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막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이번 일은 누님의 고집을 꺾을 수 없겠네요.”
레이라를 잘 아는 헤레이스는 이미 포기한 듯했다.
이마를 짚은 아르제오는 순순히 레이라를 따라 저택으로 돌아갔다.
헤레이스는 곧장 공작령으로 돌아갈 준비를 지시했고,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씨앗만을 챙겨 먼저 출발했다.
그리고 수도로 올라올 때와는 달리, 공작령으로 돌아갈 때는 공간 이동 아티펙트를 사용했다.
수도로 오는 길에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으나, 돌아갈 때는 한시가 시급했다. 전염병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 제국군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씨앗을 챙겨 공작령으로 돌아간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곧장 시타델 섬으로 향했다.
섬에는 레이라가 직접 약초들을 부탁한 호엔이 미리 와 있었다. 매일매일, 약초를 성심성의껏 돌보고 있었으니.
하지만 레이라가 사라지고 시간이 오래 지나자, 조금씩 식물들이 생기를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쉰 호엔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약초들을 바라봤다.
‘빨리 돌아와 주세요, 공녀님…!’
그리고 그런 호엔의 바람이 닿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라와 아르제오가 시타델에 도착했다.
섬으로 들어선 두 사람을 발견한 호엔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공녀님! 돌아오셨군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호엔이 양손을 모으고 호들갑을 떨었다.
“약초에 문제라도 있나요?”
“한동안 괜찮았는데, 공녀님이 자리를 비우신 시간이 오래되니 점점 시들해집니다. 어떻게 해도 나아지질 않아서….”
호엔이 울먹이면서 하는 말에 레이라는 곧장 약초밭 쪽으로 걸음을 뗐다.
점점 시들해지는 약초밭으로 다가선 그녀가 땅을 짚고 힘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점점 시들해지던 약초들이 다시 생기를 머금었다.
“오오…!”
곁에서 지켜보던 호엔이 감격하여 무심코 손뼉까지 쳤다.
약초들을 돌본 레이라는 노파에게 받은 씨앗을 들고 아르제오와 둘이서 섬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의 한적한 땅. 주변을 살핀 레이라는 그쪽으로 다가서 자리를 잡았다.
레벤의 씨앗은 하나. 다시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긴장되었다.
긴장한 그녀를 아는 듯 아르제오는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별것 아닌 한마디일 텐데도 마음이 놓였다.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흙을 파고 그 안에 레벤의 씨앗을 놓았다. 흙을 덮고 두어 번 토닥인 뒤, 곧장 땅에 손을 올리고 힘을 불어넣었다.
청록빛이 땅으로 스며들었지만, 땅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피어나지 않아요.”
레이라의 얼굴에 절망감이 스치자, 아르제오가 덮었던 흙을 파헤쳤다.
레벤의 씨앗은 처음 형태 그대로 있었다.
“왜 피어나지 않지….”
“그러게. 그대의 힘이라면 피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레이라는 다시 씨앗을 들어 유심히 살폈다.
생명의 꽃, 생명을 머금은 꽃, 생명을 주는 꽃. 기적의 꽃.
레벤을 상징하는 수식어는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밝혀진 건 없었다.
“음…. 땅에 피우는 게 아니라던가?”
“그럼 어디에 피워요?”
“…물?”
두 사람은 무엇 때문에 레벤을 피우지 못하는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레이라는 씨앗을 집어 들고는 빤히 응시했다. 얼핏 보면 보석의 파편으로 보일 것만 같은 모양.
그 마름모꼴을 손끝으로 붙잡고 있는데, 저도 모르게 조금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앗.”
“응? 왜 그래?”
씨앗을 집은 손끝에서 피가 한 방울, 씨앗으로 스며들었다.
따끔한 감각에 씨앗을 놓친 레이라의 손을 아르제오가 낚아챘다.
“상처 났어?”
“그렇게 세게 집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금세 얼굴에 걱정이 가득 담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레이라는 재빨리 다시 씨앗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씨앗이 희미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어?”
다시 씨앗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생명을 머금은.’
제 피를 머금더니 빛을 발하는 씨앗.
‘혹시….’
레이라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대로 씨앗을 다시 심었다.
“어, 다시 심는 거야?”
아르제오의 물음에 고개만 살짝 끄덕인 레이라는 이번엔 양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평소 식물을 키울 때 불어넣는 것보다 배가 되는 힘을 땅으로 불어넣었다.
평소라면 힘을 불어넣으면, 곧장 새싹이 피어오르고 자라났다. 이렇게 힘을 불어넣는데도, 몇 초간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그만둘 뻔했다.
손을 거두기 직전, 땅에서 새싹이 피어올랐다.
그걸 발견한 레이라는 신이 나서 더욱 힘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아주 작게 피어오른 줄기는 점점 자라나고, 곧 꽃봉오리가 맺히더니 꽃이 피어났다.
푸른 빛을 머금은 꽃. 푸른색 꽃잎이 소복한 꽃이었다.
생명을 머금은 꽃이라 불려서 그런지, 그 아름다움에 황홀감마저 느껴졌다.
정말, 정말 이걸 제가 피워냈구나, 싶어서.
레벤의 존재를 알고 나서부터는 줄곧 꿈꿔 왔었다. 전설이라고까지 불리는 꽃을 피워내는 이 순간을.
그 감격스러움을 가슴에 새긴 레이라는 곧장, 꽃으로 손을 뻗었다.
