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그토록 오랜 시간 아르제오의 눈앞에 들고 흔들었던 미끼, 자유. 아마도 그에게 진짜 자유를 가져다준 건, 로렌스도, 저도 아닌 레이라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르제오는 스스로 움직일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다.
두 형제 중, 누군가 한 명을 택하는 건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자유는, 스스로 움직여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제는 자유라는 아르제오의 대답에 루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다행이네.”
“그러니 굳이 그렇게 설명하러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참 유감이네. 그래도 네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었던 건 정말이야. 그저, 내 아우는 걱정이 많아서 말이야. 이 형님이 아우의 생각보다 유능하다고 말하고 싶었단다. 그럼.”
루이스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된다며. 곁을 지키던 믹은 그런 루이스를 따라나섰다.
혼자 남겨진 아르제오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공작저로 걸음을 돌렸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제가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는 어쩌면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레이라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손에서 놓아버리는 형태가 되었을 터였다.
공작저로 돌아오는 아르제오의 걸음이 빨랐다.
밤공기를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당장 레이라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서둘러 공작저로 돌아가니, 저택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자고 있겠지.’
당장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해도, 잠든 그녀의 방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르제오는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젖혔다. 레이라의 방 위치는 알고 있으니, 그저 창문으로 달빛이 들이치는 거라도 볼 생각에.
하지만 그곳에는 숄을 걸치고 방 테라스에 나와 있는 레이라가 있었다.
난간에 턱을 괴고 가만히 미소 지으며 아르제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르제오는 홀린 듯이 걸음을 서둘러, 레이라의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자, 그녀가 마침 테라스에서 방 안으로 돌아왔다.
그가 제 방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레이라는 그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오, 방으로 돌아가지 않….”
성큼성큼 다가선 아르제오가 와락 그녀를 품에 안아서 레이라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왜 안 잤어?”
“그러는 제오는요? 어디 다녀와요?”
“형님께서 부르셔서.”
“무슨 일이라도 있대요?”
놀란 그녀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가만히 등을 토닥였다.
“그냥. 별것 아니었어.”
그저, 오랜 시간 자신들 때문에 괴로웠을 동생이 걱정스러웠던 게지.
레이라를 품에 안은 상태로, 아르제오는 조곤조곤 루이스와의 대화를 얘기해 주었다.
아마도 줄곧 자유에 집착했던 제게, 황제가 황태자라는 족쇄를 채우려던 것을 신경 쓰고 있을까 봐.
얘기를 들은 레이라도 아르제오가 제게 하던 것처럼 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레이라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한참을 그를 안아주었다.
밤이 깊어, 아침이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르제오는 걸음을 떼는 것이 아쉬웠다.
하루라도 빨리,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하고 싶다고.
그날 밤의 짧은 시간 덕분에 아르제오는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 * *
결혼식 날짜가 가까워지자 두 사람은 물론, 공작가 사람들이 시타델을 드나드는 횟수도 늘어났다.
비록 큰 규모로 여러 사람을 초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게 공작가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시타델은 언제 고요했냐는 듯 활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결혼 서약을 맺기 위해 신전으로 향했다.
제국 내에 있는 신전에서 대신관과 미리 약속을 잡아 놨기에 그리 오래 걸리는 일정은 아니었다.
단정한 차림의 그들은 하얀색으로 맞춘 옷들이어서 예식을 준비 중인 연인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혼인 서약을 하러 신전에 방문하는 이들은 때 묻지 않은 하얀 옷을 입는 것이 관례였다.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을 볼 때마다 신관들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저 결혼을 앞둔 연인을 보는 흐뭇한 미소들이었다.
“…어쩐지 시선을 많이 받네요.”
“그러게.”
전에는 황궁으로 대신관을 불러 서약을 마쳤으니, 이리 신전을 방문한 건 레이라도 처음이었다.
신전 안쪽에 혼인 서약을 위한 작은 서약실이 있었다.
미리 와서 기다리던 대신관은 두 사람을 미소로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서약의 증인을 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포레스티아에는 빚이 있으니까요.”
대신관은 두 사람을 서약서가 펼쳐진 제단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반지를 교환하고, 혼인 서약서의 정해진 구절을 읽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신의 심부름꾼 마테아가 증명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대신관은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서약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두 사람은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전을 조금 둘러보기로 했다.
