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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89)화 (89/122)

<89화>

폭풍우가 지나가고 한참이나 지나서 레이라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을, 로이드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그녀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니타 왕국은 약소국이었다. 최근 전염병까지 돌아, 완전히 궁지에 몰린 모양이었다.

거기에 레이라가 아직 타국에 약초 공급을 하지 않고 있었고, 아르제오와 약혼 소식까지 들려오니 폭주한 것이었다.

거기에 배를 타고 넘어온 니타 왕국 자객을 눈감아 준 이가 있었다. 타국에서 제국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관리하던 백작.

그 덕에 발루아 제국에, 그것도 수도까지 숨어들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안 로이드는 그 즉시 백작을 잡아다 사형에 처했다.

레이라를 찔렀던 범인도, 제 끝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로이드는 그 범인 역시 잡아다 죽였다.

하지만 그 범인을 죽인 것만으로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뱃속에 용암이 든 것처럼 펄펄 끓었다.

그러니 로이드는 니타와 전쟁을 벌일 생각이었다.

레이라를 해친 나라를 지도에서 지워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로이드의 말에 헤레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전쟁은 그 누구보다도 제 누이가 원치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로이드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그리 만든 그 나라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포레스티아에서는 출전할 필요 없다. 짐이 친히 나설 테니.”

“…누님의 치료에 전념하겠습니다.”

“그래.”

니타 왕국은 항로를 통해 발루아에 넘어왔다. 육로로는 거리가 멀어 오래 걸릴 테니.

그만 물러가 보라는 말에 헤레이스는 다시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갔고, 로이드는 곧장 출정 준비를 시작했다.

사형된 백작은 리히덴 제국과의 평화협정을 반대하던 쪽이었다.

거기에 레이라가 리히덴의 3황자와 가깝다는 소문까지 도는데, 함께 타국을 다녀오기까지 하지 마음을 굳힌 듯했다.

물론 이유가 어찌 되었든, 로이드는 그녀에게 위험이 되는 것은 싹도 남기고 싶지 않으니 죽였다.

노엘을 베고 손에서 놓았던 검을 다시 집은 것이었다.

* * *

니타 왕국처럼 작은 나라는 발루아 제국에 맞설 힘 따위 없었다.

게다가 미리 보고받은 대로, 온 나라가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병력은 더욱 적었다.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발루아에게 처참히 무너졌다.

그야말로,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하지만 모든 국민을 향해 검을 겨눈 건 아니었다. 후에 레이라가 들으면 인상을 찌푸릴 게 분명하니.

로이드는 항복하는 이들은 포로로 잡으며, 검을 들고 맞서는 이들을 베었다.

오랜 시간,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는지 니타 왕국에는 허름한 마을들이 많았다.

허름하고, 병에 걸린 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으며,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폐하, 이 이상은 안 됩니다.”

항구부터 점령하기 시작해 수도로 향하던 중, 발견한 작은 마을이었다.

안을 살펴보려던 로이드를 기사단장이 저지했다.

“저곳은 전염병이 도는 듯하니, 그냥 가시죠.”

“병사들이 잠복하고 있는지는 확인했나?”

“그렇지 않아도 병사 하나를 보냈습니다. 살펴보고 올 테니 폐하께선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어둠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듯한 마을을 밖에서 훑어본 로이드는 순순히 걸음을 돌렸다.

니타 왕국의 외곽은 대부분 이런 풍경들이었다. 척박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레이라가 보았으면 마음 아파했을 법한 풍경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더욱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로이드는 늘 한발 늦었다. 그녀를 버린 것에 대한 후회도, 지켜 주지 못한 것도.

그러니 로이드는 이번만은, 그녀를 건들면 어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레이라를 건든 대가로 지도 위에서 지워진다는 경고를, 온 대륙에 하는 것과 같았다.

* * *

레이라가 쓰러진 직후부터 아르제오는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다가 형님께서 먼저 쓰러지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헤레이스의 얼굴도 지나치게 수척했다.

“괜찮다. 레이라가 언제 눈을 뜰지 모르니 곁을 비울 순 없지.”

아르제오는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물론 그건, 저택에 머물고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공작 부부는 시타델 섬에서 약초들까지 옮겨오고 있었다.

레이라가 베푼 것이 있어서인지, 실력 좋은 의사들이 서로 그 약초로 그녀를 치료하겠다고 나섰다.

애초에 레이라가 사라지면, 그 약초를 더는 공급받을 수 없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무사히 눈을 뜰 수 있었다.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기를 기다리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데, 곧장 아르제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레이라! 정신이 들어?”

