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로라가 조용히 레이라에게 말했다.
“아르제오 님도 알고 계세요.”
그 말에 그녀는 조금 쓰게 웃었다.
“디자이너를 추천해 달라는 말에 제가 리스트를 드렸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보신 모양인지, 어째서 마담 마르첼라가 리스트에서 빠졌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랬구나.”
“거짓을 고했다가는 괜한 오해를 하실 테니까요.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잘했구나.”
속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니까.
치수를 다 재고 디자인에 이것저것 추가하던 마르첼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게 그러시더라고요. 공녀님께서는 어차피 어떤 드레스를 입어도 잘 어울리실 테니, 그저 가장 실력이 출중한 디자이너를 찾고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마침, 제가 제일 실력 있고요.”
오만하기보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더 아름다운 드레스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요.”
“예. 공녀님이 행복하신 만큼 더욱 아름다우실 테니, 그에 어울리는 드레스로 만들라고 말이죠.”
그 말에 레이라는 작게 웃었다.
‘못 말린다니까….’
어쩐지 그런 닭살 멘트를 듣게 한 마르첼라에게 조금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번 드레스는 공녀님 분위기와 어울릴 것들로 준비했어요. 전에는 화려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거든요.”
“기대되네요.”
부드럽게 웃는 그녀를 보며, 세 사람은 치수를 다 재고 액세서리까지 살펴보았다.
주로 로라와 마르첼라의 대화가 이어졌고, 레이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결국 집사에게 불려 나간 아르제오는 마르첼라가 돌아갈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짐을 꾸린 직원들이 먼저 방을 나서고, 마지막으로 걸음을 떼려던 마르첼라가 다시 레이라를 돌아보았다.
“이런 말, 실례일 수도 있어서 하지 않으려 했는데요.”
“네?”
“이번엔, 정말로 행복해 보이시네요.”
마담의 말에 레이라가 찰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녀님을 보니, 저도 힘이 나서요.”
“…고마워요.”
얼떨결에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마르첼라는 픽 웃고는 방을 나섰다.
후에 로라에게 들은 얘기로는, 마르첼라도 이혼 경력이 있다고 했었다.
세간의 시선이 차가운 것도 있어서 더욱 일에 매진하다 보니, 지금의 위치까지 올랐다고.
하지만 마르첼라는 다시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레이라도 아마, 아르제오를 만난 게 아니라면 결혼이라는 선택을 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르첼라가 돌아가고 나서야 아르제오가 돌아왔다. 물론, 레이라는 섬으로 나설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약초 보러 갈 거지? 같이 가자.”
“좋아요.”
함께 저택을 나서며 레이라가 물었다.
“꽤 오래 걸렸네요. 무슨 일이었어요?”
“응? 아, 결혼식 때문에. 장소와 하객 문제를 집사가 도와주고 있거든.”
“장소요?”
“응. 장소는 아직 비밀이지만.”
검지를 곧게 세워 입술에 댄 아르제오는, 묻지도 않았는데 비밀이니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딱히 물어볼 생각이 없었는데도 어쩐지 물어보고 싶어지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눈을 깜박인 레이라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알겠어요, 그럼.”
“왜 더 궁금해하지 않는 거야.”
“궁금해하길 바라는 표정이라서요.”
“그럼 더더욱 그렇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지금은 어쩐지 심술부리고 싶은 기분이에요.”
그렇게 말한 레이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 * *
상단 플로스는 단숨에 온 대륙의 관심을 받았다.
더 비싼 값을 낼 테니 자신들에게 약초를 먼저 팔라며 아우성치는 곳들이 넘쳐났다.
레이라는 오전에는 서류 업무를, 오후에는 아르제오와 섬에 약초를 돌보러 가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일전에 마르첼라에게 제작을 맡긴 드레스도 곧 완성될 터였다.
“그럼, 이쪽 일은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네, 부탁해요.”
젬마가 보고를 마치고 나가는데, 곧이어 아르제오가 레이라를 찾아왔다.
“아, 제오.”
그를 발견한 레이라는 곧장 펜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기다렸던 듯 반기는 모습에 아르제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기다렸어?”
“오늘은 제오가 더 바빴으니까요, 어제부터.”
레이라가 싱긋 웃으며 말하더니 아르제오의 허리에 손을 둘러 끌어안았다.
“어쩐 일로 적극적이네?”
“너무 바빠서 같이 있는 시간이 부족해요.”
“나도.”
그가 가만히 등을 토닥이니 레이라는 안정감을 느꼈다. 눈을 감고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오늘도 섬에 다녀올 거지?”
“같이 갈래요?”
“그거 좋지.”
“그래도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래요.”
어쩐 일로 어리광부리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은 뭔가 다르네.”
“이런 날도 있는 법이에요.”
“그런데, 지금 잠깐 시간 있어?”
“그럼요. 없어도 지금은 만들어서 제오와 함께 있을 거예요.”
