문을 열고 들어서려니 긴장이 되었다.
하녀들은 모두 물러간 상태였으니 이 문 너머에는 레이라만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침을 꿀꺽 삼킨 아르제오가 이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는 시각. 방안은 은은한 조명만 밝혀 두어, 약간의 어둠이 어쩐지 긴장을 풀어 주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던 레이라는 문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제오. 왔어요?”
“뭐 보고 있어?”
아르제오는 긴장했던 것도 잊고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레이라는 미소를 머금고 제가 보던 것들을 그에게 내밀었다.
“공작가의 모두가 축하한다며 편지를 써 줬거든요.”
편지들은 한쪽에 수북이 쌓일 만큼 있었다. 슬쩍 내용을 살펴보니, 모두가 얼마나 레이라를 아끼는지 한눈에 보였다.
편지를 대충 훑은 아르제오는 픽 웃더니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빼내어 옆에 고이 올려두었다.
“이건 이제 나중에.”
레이라는 조금 아쉬운 듯이 편지를 힐끔거렸지만, 이내 아르제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난, 그대 사람이야.”
짙은 미소를 머금는 그의 얼굴은 이제껏 느꼈던 것을 뛰어넘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다.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픽 웃은 레이라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그를 꼭 끌어안으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
같은 말을 들려준 아르제오는 그녀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입을 맞췄다.
가볍게 입술을 맞대던 입맞춤은 점점 농밀해졌고, 레이라의 등을 받친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오늘은 한층 더 유혹하는 느낌이네요.”
“엄청 유혹하고 있으니까.”
싱긋 웃은 아르제오는 다시 레이라에게 입을 맞췄다.
오늘만은 두 사람의 밤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 조금은 여유롭게. 그러나 아르제오의 심정을 담은 듯 조금 조급하게.
두 사람의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