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곧이어 공작가에서 사람들이 시타델 섬으로 들어섰다.
일부는 꽃씨를 날랐고, 일부는 주변을 꽃장식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일을 시키겠다고? 우리에게?”
“저희가 친히 안내해 드렸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르제오의 말에 루이스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어느 누가 황자에게 이런 일을 시킨단 말인가.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레이라와 아르제오의 모습이 보였다.
쭈그리고 앉아 함께 땅에 꽃을 심고 피우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퍽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아무리 주변의 큰 관심을 받지 않고 황궁 밖으로 나돌았다고는 해도, 엄연히 황족이었다. 이런 일을 해 보았을 리가 없는데도 저리 자연스럽게 꽃씨를 심다니.
완전히 레이라에게 길들여진 듯 보였다.
픽 웃은 루이스는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아르제오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하는 걸 유심히 관찰하고는 똑같이 따라 했다.
루이스가 순순히 아르제오의 말대로 꽃씨를 심자, 유진도 하는 수 없이 일을 시작했다.
“정말 신기하군.”
몇 번 꽃씨를 심던 루이스는 곧 손을 놓고 레이라가 꽃을 피우는 걸 감상하기 시작했다.
“형님, 손이 멈춰 있습니다만.”
“이렇게 순식간에 꽃을 피우다니 말이야.”
아르제오의 지적에도 딴소리하며 그녀를 구경하던 루이스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했었지. 이런, 잊고 있었군.”
“예? 하지만 폐하께선 느긋하게….”
“어허, 유진. 손이 멈춰 있구나. 넌 이곳에 남아 두 사람을 도와 일을 하고 있으렴. 난 혼자서도 괜찮으니.”
“애초에 혼자 가실 계획이셨잖습니까.”
“그렇지. 넌 제오의 보좌관이니 말이야.”
싱긋 웃은 루이스는 레이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폐하와의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보도록 하죠.”
누가 보아도 일하기 싫어서 도망치는 모양이어서 레이라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네. 지금 상황이 이러하니, 멀리 배웅하지는 않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결혼식 날 뵙죠.”
“뭐? 잠깐, 결혼식에 초대한다고는….”
루이스는 아르제오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흔들며 자리를 벗어났다.
레이라의 지시로 공작가 사람 하나가 배를 띄워 루이스를 바래다주러 함께 떠났다.
루이스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아르제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쭈그리고 앉았다.
“왜요, 정말 초대하지 않으려고 하셨습니까? 저와 필은 불러 놓으시고?”
유진이 조금 불퉁한 얼굴로 물으니 아르제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유진, 아까부터 어쩐지 태도가 불손하군. 뭐 때문에 삐진 거야. 내가 널 두고 혼자 공작령으로 와서?”
“제, 제가 무슨…. 됐습니다, 말해 무엇합니까.”
고개를 홱 돌리면서도 꿍얼거리는 유진을 보며 아르제오가 픽 웃었다.
“…유진, 저를 질투하는 건 아니죠?”
“공녀님마저 이러실 겁니까!”
레이라의 진지한 질문에 유진은 얼굴이 벌게져서 반박했다. 그런 유진의 반응에 그녀와 아르제오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걱정하고 계실 테니 물은 겁니다.”
이어진 유진의 말에 아르제오는 조금 쓰게 웃었다.
루이스만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면, 마치 아르제오가 그만 초대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리되면 리히덴에서 로렌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테고, 황제 또한 태도가 달라질 테니까.
하지만 레이라와 그다지 좋은 감정이 아닌 로렌스를 결혼식에 부르는 것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두 황자를 모두 결혼식에 부르게 되면, 황제의 화를 피하지 못할 터였다.
“황궁에 초대장이라도 보냈다가는 결혼식은 리히덴에서 치러야 한다고 난리를 치실 것이 뻔해.”
그뿐만이 아니다. 포레스티아를 손에 넣기 위해 아르제오를 황태자 자리에 앉히려 안달일 것인데, 둘의 행복한 날에 그런 문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거죠?”
레이라의 물음에 아르제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아무도 오지 못하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루이스가 무턱대고 와 버렸으니 괜스레 로렌스에게 부채감이 들었다.
아르제오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자 레이라가 살포시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의 결혼식에 제오의 가족이 오지 않는 건 저도 마음에 걸렸어요.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리히덴의 황제가 포레스티아령을 탐내는 거라던가, 정치적인 것들을 제외하고. 그저 아르제오가 제 결혼식에 가족이 오길 바라는지.
그것만을 생각하라고 레이라는 덧붙였다.
아르제오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고, 곁에 함께 있던 유진은 꽃씨를 더 받아 와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비켰다.