당연하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아르제오는 못 이기겠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그녀를 떼어놓고는 두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오늘 작정하고 날 유혹하는 거야?”
“그렇게 느껴져요?”
“응.”
“그럼 그런가 봐요.”
배시시 웃는 레이라를 보자 아르제오는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하….”
아쉬움을 가득 안고 입술을 뗀 아르제오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자신을 억누르기 어려운 듯, 그는 레이라를 떼어내며 고개를 푸욱 숙였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앉자.”
그녀를 소파에 앉힌 아르제오는 슬쩍 그녀의 옆자리를 바라보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크흠….”
괜스레 목을 가다듬는 그를 보며 레이라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이지, 아르제오는 어쩜 이리도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애써 미소를 감춘 레이라는 벌떡 일어나 그의 옆자리로 가 털썩 앉았다.
아르제오는 흠칫하기는 했지만, 자리를 뜨지 않고 슬쩍 고개만 돌렸다.
레이라는 살포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얘기를 꺼냈다.
“결혼식 때문에 온 거죠?”
“잘 아네.”
“그럼요.”
미소 짓는 그녀를 바라보던 아르제오가 픽 웃으며 레이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식은, 시타델 섬에서 검소하게 할까 해. 공작가 사람들과 몇 명만 더 불러서.”
“유진이랑 필이요?”
“…굳이 불러야 할….”
“불러야죠.”
“그래….”
아르제오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전 어떻게 해도 좋아요. 제오만 있으면.”
어쩐지 대사를 빼앗긴 기분이라 아르제오는 눈을 끔뻑였다.
“신전에는 식을 올리기 전에 다녀오자.”
“좋아요.”
“식을 올린 이후에는 당분간 섬에서 안 나올 거니까.”
“네?”
“아냐, 아무것도.”
얼버무리는 아르제오를 힐끔거린 레이라는 픽 웃어넘겼다.
“꽃장식이 많은 게 좋겠어요.”
“마침 공작가엔 꽃씨도 잔뜩 있지.”
“그랬죠, 참.”
시타델을 아름다운 꽃들로 꾸미고, 그 꽃들에 둘러싸여 아르제오와 앞으로 평생 함께할 것을 맹세하는 것.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꽃씨들, 혹시 다른 곳에도 심으러 가도 될까요?”
“다른 곳? 어디?”
그 꽃씨는 어차피 레이라의 앞으로 온 것이었다. 제게 물을 필요도 없이 그녀의 뜻대로 해도 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아르제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어차피 어딜 가든 함께 갈 테지만.
“그냥, 다른 나라들이요. 꽃 심는 여행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러네. 괜찮겠네.”
리히덴에서 쫓기는 와중에도 함께 꽃을 심으며 이동하던 때가 떠올랐다.
분명 병사들에게 쫓기고 있었고, 귀족들의 눈도 피해야 했지만, 퍽 즐거웠다.
“여유로워지면 그런 여행도 좋겠네. 하지만 결혼식이 먼저야.”
“저도 결혼이 먼저예요.”
두런두런 주고받던 결혼 얘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니, 아르제오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그럼, 내 얘긴 끝났으니까 이거.”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라는 그가 건네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공작저로 서신이 왔어. 형님으로부터.”
수신인은 루이스였다.
“루이스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인데 왜 저한테 줘요?”
“그대 앞으로 온 거니까.”
레이라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살펴보다가 이내 서신을 펼쳤다.
혹시나 결혼식을 리히덴에서 해야 한다던가, 그녀가 리히덴으로 와야 한다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 들어 있을까 봐 조금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루이스의 서신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플로스 상단과 정식으로, 리히덴 황궁으로서 거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객은 응당, 약초의 상태, 그리고 약초를 키우는 환경을 볼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며 정식으로 입국 절차를 밟고 공작가를 방문할 테니, 부디 시타델 섬을 보여 달라고 말이다.
레이라가 서신을 확인할 동안 잠자코 있던 아르제오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결혼식 시기에 맞춰서 오려고 할 거야. 보고 싶다고 했었거든.”
“하지만 곤란한 거죠?”
“…응.”
아르제오는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스가 결혼식에 참석한다면 로렌스에게 어쩐지 면목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루이스의 목적이 무엇이든, 플로스 상단과 리히덴 황궁의 거래를 이유로 들었으니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확실히 루이스 전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뭐가?”
레이라는 서신을 다시 고이 접으며 미소 지었다.
“만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여 주는 거 말이에요. 시타델 섬.”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네. 약초를 팔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보고 싶다고 요청하면 약초밭 정도는 보여 줘도 되지 않을까요?”
“싫어. 섬은 우리 둘의 공간이었으면 좋겠는데.”
뚱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하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픽 웃었다. 그러고는 서신을 다시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럼 일단, 루이스 전하의 방문만 받는 걸로 하죠. 그건 괜찮죠?”
“별로 괜찮지는 않은데.”
“하지만 반대하지 않을 거죠?”
그녀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불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불만스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뽀뽀해 주면 그냥 넘어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