이빨을 세운 것처럼 날카롭던 씨앗과는 다르게 꽃잎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가만히 그걸 매만지던 레이라는 꽃에게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
그러고는 소복한 꽃잎을 따서 하나하나, 레벤의 씨앗으로 만들어 늘렸다.
피어났던 레벤은, 꽃잎을 모두 잃으니 소임을 다 한 것처럼 스러졌다.
한 송이에 꽃잎이 많이 달린 만큼, 레이라의 힘으로도 원상복구 시킬 수는 없었다. 다만 꽃잎을 남기고 스러졌으니, 그 꽃잎으로 그녀가 새로운 씨앗을 만들었다.
다시 씨앗을 그냥 심어 보았지만, 피를 머금지 않은 씨앗은 꽃피우지 않았다.
레이라가 꽃에 열중하여 제 손끝으로 피를 머금게 하고 레벤의 꽃을 피우는 동안, 아르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꽃을 잔뜩 피운 레이라는 꽃잎을 따서 반은 씨앗으로 만들어 챙기고, 반은 꽃잎을 고이 챙겼다.
볼일을 끝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르제오가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제 끝났어?”
그런데 눈빛이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았다.
“제오, 화났어요?”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으니, 그는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그대 손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까.”
아르제오가 살포시 붙잡은 제 손을 내려다보니, 씨앗에 피를 머금게 하려고 찌른 자국이 가득했다.
“아…. 이렇게까지 한 줄 몰랐어요.”
“그랬겠지. 그대는 정말이지, 왜 그대 몸을 아끼지 않아?”
서운한 티를 내며 아르제오가 그녀의 손을 손수건으로 살포시 눌렀다.
“돌아가면 바로 치료하자.”
그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며 레이라는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용케 말리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네요?”
그 물음에 아르제오는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열중하는 모습이 예뻐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봤다. 손끝에 상처를 내 피를 흘리는 걸 보면서도, 표정은 더 없이 생기가 넘쳐서.
뚱한 표정에,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레이라는 어쩐지 그 말에 두 뺨을 붉혔다.
“제오가 그런 말을 하니 설레네요.”
“뭐? 진짜? 맨날 나만 설레고 그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은 아니죠.”
레이라의 대답에 아르제오가 살포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물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겠지. 그대는 그런 표정을 자주 드러내지 않으니까.”
레이라는 제 표정이 어떤지 몰라서 눈을 도르륵 굴렸다.
“가끔 이렇게 뺨을 붉히면 지나치게 사랑스럽지만.”
쪽.
갑작스럽게 입을 맞추는 아르제오 때문에 레이라가 눈을 크게 떴다.
“기습적으로 다가가도 표정이 좋고.”
놀란 표정의 레이라는 곧 눈을 가늘게 뜨며 아르제오를 살짝 밀어냈다.
“어어, 손 때문에 밀면 안 돼.”
그는 레이라의 상처 난 손 핑계를 대며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 * *
다 쓰러져 가는 나라. 니타 왕국의 항구도시에 남은 발루아 제국군은 그곳을 그렇게 불렀다.
부상당한 병사들은 왕성에서 항구도시까지 이동한 것이 겨우였다. 그 이상 이동했다가는 정말 모두가 죽을 터였다.
제국군 대부분은 환자와 함께 니타 왕국에 남았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로이드와 함께 발루아로 돌아간 건 일부였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을 자축하던 짧은 찰나가 지나니, 병사들은 전부 활기를 잃었다.
황제가 정말 자신들을 다시 발루아로 데려갈까, 하는 의구심이 서서히 병사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옮아 움직이지도,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는 이들. 게다가 치료할 방법도 없다고 여러 의사가 말했다.
환자 호위 명목으로 니타 왕국에 남아 있었지만, 병이 옮으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환자들을 돌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방치된 환자들의 상태는 나날이 악화하였고, 점점 희망을 잃어갔다.
황제의 뜻에 따라 타국까지 와서, 최전방에서 전투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전염병이 옮았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의욕을 잃은 병사들은 환자들의 막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늘어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우리가 다 죽은 다음에 시체 수거하러나 오시겠지.”
“환자들은 몰라도, 우리는 멀쩡하면 다시 데리고 돌아가겠지.”
“귀환을 명하지 않으신다면, 우린 여기서 평생 썩겠지. 니타 왕국도 이제 발루아의 속국이니 여기서 지내라고 하실 수도 있잖아?”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도 마라. 소름 돋는다.”
우스갯소리 취급했지만, 모두가 내심 불안했다.
이렇게 불평하는 이들도, 그리고 황제가 올 거라고 믿는 이들도.
환자를 돌보고 돌아오던 병사 몇이, 그들을 지나치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시간 낭비만 하다가, 폐하께 무슨 변명을 하려고?”
“다시 돌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런, 질병이 들끓던 땅에서? 폐하께서 돌아오라고 해도, 남아 있던 제국민이 전염병 취급할 텐데?”
병사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사실일 테니. 하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닐 터였다.
“제국을 위해서 전쟁에 출정했던 우리다. 모두가 그렇게 보지는 않아.”
“제국을 위해서? 포레스티아 공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비아냥거리는 말에 그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들도 이 전쟁을 포레스티아 공녀의 복수로 여겼으니.
“…폐하께서 반드시 환자까지 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겠다고 하셨다. 평소 그런 말씀을 하시던 분이 아니니,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사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니 이건 무의미한 말다툼이었다.
병사는 뱃속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툭 내뱉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