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 *
포레스티아 공녀를 암살하려 한 죄로, 니타 왕국은 참혹한 결말을 맞이했다.
전투 의지가 없는 이들은 포로로 붙잡혔으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발루아 제국군이 니타 왕국의 왕성까지 가는 데는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나라의 대부분이 전염병으로 초토화된 상태였으니, 제대로 된 전투는 왕성을 둘러싼 곳에서 처음으로 치러졌다.
마치 왕국의 다른 모든 지역은 버리고 왕성만을 고집한 듯 그곳에서는 조금 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국군은 왕성 진입에 조금 시간을 들였다. 니타 왕국은 그곳에 마치 모든 전력을 쏟아붓는 듯했다.
“진입하라!”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니타 왕국의 기세는 줄어들었고, 제국군은 물 밀듯 거세게 공격했다.
그렇게 왕성 문을 지나는데.
촤악.
“으아악!”
앞서 왕성으로 들어서던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상황인가!”
로이드의 지시에 기사단장이 상황을 파악했다.
왕성으로 진입했던 병사들 대부분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기세 좋게 전진하던 병사들은 성문을 넘어서자마자, 위에서 쏟아지는 핏물을 뒤집어썼다.
“으아악!”
그에 혼비백산한 사이 일제히 공격해서 병사들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누구는 그저 붉은 물감을 푼 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는데, 누구는 정말 새빨갛고 끈적한 피를 뒤집어썼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혼란이 일어난 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단 물러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성 입구에서 대혼란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기사단장의 말에 로이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후퇴! 전원 후퇴다!”
니타 왕국에 들어서고 나서 그들에게는 첫 후퇴였다.
그 일 이후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제국군의 진영으로 돌아온 군대는 곧장 부상자 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일이 터진 건, 하룻밤이 지난 다음이었다.
부상자들이 몸에 힘이 없다며 전혀 일어나지 못했다.
“상황은 변함이 없는가.”
“예, 폐하. 전날 부상을 당한 병사들 전부 아예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요. 하지만 부상자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병력 자체가 발루아가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실력 차도 있으니 전쟁의 결말은 뻔했다.
“부상자의 수가 아직 적으니, 빠르게 전쟁을 끝내는 게 좋겠군. 저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예, 폐하.”
그리하여 진영에 부상자를 남겨 두고, 진영을 지킬 최소 인원을 남겨 둔 채로 왕성을 무너뜨렸다.
성문으로 들어섰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다른 경로로.
로이드는 정예기사 몇과 따로 움직여 지체 없이 국왕의 목을 베었다.
니타 왕국은 발루아의 손에 처참히 무너졌다. 포레스티아 공녀를 죽이려 한 일 때문에.
* * *
처음 눈을 떴을 때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상처가 너무 아파서.
레이라가 열심히 길러서 공급했던 약초들은 의사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위해 썼다.
효과가 뛰어난 약초로 만든 약을 바르고, 휴식을 취하니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그사이 출정했던 제국군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승리를 거둔 것과 별개로, 제국군의 귀환이 자꾸만 늦어졌다.
“이스, 오늘도 도착하지 않았니?”
“예, 누님. 아직도 니타 왕국을 떠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오래 그곳에 머무는 거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아르제오가 입술을 비죽이며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기다려? 이겼으니 곧 돌아오겠지. 거기에 새로 제국을 세울 것도 아니잖아.”
투덜거리는 아르제오를 헤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형님께선 질투가 많으시군요.”
“그런 편이지. 근데 그거 알아? 질투는 말이야, 숨겨야 할 감정이 아니래. 연인이라면 상대가 질투를 느끼지 않게끔 하는 것이 예의라던데?”
그렇게 말하며 아르제오가 레이라를 빤히 응시하니, 눈치 빠른 헤레이스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맞는 말이네요.”
“제오는 너무 모든 것에 질투를 느끼잖아요.”
“상대가 황제라면 얘기는 다르지.”
아르제오는 유난히 로이드를 경계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헤레이스로서는, 그 마음도 이해는 됐지만.
건강을 위해 약초를 달인 차를 마시던 레이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에요. 마음이 좋지 않으니까 신경 쓰이죠.”
“엄연히 따지자면, 그대 때문이 아니라 먼저 손을 댄 니타 왕국 탓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지 마.”
질투에서 시작된 대화는 어째서인지 자책하지 말라는 위로로 바뀌어 있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사이에 끼어 있었지….’
함께 차를 마시던 헤레이스는 어기적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신다니,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고마워, 이스. 부탁할게.”
헤레이스가 방을 나가자, 아르제오가 그녀에게 찰싹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옷에 가려진 그녀의 배 쪽을 힐끔 바라봤다.
이 가녀린 허리에, 상처는 아물고 있었지만, 흉은 남을 거라고 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아르제오는 그녀의 배 언저리를 매만졌다.
“아파?”
“이제 괜찮아요. 제가 키운 약초의 효능을,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레이라의 말에 아르제오는 조금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녀의 배를 응시했다.
그때, 제가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냥 번쩍 안고 마차를 부르러 갔더라면.
