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레이라와 헤레이스는 초췌한 로이드의 얼굴을 보고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한 박자 느리게 예를 갖추는 두 사람에게 로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거의 쓰러지다시피 앉는 그를 보며, 레이라와 헤레이스는 서로 눈치를 살폈다.
헤레이스는 로이드에게 좋은 감정 따위 없었다. 될 수 있으면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을 만큼 미웠다. 포레스티아가 아끼는 레이라를 가두고, 끝내는 버리기까지 했으니.
그런데 로이드의 얼굴은 그런 헤레이스마저 걱정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폐하…. 괜찮으신 겁니까?”
조금 망설이던 레이라가 물으니, 로이드는 힘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상황에도…. 당신이 걱정하는 것 같으니 맥없이 좋구나.’
스스로가 처량하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레이라의 작은 걱정이 마치 의사에게 약 처방이라도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괜찮다. 별것 아니야.”
그러니 로이드는 희미한 미소로 대답했지만, 두 사람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대야말로, 이렇게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
“폐하의 배려 덕에 무탈합니다.”
그 대답에 로이드는 잠시, 미소만 지으며 아무 말이 없었다.
‘…진작에 이러셨으면 이런 상황도 오지 않았을 것을.’
그런 로이드를 바라보는 헤레이스는 끝없이 이런 생각들을 했다.
이제 와서, 그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두 번은 절대 안 된다고. 진작 이렇게 잘해주시고 위하고, 버리지 않았더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 일도 없었을 거라고.
하지만 막상 저런 표정을 마주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짐을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
로이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저 묻지 않고 이대로 계속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를 마주한 자신은 이렇게 평온한 마음이지만, 그녀는 아닐 것을 알아서.
“폐하, 혹 황궁의도 불러 주실 수 있으신가요?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로이드가 곧장 고개를 끄덕이더니 응접실 밖의 시녀에게 황궁의를 불러오라 일렀다.
황궁의가 응접실에 당도하기까지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는데, 그 순간에도 로이드는 레이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 역시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표정에서 단호함이 읽혀, 로이드는 입안이 썼다.
서로 마주보는 두 사람을 보며, 시선을 돌린 건 오히려 헤레이스였다.
그 잠시간의 침묵이 어찌나 숨이 막히던지.
똑똑.
조금 지나자, 곧 황궁의를 불러왔음을 시녀가 알렸다.
로이드의 허락하에 황궁의가 응접실로 들자, 레이라는 그제야 티테이블에 레벤의 꽃잎을 올려놓았다.
잠시 푸른빛이 도는 꽃잎을 바라보던 로이드는, 그게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는 집어 들어 제 찻잔에 띄웠다.
그 행동에는 황궁의뿐만 아니라, 그 자리의 모두가 놀랐다. 특히나 레이라가.
로이드는 무의식중에 한 행동인지, 스스로도 잠시 당황했다.
“…그…. 종종 차에 띄울 꽃잎을 준비해 주었던 것이 생각이 나서….”
지금은 레이라가 내어주는 차 한 잔을 갈망했다.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한 죄로, 자신은 앞으로 평생 그 차 한 잔을 마실 수 없을 거라고.
그런데 레이라가 눈앞에 꽃잎을 올려놓으니 저도 모르게 집어 제 찻잔에 띄운 것이었다.
예전에 그녀가 늘 자신에게 베풀어주던 그 상냥함에 굶주려,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다들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로이드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물었다.
“…차에 띄우는 것이 아닌가?”
“아…. 공작가의 의사가 그렇게 해도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어요.”
“그렇군.”
로이드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꽃잎을 띄운 차를 머금었다.
그러자 입안에 화한 꽃 향이 퍼지는 기분이었다. 조금 의외여서 눈을 동그랗게 뜬 로이드는 차를 꿀꺽 삼켰다.
이제껏 레이라가 보내주는 말린 꽃잎을 띄운 차도 향이 좋았지만, 이렇게 꽃 향이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
따뜻한 차와 꽃내음이 체내로 들어가자, 줄곧 지끈거리던 두통마저 가시는 기분이었다.
“…무슨 꽃이지?”
차를 마시는 로이드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라가 그의 표정 변화와 물음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로이드는 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레벤의 꽃잎입니다, 폐하.”
“레벤?”
로이드의 중얼거림에 자리에 있던 황궁의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특별히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도 이렇게 이름만 듣고도 이게 어떤 꽃인지 기억해내기 어려울 터였다.
미켈은 공작가 사람인 만큼 꽃과 식물에 관심이 많았지만.
“공녀님, 혹 레벤이 어떤 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고민하던 황궁의가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레벤을 대하는 의사들의 반응은 극명히 나뉘었으니.
전설의 꽃이라며, 꼭 찾아내 환자 치료에 쓰고 싶다거나, 언젠가 발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들. 그리고 황궁의처럼 낭설이라며 아예 믿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는 이들.
어느 쪽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좋은 치료약의 존재를 믿는 의사와 전설보다는 실현 가능한 치료약을 우선시하는 의사가 있을 뿐.
하지만 반드시 어디선가 들어보기는 했을 것이다. 레벤의 이름을.
