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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94)화 (94/122)

<94화>

* * *

희망을 잃은 병사들의 앞에, 발루아에서 온 배가 당도했다.

전염병인 만큼, 천으로 얼굴을 가린 의사들과 제국의 병사들이 소수 배에서 내렸다.

이대로 방치될 거라고 여겼던 병사 몇이 놀란 얼굴로 헐레벌떡 부두로 달려갔다.

부두에서 내린 의사들은 곧장 그들에게 물었다.

“환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 저쪽에….”

“당신들은 괜찮은 겁니까? 혹시 몸이 아프진 않으십니까?”

“저희는…. 괜찮습니다.”

“혹시 모르니 나중에 진찰하도록 할게요.”

딱딱하게 말한 의사들은 바삐 움직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그들은 병사의 안내로 환자들이 있는 막사 쪽으로 다가가 일제히 그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포레스티아 공녀님께서 힘겹게 구하신 레벤이라는 꽃잎입니다. 폐하께선 이걸로 환자들을 치료하라 하셨습니다만, 선택은 병사님들께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어째서 치료를 선택하라고 하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의사들은 곧장 덧붙여 설명했다.

“공녀님께서 몸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며 직접 복용하기까지 하셨지만, 연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약입니다. 하지만 병사님들의 상태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르니, 이 꽃잎으로 치료를 바라시는 분들부터 치료를 시작하라 하셨습니다.”

환자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증상이 심하지 않은 이들은 조금 불안함을 내비쳤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들은 당장 치료 의사를 내비쳤다.

의사들은 먼저 치료를 받겠다는 환자들부터 돌보기 시작했다.

증상을 완화 시키기 위해 기존에 복용하던 약과 함께, 레벤의 꽃잎을 달인 차를 마시게 했다.

그렇게 치료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자,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던 이들의 혈색이 좋아졌다.

그러자 망설이던 다른 환자들도 전부 치료를 받겠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하긴, 직접 복용하여 안전을 보장하셨으니 분명 우리도 나을 거야.”

“게다가 포레스티아 공녀님은 특별한 능력이 있으시잖아. 이미 효능이 뛰어난 약초를 공급하시는 걸로 유명하고.”

레이라는 그 약초들 덕분에 로이드에게서 황가 소유인 시타델 섬을 하사받기까지 했었다.

꽃잎이 효능을 발휘하여 환자들의 상태가 호전되면서, 그들 안에서 레이라의 지위는 더욱 치솟았다.

의사들은 도착 직후부터 병사들 치료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면서부터는 항구도시 근처부터 니타 왕국의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둘로 나뉘어 니타 왕국 환자들과 병사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종종, 황궁에서 꽃잎을 더 공급해 주었고, 황궁의의 조수도 한차례 다녀갔다.

황궁의가 꽃잎을 가져다 진행했던 연구 결과를 보고하러 말이다.

조수가 열심히 떠든 이 레벤 꽃잎의 효과에, 전염병에 옮지 않은 병사들도 꽃차를 달라며 애원했다.

니타 왕국의 사람들도 점차 회복되었고, 이 일은 곧 대륙 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 * *

니타 왕국의 상황이 조금 안정될 무렵.

헤레이스가 고심하고 고심하여 경영인 두 사람을 뽑았다. 젬마와 토니.

아무래도 온 대륙을 상대로 약초 공급을 이뤄나가야 하다 보니, 한 명으로는 버거울 것 같았다.

그래서 뽑은 것이 유능한 두 사람이었다.

발루아 제국의 아카데미 출신의 백작가 영애와 평민이지만 우수하여 장학금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토니. 두 사람이라면 분명 훌륭히 상단 운영에 도움이 될 거라고.

똑똑.

“공녀님, 젬마입니다.”

“아, 들어와요.”

젬마는 오늘도 서류를 잔뜩 들고 레이라를 찾았다. 아담한 체형에,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젬마는 똑 부러지는 구석이 있었다.

젬마와 토니는 각각 구역을 나눠, 그 구역의 나라들에 약초 공급을 관리했다.

“말씀하신 대로, 나라 별로 요청하는 약초들과 새 약초들 가격책정 서류들입니다.”

“고마워요, 젬마.”

레이라는 젬마가 책상에 내려놓는 서류를 힐끔 바라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대로 상단을 운영하면서부터는, 약초 요청서가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레벤을 피워낸 사실이 대륙으로 퍼지고, 타국에서는 레이라가 모르는 협약이 이루어졌다.

그녀만이 피워낼 수 있으니, 약초와 꽃잎을 공급받고 싶다면 절대로 그녀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

물론 이 사실을 모르는 건 레이라뿐이었다. 그녀는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니 그런 것까지 알아챌 여유는 없었다.

도저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던, 산처럼 쌓인 서신들도 두 사람을 고용하고 나서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젬마와 토니가 일해 준 덕분에 일 처리가 빨라지니 한시름 덜었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공녀님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그저 귀족가 영애로서 살다가 결혼하면 끝인 삶이, 젬마는 싫었다. 그래서 포레스티아가 자신에게 쥐여 준 이 기회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러고 보니, 추가로 리히덴 제국에서 두 분 앞으로 서신이 왔다고 했어요.”

