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혼인의 서약을 맺었다가 헤어지는 사람들을 수군거리는 건 어디나 같았다.
사교계에서도, 레이라가 나타나면 웃으며 그녀 주위를 맴돌았지만, 비웃음을 흘리는 이들은 많았다.
신관은 신을 모시는 제 신념에 반하는 일이니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신관은 도가 지나쳤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
하인이 대신관을 부르러 간 사이, 눈앞의 신관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라가 물었다.
“신전에서는 혼인 서약을 어긴 이에게 죄를 묻죠. 보통은 아예 묻지 않지만, 굳이 물어야 한다면 말이죠.”
제 신념에 반하는 행동이라 해도, 그저 조금 탐탁지 않거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정도였다.
물론 이렇게 불쾌감을 드러내는 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경우는 다른 이유가 숨겨졌을 때가 많았다.
“그럼 제가 신관님께 묻겠습니다. 혼인의 서약을 어긴 것이 저라고 생각하십니까?”
신관은 당연하게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어찌 그것이 그녀의 죄라고 할 수 있을까.
황족 독살 혐의를 씌워 죽음의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후에는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죄가 아님을 황제가 직접 밝혔다.
그런데도 서약을 깬 것이 그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억지를 부릴 수는 없었다.
“공녀님!”
그때, 하인의 부름을 받고 대신관 마테아가 나타났다.
하인에게 대충 상황을 전달받은 대신관은 달려와 레이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
“고개를 드세요, 대신관님. 대신관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신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과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죄송합니다.”
신관이 마지못한 얼굴로 사과하자, 레이라는 대답 없이 대신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 일을 키우고 싶지 않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난처해하는 마테아를 안심시키려 레이라는 줄곧 무표정하던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대신관님.”
두 사람이 멀어지는 모습을 확인한 마테아가 신관에게 엄한 얼굴로 말했다.
“따라오게.”
제 방으로 신관을 데려간 마테아는 드물게도 언성을 높였다.
“어째서 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어!”
두 번째 혼인 서약을 맺는 이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혼인하더라도 서약식만큼은 최대한 생략하려고 했다. 사회의 시선이 곱지 못하니 말이다.
“…저는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어허! 고작 그것 가지고 그런 무례를 범한단 말인가! 그건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다!”
“…….”
“아직까지 그 귀족의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게지.”
마테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듯 말하자, 신관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니었습니까!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목숨을 앗아갈 정도는…!”
“그 백작은 타국의 자객을 제국 내에 들였다. 이는 매국 행위라고도 볼 수 있는 일이야. 그 때문에 공녀님께서 크게 다치기까지 하셨다. 게다가 그의 처벌에 불만이 있다면 그건 폐하께 아뢰어야 할 일이다.”
그 결정을 내린 건 로이드였다. 그러니 그 불만도 로이드를 향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감히 황제에게 맞설 용기는 없으니 비교적 수월하게 넘어갈 것 같은 레이라에게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그러니 귀족들과 필요 이상의 친분을 쌓지 말라 일렀거늘.”
대신관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중얼거렸다.
깊은 한숨과 함께 대신관은 신관에게 말했다.
“당분간 기도실에만 출입을 허하겠다. 방문객과 얼굴을 마주하는 일을 만들지 말게.”
“…예, 대신관님.”
* * *
“신전은 이만하면 대충 다 본 것 같으니 우리도 돌아가요.”
어색하게 웃으며 이끄는 그녀의 손길에 아르제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그녀에게 화가 난 게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잡는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니.
어찌 풀어 주면 좋을까, 고민하며 걷던 레이라는 후드를 푹 눌러쓴 여자와 부딪혔다.
“앗.”
“레이라.”
휘청이는 그녀를 재빨리 붙잡은 아르제오가 레이라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조심해.”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는 저와 부딪혀 비틀거리다 풀썩 주저앉은 여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어…?’
입안이 바짝 마른 듯한 갈라진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한 여자는 벌떡 몸을 일으켜 가 버렸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 같았지만, 대답은 짧았고 목소리가 갈라져 알 수 없었다.
그 뒷모습을 조금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던 레이라는 곧 아르제오와 함께 신전을 벗어났다.
신전을 나서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아르제오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신관이 어떻게 저렇게 무례할 수가 있나. 그대는 화가 나지도 않아? 어떻게 그대한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거지?”
신전 안에서는 또 다른 분란이 생길까 봐 줄곧 입을 닫고 있었다.
여전히 분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그의 표정에 레이라가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신전에서 두 번의 혼인 서약은 그다지 좋게 보지 않으니까.”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친 태도였어.”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또 있겠죠. 하지만 제겐 중요하지 않은 일이에요.”