“자료는 적지만, 약초학 서적에는 한 번쯤 언급되었을 꽃이에요. 생명을 머금은 꽃, 사람이 피워낼 수 없는 꽃이라고요.”
그녀의 말에 레벤이 어떤 꽃인지 떠올린 황궁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테이블에 올려진 꽃잎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푸른색 꽃이라고 서술되어 있기는 했었다.
“이게, 정말…. 그 꽃입니까…?”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시간이 부족하여 아직 연구가 제대로 끝나지 않은 상황이지만, 몸에 해롭지 않은 건 확인했어요. 부디, 니타 왕국에 남은 제국군을 치료하는 데 써 주세요.”
그녀의 말에 로이드는 가만히 제 찻잔에 띄운 꽃잎을 응시했다.
강렬한 꽃 향과 두통이 가시는 느낌. 레이라가 몸에 해롭지 않다는 걸 확인했으니 괜찮을 터였다.
“어떤 꽃잎을 사용한 약인지, 미리 설명하고 자발적으로 치료를 받겠다는 병사들을 우선적으로 치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군.”
제대로 된 연구가 완성되기 전이라 불안하다면 조금 더 기다리도록, 병사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었다.
“아마 이거로는 부족할 테니,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치료에 필요한 만큼 꽃을 피울게요.”
다른 이들을 위해 꽃을 피운다는 말에 로이드는 입안이 썼다. 하지만 그 전쟁마저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자책할 테지.
그러니 이 정도는 허락해야 했다.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 고맙다, 이 일의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하지.”
“보상은 시타델 섬으로 충분해요. 애초에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이 정도는 당연합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발루아가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해도,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게 전쟁이다.
그런 곳에 목숨 걸고 다녀온 사람이니, 레이라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로이드와 레벤의 얘기를 끝낸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폐하께서도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눈 밑이 거뭇거뭇하고, 얼굴이 창백했다. 누가 보아도 아픈 사람의 얼굴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그러기엔 로이드의 얼굴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에 헤레이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휴식은 취하고 계십니까?”
두 사람의 걱정 어린 시선에 로이드가 픽 웃었다.
제가 레이라를 버렸어도 두 사람은 자신을 걱정해 준다. 그것이 황제이기 때문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두통이 좀 있었는데, 이 꽃잎을 띄워 차를 마시니 좀 가시는 것 같군.”
차를 마신 건 조금 전이었다. 그렇게나 효능이 빠른가, 하는 생각에 황궁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궁의의 시선이 다시 꽃잎을 향하자, 레이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약초들과 마찬가지로, 시타델 섬의 기운을 받아 더 뛰어난 효능을 발휘하는 모양이에요. 저도, 이른 아침 이 꽃잎을 띄워 차를 마시고 왔습니다.”
해롭지 않다고 확신하는 그녀가 나서서 먼저 입에 대야, 다른 사람도 안심할 테니 말이다.
그러자 레이라의 말에 이어서 헤레이스가 입을 뗐다.
“공작가의 의사는 방금 폐하께서 하신 것처럼, 따뜻한 물에 우려서 마시는 것을 추천했습니다. 다른 제조 과정을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기도 하고요. 꽃잎 자체를 손상하지 않는 방법이 좋을 것 같답니다.”
“그럼 그렇게 전달하지.”
“이 정도 꽃잎으로는 모자를 테니, 저희는 돌아가 꽃잎을 더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니타 왕국에 남은 병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꺾일 터였다.
그러니 서두르는 것이 맞는데도, 로이드는 레이라가 가는 것이 아쉬웠다. 그렇다고 붙잡을 수도 없었지만.
“일단 이 꽃잎들 먼저, 니타 왕국으로 보내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두 사람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서던 황궁의가 조금 조급하게 레이라를 불렀다.
“저, 공녀님.”
“네.”
“혹시, 이 꽃잎을 조금, 니타 왕국으로 보내는 것과 별개로 제가 연구를 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 눈에는 학구열이 가득 차 있었다.
레이라는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을 나선 황궁의는 곧장 꽃잎을 들고 제 진료실로 사라졌다.
벌써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던 로이드는 두 사람을 공간이동 아티펙트가 있는 곳까지 배웅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폐하.”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니타 왕국의 병이 속히 사그라들기를 바랍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로이드를 보며 레이라는 잠시 망설였다.
그를 대할 땐 말 한마디도 어쩐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괜한 소리를 해서 불필요하게 그 마음을 어지럽힐까 봐.
그래도 발루아의 미래를 위해서는 로이드가 굳건히 바로 서야 했다.
“폐하.”
그녀의 부름에 로이드는 부드러운 표정을 레이라를 마주했다.
줄곧 그러고 싶던 차에 그녀가 불러주었으니.
“부디, 건강 유의하세요. 필요하시다면, 폐하께도 따로 꽃잎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다시는 그녀가 보내는 꽃잎을 받지 못할 거라 여겼었다.
제가 한 짓이 있으니 당연히 그럴 터였다.
‘받을 수 있는 건가….’
그녀의 마음은 더는 일말의 희망도 걸 수 없었지만, 작은 동정심 정도는…. 받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로이드는 어딘지 서글프게,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힘없이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준다면 고맙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