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 *
레벤의 씨앗과 꽃잎을 가지고 돌아온 공작저에는, 엄청난 양의 꽃씨들이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라의 물음에 집사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아가씨께서 수도에 가 계시는 동안 도착한 꽃씨들입니다.”
“이게 왜 도착을 해요? 누가 꽃씨를 주문했나요?”
그녀는 꽃씨를 주문한 기억이 없었다.
그러자 재클린은 공작저 한쪽에 쌓인 꽃씨들 옆에, 마찬가지로 쌓여있는 서신들을 가리켰다.
“아가씨께서 차가르 왕국에서 꽃씨를 찾고 계셨다는 소문이 돌아서…. 온갖 곳에서 도착한 꽃씨들입니다.”
“허….”
아르제오가 꽃씨들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나라에는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니, 그녀의 힘은 너무 위협적이라며 자객을 보내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이들도 있었다.
레이라가 찾고 있던 건 레벤의 씨앗이었다. 차가르 왕국에서 우연히 얻었고.
그런데 종류도 제각각인 꽃씨가 이렇게나 많이 보내지다니.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다.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공작가의 의사와 상의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재클린, 미켈을 내 방으로 불러 줘요.”
“예, 아가씨.”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서고, 머지않아 공작가의 의사, 미켈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가씨, 미켈입니다.”
“들어와요.”
미켈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르제오가 곧장 의사에게 레이라의 손을 보였다.
“이 손부터 좀 치료해 주겠나?”
“다, 다치셨습니까, 아가씨?”
미켈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그냥 조금 찔린 상처예요.”
“연고를 발라 드리겠습니다.”
“내가 하지.”
미켈이 혹시 몰라 챙겨온 가방에서 연고를 꺼내자, 아르제오가 재빨리 그것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가 레이라의 손끝에 연고를 바르는 사이, 미켈은 머쓱한 얼굴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다치셔서 절 부르신 건가요?”
“아, 아뇨.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레이라는 테이블 위에 시타델에서 가져온 꽃잎이 담긴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레벤의 꽃잎이요.”
“레….”
제게 보이려 올려놓은 거니 무심코 손을 뻗던 미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맞게 들은 건지 의심이 되는지, 미켈은 멍하니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네, 그 레벤이요.”
그녀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확인시켜 주고 나서야 미켈의 눈이 쟁반처럼 커졌다.
“저, 정말…. 정말 그 레벤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그, 레벤?”
미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되물었고, 레이라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옅은 푸른빛을 머금은 꽃잎이 잔뜩 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건드리니, 비단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씨앗은 무리가 있을 것 같지만, 이 꽃잎은 약초처럼 약으로 쓰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꽃의 재질을 살피던 미켈은 이내 턱을 매만지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레이라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고, 그동안 아르제오는 줄곧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가씨, 일단은 이 꽃잎을 소량 받아갈 수 있을까요? 연구를 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전설이라 불리는 꽃 레벤. 꽃의 치유 효능이 뛰어나다고 하니, 의사로서 꼭 연구해 보고 싶었다.
“네, 그럼요. 그래서 꽃잎을 넉넉히 가져온걸요. 하지만 시간은 오래 못 줘요. 내일까지 의견 들려 줘요.”
재촉하는 레이라를 보며 미켈은 조금 의외인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니타 왕국에서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레이라에게서 꽃잎을 소량 받은 미켈은 다급히 걸음을 뗐다.
서둘러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의사가 방을 빠져나가고, 남겨진 레이라는 가만히 꽃잎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계속 봐도 신기해?”
아르제오의 물음에 레이라가 픽 웃었다.
“일전에 차에 띄우는 차 꽃잎을 만든 적이 있어서요. 물에 우려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것도 좋은 방법 같네.”
“일단은 미켈을 기다려 봐야죠.”
“그래, 이제 그럼 그 꽃은 그만 놔두는 게 어때?”
“네?”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라가 고개를 돌려 아르제오를 바라보자, 그가 냉큼 그녀의 뺨을 살포시 잡았다.
“이제야 날 보네.”
그러더니 빈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나한테도 관심 좀 가져 줘.”
투정 부리는 말투에 레이라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팔을 둘러 아르제오를 꼭 끌어안았다.
“결혼식, 올리겠다는 서신 보내고 여기서 치를 거야. 발루아의 신전에서 서약도 마칠 거고.”
“정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돌아가고 싶을 리가. 뭐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좀 아셔야지.”