“발루아의 신전은 어때요?”
“이곳도 좋네. 신관들 표정도 부드럽고.”
그런데 아르제오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도실에서 나오던 신관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음? 우리 뭐 잘못했어?”
“…아니요.”
레이라는 신관과 눈이 마주친 레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공녀님.”
신관은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관님.”
“또 서약의 맹세를 하셨다고요.”
“네.”
“저희 신관들 입장은 조금도 생각지 않으시고요. 심지어 대신관님께서 증인을 서주셨다지요.”
그 신관의 눈빛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다.
뚜렷한 적의에 아르제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신관님께서는 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맹세를, 두 번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서약은 마쳤습니다. 그리 불편해하시니 저희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레이라.”
“가요, 제오.”
신관에게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아르제오를 레이라가 잡아끌었다.
“그냥 가요.”
“왜 그래야 하지? 그대는 공녀이니 엄연히 저들보다 신분이 높아. 그런데도 서슴지 않고 무례를 범하는군.”
아르제오가 날카롭게 노려보니 신관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지 곧 다시 말했다.
“신께 평생 함께할 것을 맹세하고는 이혼이라니요. 거기에 다른 사람과 또 같은 혼인 서약이라니….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명백한 죄입니다. 두 번째 서약의 증인으로 서는 것이 신관으로서 얼마나 수치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대신관님께 그런 누를 끼치시다니….”
불쾌감을 드러내는 신관의 말을 들으면서도 레이라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아르제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그게 어찌 죄란 말입니까? 바람이라도 피워서 헤어진 거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먼저 다른 여자를 만나신 건 폐하가 아니십니까?”
“가, 감히 폐하께 그게 무슨 망발이란 말입니까…!”
“그럼 그 대단하신 폐하께도 말씀드렸습니까? 함께할 것을 맹세하고 버리는 것이 죄라고 말입니다.”
“…….”
“왜요, 공작가는 그저 귀족이니 말이라도 지껄여 볼 용기는 있지만, 폐하께는 안 됩니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하지만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포레스티아는 그저 한낱 귀족이 아니죠. 신관님이 안전하도록 국경을 수호하는 이가 누굽니까?”
“…국경을 수호하는 건, 공작가의 의무입니다.”
“의무이니 당연하다 이겁니까? 그러니 죄를 물어야겠다고요? 한데 어째서 폐하께는 죄를 묻지 않으십니까? 황제의 자리에 앉은 이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도 됩니까?”
“이보십시오!”
신관이 더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 때문에 주변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그 언성에 차분하던 레이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늘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던 그녀의 시선이 매섭게 신관을 노려보았다.
“언성을 높이지 마세요. 이곳은 신전입니다.”
“신전임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저도, 이분도. 신관께서 쉬이 언성을 높여도 되는 사람이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언성을 높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레이라는 똑바로 신관을 마주했다. 그 신관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제국에서 이혼을 좋지 않게 보는 건 당연했다. 결혼식 절차에, 신관이 증인으로 서는 혼인의 서약을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다. 물론 신전은 그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신께 한 맹세를 어겼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신관의 무례를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저는 신관님께 서약의 증인을 부탁하지 않았어요.”
“…….”
“저에 대한 무례는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지만, 제 사람에 대한 무례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신관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곧장 숙이고 들어가려는데, 레이라가 한 발 더 빨랐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주변에 있던 신전 하인을 불렀다.
“예, 공녀님.”
“가서 대신관님을 불러 주게.”
“저, 공녀님….”
신관이 막아보려고 했지만, 레이라의 단호한 태도에 하인은 눈치를 살피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이, 일을 굳이 크게 만드셔야겠습니까?”
조급한 태도로 묻는 신관을 보며 레이라가 서늘한 눈으로 물었다.
“일을 크게 만드실 생각이 없으셨나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제게 그런 태도를 취하며 말을 꺼내지 않으셨을 텐데요.”
“…….”
“불쾌감을 드러내고는 싶었지만, 일을 키우고 싶지 않으셨나요? 저라면 조용히 넘어갈 테니까요?”
신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레이라의 평소 성정을 보아서는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조용히 넘어갈 터였다. 곁에 있는 아르제오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녀는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이 신관이 아르제오에게 언성을 높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