그랬더라면 레이라가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가 쓰러지고 깨어나기 전까지 아르제오는 같은 생각을 수천 번도 넘게 했다.
레이라가 정신을 차린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들켜 그녀에게 혼이 났었다.
시무룩한 그의 표정을 발견한 레이라는 손을 뻗어 그의 두 뺨을 붙잡았다.
“지금 또 쓸데없는 생각 했죠?”
“…쓸데없다고 하면 너무한데.”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너무하네.”
아르제오가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리자, 눈을 가늘게 떴던 레이라가 냉큼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
“이제 그런 생각 안 들죠?”
“…선수가 따로 없네.”
분하다는 그의 표정에 레이라가 픽 웃으며 얼굴을 놓아주었다.
“어차피 절 노리고 있었는걸요. 그때 제오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어도, 어쨌든 기회를 만들어 저를 해쳤을 거예요.”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해? 계속 곁에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잖아.”
“어떻게 잠시도 곁을 비우지 않겠어요. 저한테는 제 탓이 아니라고 해놓고, 제오는 자책하기에요? 우리 잘못이 아니에요.”
아르제오는 상체를 기울여 레이라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앞으로는 다치면 안 돼.”
“저도 고통을 즐기지는 않아서요. 다치고 싶지 않네요.”
그녀의 대답에 아르제오가 힘없이 픽 웃었다.
“제국군이 돌아올 때까지 수도에 머물 셈인 거지?”
“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막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제국군을 기다리는 동안 완전히 몸을 회복하고 공작저로 돌아가면, 다시 일을 시작할 셈이었다.
제국군이 돌아오면, 로이드를 만나 다시 한번 얘기할 계획이었다.
자신을 걱정해 주고, 저 때문에 분노하며 나선 것은 미안하고 고마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고.
그 어떤 것도 하지 말고, 오로지 제국을 위해 일해 달라고 말이다.
어차피 이번에 공작령으로 돌아가면 당분간 수도에 올 일도 없고.
“공작령으로 돌아가면, 그대는 또 바쁘겠네.”
“그러겠죠. 할 일이 많으니까요.”
“상단도 살펴야 하고, 약초도 돌봐야 하고, 타국에 약초를 공급하는 일도 검토해야 하니까.”
“거기에 결혼식 준비도 있죠.”
“어?”
“저희 둘 다 바쁘네요.”
눈매가 휘도록 환히 웃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뻐 죽겠네.”
* * *
공작령으로 돌아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황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해 보겠다고 나간 헤레이스가 충격적인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뭐…?”
하루가 다르게 회복한 레이라는 아르제오와 함께 느릿하게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그런 그녀를 찾아와 전한 소식은 니타 왕국으로 향했던 제국군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런 모양입니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한지 헤레이스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니타 왕국에서 돌던 전염병이 제국군에 옮아, 모두가 전염병으로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국군 전체에 전염병이 돈 것은 아니었지만, 그 어떤 의사를 데려와도 치료를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시간을 오래 끌었으니, 기사단장이 나서서 폐하께 먼저 돌아가시라 청했다 합니다. 그래서 소수만 데리고 폐하께서 오늘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얘기를 전해 들은 레이라는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의사들 말로는 타액, 혹은 혈액을 통해 전염되는데, 전투 중에 병사들 일부가 적들이 뿌린 핏물을 뒤집어썼다고 하는군요.”
이어진 헤레이스의 말에 아르제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독하군.”
헤레이스는 아르제오의 말에 동의했다. 자신들이 병을 앓고 있으니 너희도 아파 봐라, 하는 못된 심보 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다.
병으로 인한 고통을 알면서도 행한 짓이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진찰한 의사들의 의견입니다. 증상을 조금 완화하는 정도가 겨우라고요. 지금 상황으로서는, 신의 기적을 바랄 뿐이라고 하더군요.”
좋지 않은 상황에 레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보다 상황이 심각한 모양이군.”
“아.”
“왜 그래?”
작은 탄성을 내뱉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물었다.
“레벤의 씨앗이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벌써 공작령으로 돌아가 시타델 섬에서 꽃을 피웠을 터였다. 갑자기 자객의 습격을 받는 바람에 일정이 완전히 늦어졌다.
“그게 정말 그 책에 나와 있던 대로의 효능을 지녔다면 말이지.”
“하지만, 시타델에서 기르면 정말 그 정도의 효능을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르제오는 책에서 보았던 내용은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섬에서 그녀의 힘으로 기른 꽃이라고 한다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지도. 그대가 기른 거라면 말이야.”
“지금 당장 시타델 섬으로 가야겠어요.”
“잠깐, 지금? 당장?”
“네.”
곧장 몸을 틀려는 레이라를 아르제오가 붙잡았다.
“무슨 소리야,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잖아.”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을 그녀는 저를 붙잡은 아르제오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 움직여도 괜찮은걸요. 다들 과보호가 너무 심해요.”
그러고는 그의 손을 이끌며 걸음을 내디뎠다.
“제오도 같이 가요. 도와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