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레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제오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하는 수 없네요.”
얕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아르제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어? 안 해 주려고?”
쪽.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레이라는 기다렸다는 듯 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제 됐죠?”
“부족한데.”
“그래도 안 돼요. 이제 그만 섬에 다녀와야 하니까요.”
“아까는 나한테 내는 시간은 없어도 만들 거라더니.”
“만들고 있잖아요.”
어깨를 으쓱인 레이라는 곧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르제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가요. 오늘은 가는 길에 꽃씨를 섬에 가져다 놓을까요?”
아르제오는 픽 웃고는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 * *
두 사람의 결혼식에 복잡한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넘치는 꽃씨는 시타델 섬으로 가져다 놓았다. 꽃을 가득 피워,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었으니.
아르제오의 서신을 받고 제일 먼저 공작령으로 달려온 건 필이었다. 마치 벼르고 있던 사람처럼 말이다.
아르제오는 분명 벼르고 있었을 거라고 했지만.
정식 입국 절차를 받고 공작령으로 들어온 필은, 한 차례 두 사람과 만난 이후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 날까지는 돌아오겠다고 사라졌는데, 발루아 탐방을 즐기는 거라고 아르제오는 말했다.
그리고 성큼 가까워진 결혼식을 위해, 오늘은 함께 꽃길을 만들러 섬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똑똑.
“제오, 저예요.”
그녀의 목소리에 아르제오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좋은 아침.”
“준비는 다 됐죠? 그만 섬으로 갈까 해서요.”
“벌써?”
“네.”
조금 의아한 듯 묻는 아르제오에게 레이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요. 이제 식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가 싱긋 웃었다.
오전엔 주로 레이라가 서류 업무를 하는 시간이라, 방해되지 않도록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결혼식 준비를 위해 이른 시간부터 섬으로 함께 가니 종일 둘만 있을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아르제오의 생각이었지만.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둘은 함께 저택을 나섰다. 섬으로 갈 때 탈 배가 있는 바다로 나갔더니, 그곳에 이미 선객이 와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벌써 와 계셨네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아르제오는 입을 떡 벌렸다.
“오랜만이네, 내 동생. 잘 지냈나?”
“이게 어떻게 된….”
흔들리는 아르제오의 시선은 곧 레이라를 향했다. 정작 그녀는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지만.
“정식 입국 절차를 밟고, 섬을 살펴보러 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르제오에게 현 상황을 설명해 준 건 루이스와 함께 있던 유진이었다.
“넌 조금 더 늦게 도착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시키셨어요.”
유진이 조금 뚱한 얼굴로, 하지만 공손히 루이스를 가리켰다.
“그대는 알고 있었어?”
아르제오가 고개를 홱 돌려 레이라에게 물으니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진이 오는 건 몰랐어요.”
“형님이 오시는 건 알았네.”
“제가 초대했으니까요.”
“…싫다고 했는데.”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작게 중얼거리자, 레이라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하지만 약초가 자라는 환경을 소비자가 보고 싶다고 한다면, 보여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잠깐만. 싫다고? 내가 오는 게 싫다, 이건가? 왜?”
아르제오의 말에 충격받은 루이스가 입을 떡 벌리며 물었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정말 두 사람이 보이지도 않는 건지 아르제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레이라를 끌어안았다.
“오늘은 종일 둘만 있는 줄 알았는데.”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루이스와 유진의 표정을 힐끔 본 레이라가 아르제오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밤에 둘이 있어요, 네?”
“…그래.”
눈을 도르륵 굴리며 고민하던 아르제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전히 누가 있든 상관 안 하시네요.”
“신경 쓸 필요 있어? 여긴 리히덴이 아닌데.”
얕은 한숨을 내쉬는 유진에게 아르제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에 루이스가 호쾌하게 웃으며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출발할까요?”
그만 가자며 등을 떠미는 레이라 덕에, 그들은 얌전히 작은 배에 올랐다.
절벽이 둘러싸고 섬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오직 하나인, 요새와 같은 시타델 섬.
그 신비로운 땅을 직접 볼 수 있을 줄 꿈에도 몰랐던지라 루이스는 감회가 새로웠다.
유일한 길을 따라 섬 안쪽으로 들어서니, 놀랄 만큼 거대한 나무들이 섬을 둘러싸고 있었다.
고개를 젖혀 나무를 올려다보며 가까이 다가간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나무를 매만지며 물었다.
“나무가 지나치게 큰 것 아닙니까, 공녀님? 신기하네요.”
“시타델은 특별한 기운을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 이곳에서 제가 키운 약초들은 뛰어난 약효를 가지고 있어요. 이 나무도 그렇게 특별한 힘으로 크게 자란 거랍니다.”
미소를 머금고는 제 주변 나무를 살피는 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진심으로 식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다.
“정말 신기한 섬이군요.”
“좀 더 둘러보실래요? 아니면 약초밭을 보시겠어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려 고개를 돌리던 루이스는, 섬의 커다란 저택을 발견했다.