“그래요? 난 받지 못했는데.”

“아르제오님께서 먼저 발견하시고는 가져가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공녀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두 분 앞으로 온 거니까요.”

젬마의 말에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젬마가 있어서 든든하네요.”

그녀의 칭찬이 젬마는 무엇보다도 좋았다.

“그럼, 공녀님께서 결제만 해 주시면 리스트 올린 왕국들과 거래 조정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레이라는 살피던 서류를 옆으로 치워두고는 젬마가 가져온 것들을 먼저 살폈다.

“이쪽은 요구가 지나치군요.”

“욕심이 과하면 화가 되는 법이죠.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는데도 포기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공녀님의 답신을 직접 받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서요.”

젬마는 레이라의 곁에 서서 그녀가 리스트를 훑는 내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요구가 많은 곳이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곳. 나라 별로 주의해야 할 것들.

“그럼, 이렇게 진행해 줘요.”

“네, 공녀님.”

젬마가 물러간 직후 레이라는 방을 나섰다.

오전 내내 서류들을 처리했으니, 섬에 약초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을 나선 그녀를 재빨리 붙잡는 이가 있었다.

“정말이지. 아침부터 얼굴 볼 새도 없이 바쁘네.”

“제오.”

살포시 손목을 붙잡았던 손은 곧이어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계속 같이 있고 싶어서 공작저로 온 건데 말이지.”

“오전 동안 떨어져 있던 것뿐이잖아요.”

“오전이 이렇게 긴 줄 처음 알았어.”

“제오도 결혼식 준비로 바빴잖아요.”

얕은 한숨을 폭 내쉰 아르제오는 덥석 레이라를 끌어안았다.

“그래. 그러니 더 쓸쓸하지. 우리의 결혼식인데 나 혼자 준비하니 말이야.”

투정 부리는 말투에 레이라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일 처리를 마냥 미룰 수가 없어서.”

“알아. 그러니까 조금은 나랑 있자.”

이제부터 섬으로 약초를 보러 가려던 레이라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럼, 같이 시타델 섬에….”

“안 돼. 이쪽이야.”

함께 가자고 말하려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은 아르제오가 먼저 앞장섰다.

‘조금쯤은 괜찮으려나.’

오후 늦게 섬에 다녀오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며 레이라는 아르제오가 이끄는 대로 향했다.

그는 저택에 마련된 제 방으로 레이라를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안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있었다.

“로라? 거기다….”

로라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이런 곳에서 뵈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죠.”

레이라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디자이너, 마르첼라였다.

“그대가 입을 드레스가 아직이잖아.”

“하지만 아가씨께 맡기면 언제까지고 약초만 돌보시며 뒤로 미루실 테니까요.”

아르제오의 말에 로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쳤다. 마냥 부정할 수 없는 정곡을.

레이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리자, 아르제오가 부드럽게 그녀를 이끌었다.

“이쪽에서 가져온 디자인들이야.”

레이라는 소파에 앉아 세 사람이 내미는 디자인들을 확인했다.

예전에 마르첼라가 가져왔던 디자인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어떠신가요, 공녀님. 마음에 드시나요?”

미소를 머금은 마르첼라의 물음에 레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아, 네…. 다 예쁘네요.”

그녀의 대답에 아르제오와 로라가 더욱 열심히 디자인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쪽이 그녀의 어깨선이 더 잘 드러나니 예쁠 것이라는 둥, 이쪽이 그녀의 분위기에 더 어울릴 것이라는 둥 말이다.

두 사람이 한참이나 의견을 나누고서야 겨우 디자인이 정해졌다. 그러고는 레이라의 치수를 재려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네.”

아르제오의 대답에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집사, 재클린이었다.

“아르제오 님,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집사의 물음에 아르제오가 돌아보자, 레이라가 웃으며 등을 떠밀었다.

“괜찮으니 다녀와요. 이제 치수만 재면 되니까요.”

“금방 다녀올게.”

싱긋 웃은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집사를 따라 방을 나섰다.

“정말이지, 아르제오 님은 곁에 누가 있든 조금도 신경을 안 쓰시네요.”

로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자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그런가?”

“그러신다니까요. 공작 부부께서 계실 때는 안 그러시는 것 같지만요.”

“어머, 그럼 됐죠, 뭐.”

직원이 재는 레이라의 치수를 곁에서 기록하던 마르첼라가 두 사람의 대화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무척이나 사랑받으시는 것 같네요.”

마르첼라의 말에 레이라는 희미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죠.”

아르제오는 무척이나 자신을 사랑해준다. 그러니 다시 결혼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우신가요?”

그 물음에 레이라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걱정스럽지는 않아요.”

그는 그녀가 걱정하게 만드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당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요.”

“저도 이렇게 공녀님을 다시 뵐 줄은 몰랐어요.”

마르첼라는 레이라가 로이드와 결혼식을 올리던 때, 그 드레스를 맡았던 디자이너였다.

제국의 유명 디자이너가 그녀만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마르첼라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르제오는 알고 있을까. 마르첼라가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두 번째 맡는다는 걸.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서 레이라는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마르첼로는 치수를 기록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두 번이나 공녀님의 중요한 드레스를 제게 맡겨 주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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