레이라는 어수선한 주변을 훑고는 아르제오를 이끌고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거대한 나무 뒤로 두 사람이 숨어들면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그를 데려간 레이라는 곧장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괜찮아요, 제오.”
“…….”
“다른 거 다 신경 쓰지 말고, 제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만 생각해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아르제오는 황위 따위에 두 형제가 관심이 없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황제가 누구를 황태자로 세우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예전처럼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그에게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기댈 곳이 형제들뿐이었으므로.
“…그래도 역시 폐하는 부르지 않는 게 좋겠어.”
고개를 젓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안타까움에 그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루이스 형님께서 이미 오셨으니 초대장은 보내 볼게.”
물론 초대장을 보낸다고, 로렌스가 정말 올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렇게 해요.”
그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던 레이라는 품에서 떨어져 나와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아르제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럼, 마저 일하러 갈까요?”
돌아가 마저 꽃길을 만들기 위해 걸음을 떼는 그녀를 아르제오가 재빨리 붙잡아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평소였으면 농담을 주고받으며 밀어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직 머릿속이 복잡할 테니.
게다가 그런 때에 자신을 찾고 의지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욱더 감동적이고 보람찼다.
레이라가 조금 더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자, 곧 아르제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저도요.”
“그때 그 해안가에서 그대를 발견한 게 나라서 천만다행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배시시 웃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르제오가 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자, 마저 일하러 가자. 우리의 결혼식이니 그대가 직접 하고 싶다고 한 일이니까.”
“네, 그래요.”
나무 뒤에서 슬쩍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공작가 사람들은 전부 모르는 척하며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두 사람은 그런 분위기가 어쩐지 더 어색해서 웃어 버렸다.
* * *
온종일 시타델 섬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아르제오는, 늦은 밤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루이스의 보좌관, 믹이 공작저를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그를 만나고 싶다는 믹의 요청에, 집사는 아르제오에게 방문 사실을 전달했다. 이를 들은 아르제오는 믹을 공작저에 들이는 대신 제가 공작저를 나섰다.
“형님께서 날 찾으시는 건가?”
“예, 전하.”
인사도 생략하고 다짜고짜 묻는 말에 믹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앞장서.”
“예.”
레이라에게 얘기를 하고 나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찰나 들었지만, 아르제오는 그냥 믹을 따라나섰다. 제가 저택을 나선 것은 집사가 알고 있으니 별일은 없을 터였다.
루이스는 공작저에서 조금 떨어진 숲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 저를 따로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태도가 매몰차군. 일을 거들다 도망가서 그런가?”
“어차피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요.”
“이곳이 리히덴이 아니라서 그런지, 더욱 거침없군.”
“무엇 때문에 이런 시간에 저를 부르셨습니까.”
어서 본론이나 말하라는 듯한 태도에 루이스가 픽 웃었다.
“나 때문에 괜한 고민을 해서 속이 상한 얼굴이군.”
“아시니 다행입니다.”
아르제오는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표정은 조금 부드러웠다.
“하지만 이미 해결됐고.”
“근심은 형님께서 주시고, 해결은 레이라가 해 줬죠.”
“네가 공녀를 만나 천만다행이구나.”
루이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르제오는 줄곧 마음 기댈 곳이 없었으니.
레이라가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네 결혼 소식은 당연히 리히덴에도 전해졌고, 그 일로 폐하께서 크게 분노하셔서 말이지.”
“드디어 본론을 말씀하시는군요.”
“폐하께는 초대장을 보내지 않을 생각이지?”
루이스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겠지.”
리히덴의 황제는 그들에게 아버지이기보다는 황제였다. 가족이기보다는 황제와 신하였기에, 아버지라는 인식이 희미했다.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포레스티아령을 탐내고 있고 말이다. 레이라는 다른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공작 부부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 초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난 참석할 거고. 이걸로 너와 내 친분을 과시할 생각이다.”
“…….”
“이미 귀족들 대부분이 내게 돌아섰다. 형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신 듯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폐하께서도 결국 날 선택하실 수밖에 없을 거다.”
“…잘됐네요.”
“플로스 상단과 거래를 체결하는 것도 한몫하겠지.”
루이스의 말들은 어쩐지 변명을 늘어놓는 느낌이었다. 부연 설명이 계속되는 듯한.
“그러니, 너는 그만 리히덴에 관한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리고 이어진 말에 아르제오는 그가 왜 이런 말들을 부러 꺼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다.”
“단호하네….”
곧장 돌아온 대답에 루이스는 픽 웃어 버렸다.
두 형제의 관계가 긴 시간 아르제오를 괴롭혀 왔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서는 더 이상 그것에 연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리히덴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아르제오는 씩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이어 말했다.
단호하게, 마치 제 스스로도 되뇌는 듯이.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전 이제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