“…여기, 공녀님이 하사받기 전에는 유배지로 쓰이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번듯한 저택인데요?”
혹시 발루아 제국에서는 죄인에게 저런 집을 제공하는 건가.
“레이라가 이 섬을 하사받고 나서 완공된 저택입니다.”
“오-. 그런 거군.”
번듯한 저택을 둘러보던 루이스가 현관 쪽으로 다가가자, 아르제오가 그 앞을 막아섰다.
“약초밭이나 둘러보시죠?”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의 태도에 루이스가 픽 웃어버렸다.
“내 아우는 경계를 늦출 줄 몰라서 정말 곤란해.”
“약초밭은 이쪽입니다, 두 분 황자님들. 공녀님이 기다리시니 서두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쪽은 으르렁거리고, 한쪽은 그걸 즐기는 두 사람을 보는 유진의 표정은 뚱하기만 했다.
유진의 재촉에 두 사람은 저택을 등지고 레이라를 따라 걸었다.
시타델 섬은 한때, 죽음의 섬이라고까지 불렸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푸르르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어색할 만큼 싱그럽기만 한 곳으로 느껴졌다.
새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오고, 바람이 솔솔 부는 푸르른 섬. 그곳을 누가 죽음의 섬이라 부를 수 있을까.
거대한 나무들을 지나쳐, 저택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약초밭이 나왔다.
새벽부터 먼저 나와서 일하던 호엔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수고가 많아요, 호엔.”
호엔은 새벽같이 섬에 들어와 레이라가 올 때까지 약초를 살폈다.
이 섬에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했다.
그녀가 섬에 오고 나면, 쓸 수 있는 약초를 재배하고 그것들을 공작가 사람들과 배에 실었다.
레이라가 섬을 떠나기 전 듬뿍 그녀의 힘을 땅에 쏟아내면, 식물들은 다음 날에도 싱그러웠다.
레이라의 미소에 호엔이 제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다지 하는 일도 없는걸요.”
오늘은 레이라가 미리 손님을 모시고 방문할 거라고 귀띔해 주었으니, 먼저 섬으로 들어와 약초밭 주변을 멀끔히 정리하고 있었다.
“오오, 훌륭한 약초밭이군요.”
“감사합니다.”
루이스는 물론, 유진까지 감탄하며 약초밭을 바라보았다.
“정말 훌륭하네요.”
“고마워요, 유진.”
유진은 놀란 눈으로 약초밭과 레이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필의 온실은 약초들을 위한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는데, 약초들의 상태가 아주 좋았다.
물론 레이라의 힘이 있다면 굳이 다른 설비가 필요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새삼 그녀가 얼마나 엄청난 힘을 가졌는지 실감 나서 유진은 멍하니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어떠신가요? 약초가 자라는 환경을 확인하시고 거래를 진행하고 싶다 하셨는데.”
두 사람의 반응에 레이라는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그럴 만한 능력이기도 했고.
“곧장 거래를 진행하고 싶군요. 사실 약초밭은 핑계고, 시타델 섬을 한번 보고 싶었거든요.”
“아, 하지만 약초밭 핑계가 아니었으면 아무리 전하의 부탁이어도 거절했을 거예요.”
레이라가 생글 웃으며 대답하자 루이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제오가 탐탁지 않아 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슬쩍 아르제오를 힐끔거렸다.
루이스가 나타난 시점에서부터 계속 불퉁한 얼굴이던 그의 입매가, 의지와 상관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참 쉽네, 내 동생.’
무미건조한 눈으로 아르제오를 보던 루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거래를 진행하기 전, 약초밭의 환경을 보고 싶다는 말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리 모셨죠.”
“제가 아주 훌륭한 핑계를 골랐군요.”
“그런 셈이죠.”
“친히 약초밭을 보여 주셨으니, 플로스 상단으로 정식 제안서를 보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전하.”
약초밭을 보고 난 뒤, 루이스는 섬을 조금 더 둘러보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레이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조금 더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을 이 섬에서 한다고 했나? 소수만 불러서.”
“예.”
루이스의 물음에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참 별나다니까. 제국의 황자씩이나 되면서 그런 소소한 결혼식이라니.”
“애초에 그런 화려한 걸 즐기지도 않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신경 안 씁니다. 레이라가 기쁘면 그걸로 됐으니까요.”
“의외로 낭만적인 구석이 있네.”
“지금까지는 그럴 경황이 없어서 모르신 것뿐이죠. 전 원래 낭만적입니다.”
멀쩡한 얼굴로 저런 소리를 하니 루이스는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섬을 가볍게 산책하듯 둘러본 그들은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 이제 시타델은 다 둘러보셨으니까 일을 시작할까요?”
레이라의 말에 아르제오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러네. 안내해 줬으니 그 값을 받아야지?”
“그렇죠?”
두 사람의 대화에 루이스와 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레이라는 환하게 웃으며 그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 꽃길을 만들러 왔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