그렇게 말하며 아르제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일이 일단락되면…. 당분간은 시타델 섬에서 조용하게 지내는 게 어때? 둘만.”
그는 유난히 ‘둘만’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아무래도 좀처럼 둘이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이 현저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죠.”
그런 평화와 여유로움이, 두 사람에게는 조금 필요하기도 했다.
“그럼, 빨리 끝내기 위해 어서 레벤으로 니타 왕국에 있는 제국군을 치료해야겠네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 아르제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희미하게 미간을 꿈틀거렸다.
“음…?”
“왜요?”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마 해서 묻는 건데.”
“네.”
“그대가 니타 왕국까지 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르제오의 물음에 레이라가 의아한 듯 눈을 깜박였다.
“안 되나요?”
“당연히 안 되지! 그곳은 지금 전염병 환자들로 가득해. 그대는 이 귀한 꽃을 의사들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르제오가 엄한 얼굴로 얘기하니 레이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알겠어요. 니타 왕국은 이제 제국의 속국일 테니 페하께 꽃을 전달하면 폐하께서 돌보아주시겠죠.”
“…웬일로 고집부리지 않네.”
“제오가 싫다면 저도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아요.”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당연히 죄책감은 있었다. 그런데도 레이라에게는 그들보다 아르제오가 우선이었다.
미켈의 연구를 기다렸다가 꽃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당장 사람이 몇이나 죽어 나갈지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내일 당장 폐하께 꽃을 전해드려야겠어요.”
“그래.”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머리를 제게 기대게 했다. 그러고는 치료한 손을 살포시 붙잡아 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결혼식은, 그대는 어떤 게 좋아?”
레이라는 이미 한차례 결혼식을 해보았다. 오히려 아르제오가 처음이니, 그녀는 뭐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주고 싶었다.
“음…. 글쎄요.”
레이라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대답을 피했다.
“제오는요?”
“나?”
“네, 제오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글쎄…. 난 과하게 화려한 것보다는, 그저 소중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그걸로 좋은데.”
중얼거리듯 말한 아르제오는 레이라에게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대와 있으면 어디서 뭘 해도 좋다는 뜻이야.”
짙은 미소를 머금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레이라가 물었다.
“왜 자꾸 유혹해요?”
“뭐어?”
아르제오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느끼기는 했어?”
“네. 줄곧 그랬어요.”
어쩜 이리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픽 웃은 아르제오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좀처럼 넘어오지도 않으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게 또 결혼이라는 결심을 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레이라가 눈을 흘기며 말하자,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느꼈어? 내가 그대를 유혹한다고.”
그 질문에 레이라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민했다.
돌이켜보면, 종종 아르제오가 유혹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니, 꽤 많았던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르제오는 어쩐지 색기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에 아르제오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그랬던 것 같네.”
그는 사실 처음부터, 레이라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다른 여자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그녀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제오가 유혹할 때마다 심장이 철렁해요.”
“철렁? 떨리는 게 아니라?”
애틋한 추억에 잠겨있는데, 이어진 레이라의 말에 아르제오는 입을 떡 벌렸다.
어디 가서 냉대받는 외모는 아니라고 믿고 있었는데, 심장이 철렁이라니. 떨리거나 설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충격받은 아르제오의 표정에 레이라가 얼른 웃으며 덧붙였다.
“가끔이요. 제오가 유혹하듯이 웃으면, 심장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아요.”
“…좋은 거지?”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제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렌다는 뜻이잖아.”
“하지만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더 큰걸요.”
두 사람은 한참이나 더 ‘설렘’과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라는 느낌에 대해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에는 서로의 모습이 우스워 웃어 버렸지만 말이다.
* * *
다음 날, 밤새 꽃잎을 조사한 미켈의 대답을 듣고, 레이라는 헤레이스와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알현 요청에 로이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레스티아의 알현 요청은 시간이 몇 시든, 어떤 상황이든 제게 먼저 알리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로이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느꼈지만, 그래도 저를 찾는 레이라를 볼 기회가 이제 없으니 마다하지 않았다.
로이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 오늘은 모두 물리시고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용안이 좋지 않으십니다.”
안내하던 시종장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괜찮다. 그러니 조용히 가지.”
로이드는 지금, 그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어떤 작은 소음도 두통을 자극하는 것 같아서.
여전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로이드는 눈 밑까지 거뭇거뭇했다.
시종장이 저리 말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만큼 로이드의 상태는 좋지 않았고, 그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니 더욱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 두통도, 울렁거리는 속도.
‘당신을 보면 다 괜찮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