차마 세게 쥐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아르제오의 손이 느껴져서 레이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를 부르려 입술을 뗐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는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조급히 몸을 일으킨 아르제오는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 상태로 큰 목소리로 의사를 찾았다.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도 불안한 듯 방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곧이어 여러 명이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누워 있던 레이라는 그 소리에 흐릿하던 눈을 저도 모르게 동그랗게 떴다.

황궁의와 그녀의 약초를 공급받았던 유명 의사들이 모두 달려왔다.

헤레이스와 공작 부부가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의사들이 줄줄 이었다.

“공녀님! 정신이 드셨군요!”

거기엔 하르센 백작 부인도 있었다.

“자, 자, 너무 한 번에 몰려들면 안 됩니다. 공녀님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황궁의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어 대부분의 의사들은 방문 밖에서 기다렸다. 그녀를 치료하는데 크게 활약한 의사 둘과 황궁의만 방안에 남았다.

“공녀님,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배 쪽에 끔찍한 통증이 일었다.

“읏….”

레이라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자, 아르제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금은 일단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어.”

의사들은 그녀의 상처를 살피고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레이라가 공급했던 약초 덕에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다는 것, 그러나 당분간은 움직임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약초 관리나 정원 일은 당분간 삼가라는 말에 레이라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 주실 줄은 몰랐는데…. 감사해요.”

레이라는 감사 인사를 누운 채로 한다는 것이 못내 불편한 얼굴이었다.

“이게 다 공녀님께서 보내 주신 약초 덕입니다. 이렇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일 따름입니다.”

두 의사는 레이라에게 어서 회복하시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먼저 방을 나섰다.

이후 얕은 한숨을 내쉰 레이라가 황궁의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이리 보내셨나요?”

“예, 공녀님. 다행히 상태가 좋아지고 계시니 안심입니다.”

“폐하께 이리 또 빚을 지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지금은 회복에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황궁에서 황제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관리하는 사람을, 이리 제게 보내면 어쩌자는 것인가.

지난 연회에서 아르제오와 결혼할 거라고까지 말했는데 말이다.

‘어쩌자고 이러시는지….’

그런데 황궁의를 보내놓고 정작 본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르제오까지 있으니 곁에 있었다면, 그게 더욱 곤란했지만.

“전 이제 괜찮으니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 주세요. 황궁의이니 폐하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셔야죠.”

“잠….”

그녀의 말에 아르제오가 끼어들려고 했지만, 황궁의의 입을 막을 순 없었다.

“폐하께선 출정 중이셔서 지금 황궁에 계시지 않습니다. 돌아오실 때까지 공녀님을 살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출정이요…?”

레이라가 제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었다.

아르제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한 거 같은데.”

“아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뒤늦게 알게 되시면 더 기분 상하실 테니까요.”

아르제오는 될 수 있으면 그냥 계속 모르게 하고 싶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게 무슨 말인가요…?”

황궁의는 이번에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아르제오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그는 황궁의 대신 말했다.

“그대를 습격한 건 니타 왕국의 일부 강경파가 독단적으로 보낸 자객이었어. 그대 능력을 발루아와 리히덴 만을 위해 쓰는 것 같아서 그게 싫었다는군.”

“…….”

레이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분히 타국에도 약초를 공급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무작정 배포하면 문제가 생길 위험이 크니까.

그런데 그 잠시도 기다리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니 황궁의가 덧붙였다.

“주변 국가로부터 줄곧 핍박받은 작은 나라인 데다, 최근 들어 전염병까지 돌아 궁지에 몰렸던 모양입니다.”

“…떠난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지금이라도 출발하면 늦지 않게 따라잡을….”

“무리야.”

레이라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아르제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그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제 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제가 얼마나 깨어나지 못했나요?”

“보름 만에 깨어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벌써 열흘 전에 출정하셨고요.”

그 어떤 빠른 배를 가져와도 이미 늦었을 터였다.

이미 전쟁은 벌어졌을 테고, 약소국은 발루아 제국을 상대로 무참히 당할 것이다.

막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랬군요.”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맴돌고, 황궁의는 곧 불편한 곳이 있다면 말씀하시라는 말을 남기고는 방을 나섰다.

그 이후로도 침묵은 이어졌고, 아르제오는 가만히 레이라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전쟁을 막지 못해서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네.”

“…네.”

심지어는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들이 자초한 일이야.”

애초에 레이라를 해칠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자객을 보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대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이번 일에는 발루아의 황제에게 어느 정도 동의해.”

“하지만, 희생자가 생기잖아요.”

눈썹을 늘어뜨리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필요한 일이야. 본보기 삼는 셈이지. 그대를 건드리면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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