“그대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데도?”
“제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녀의 대답에 아르제오가 입술을 비죽이며 물었다.
“내게 어떤 태도인지만 중요하고?”
“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해요.”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니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무례한 것에는 지나치게 물렀다.
그것이 불만스러운 아르제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레이라의 손을 잡았다.
“그대가 화내지 않으니, 그대에게 무례하게 굴면 내가 화내야겠어.”
그렇게 서로 화를 내주자는 말이 어쩐지 우스워서 레이라는 작게 웃어버렸다.
“그것도 좋네요.”
사실 이제까지의 레이라는, 제게 무례를 저지른 이에게 화낼 기회도 없었다.
공작가의 모두가 절대 그걸 두고 보지 않으니 말이다.
이제는 거기에 아르제오도 포함되었지만.
* * *
혼인 서약을 마치고 난 두 사람에게는 이제 결혼식만이 남아 있었다.
마르첼라에게 주문한 드레스도 준비되었고, 식을 올릴 시타델 섬의 꽃길과 장식도 준비되었다.
가까운 사람들은 초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얘기도 나왔었지만, 레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어릴 적부터 특별히 가깝게 지내 온 사람도 없었고, 누군가를 초대하게 된다면 분명 초대받지 못한 이들과 갈등을 만들 테니.
그래서 결혼식은 공작가 사람들과 리히덴에서 온 몇 사람들만 참석하게 되었다.
해가 쨍쨍한 여름의 어느 날, 두 사람은 시타델 섬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레이라를 데려간 로라는 결혼식 전까지는 안 된다며 아르제오를 막아섰다.
덕분에 그는 그녀를 보지 못하고 유진과 필, 그리고 루이스와 함께 시타델 섬으로 먼저 향했다.
“형님께는 소식이 없는 건가.”
배에서 내리며 루이스가 묻자, 아르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로렌스에게 이미 자신은, 저를 배신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했던 제 자리를, 루이스에게 넘기도록 저를 배신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르제오는 입안이 썼다.
그 오랜 시간 로렌스의 곁에서 그를 도왔어도, 한순간에 그런 처지로 바뀌어 버리는 게.
‘이래 봬도 동생인데 말이지.’
이제 로렌스에게 형제의 개념은 흐릿해지지 않았나 싶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좋은 날에 괜한 생각은 말자고 생각하며 아르제오는 고개를 저었다.
섬에는 새벽부터 공작가 사람들이 먼저 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레이라보다 먼저 준비를 마친 아르제오가 도착했을 땐,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이야, 전에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네.”
섬에 있는 유일한 저택과 약초밭을 지나, 더 섬 안쪽으로 들어가니 그동안 열심히 꾸민 꽃길이 있었다.
루이스는 일전에 약초밭을 둘러보러 섬에 왔을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감탄했다.
일전에는 싱그럽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대자연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동화 속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장관이군.”
끝없이 펼쳐진 꽃밭을 보니 루이스는 꽃을 심던 레이라와 아르제오가 떠올라 질린 얼굴을 했다.
‘이거 다 심은 건 아니겠지….’
섬을 살펴보러 왔던 첫날 도망쳐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쩐지 유진이 매우 지쳐 있더라니.
“확실히, 아름답네요.”
꽃밭을 둘러보는 유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곳에서 결혼식이라니, 루이스는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
아르제오는 곧 집사가 불러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자리를 비웠다.
루이스와 유진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사이 준비를 마친 레이라도 섬에 도착했다.
하객들은 슬슬 자리를 잡았고, 아르제오는 집사가 일러준 자리에 서서 레이라를 기다렸다.
그녀는 곧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첼라가 말했던 대로, 과하게 화려한 것보다는 레이라의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새하얀 드레스. 천천히 다가오는 그 모습에 아르제오는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내리깔고 바닥을 보던 레이라는 꽃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고개를 들었다. 미소를 머금고 주변을 살피는 얼굴이, 꽃길을 걸으니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는 느릿하게 걸어 아르제오에게 향했다. 레이라가 가까이 다가오자, 멍하니 그녀를 보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한순간도 레이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입매는 절로 풀어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살포시 그의 손을 잡자, 아르제오가 그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레이라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미치게 아름다워.”
그의 속삭임에 레이라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그 앞에서 기다리던 공작 부부와 루이스에게 다가섰다.
제 가족에게 앞으로 이 사람과 함께할 것을 맹세했다.
공작 부부는 물론, 루이스도 웃으며 두 사람을 축복했다.
그렇게 길지 않은 결혼식으로,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춘 아르제오는 주변에 들리지 않게 다시 작게 속삭였다.
“오늘 밤은 놔주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