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88)화 (88/122)

<88화>

* * *

다음날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수도의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화려한 드레스 대신 수수한 차림의 두 사람은 활기찬 거리를 거닐었다.

“어느 나라나 축제는 비슷하군.”

“그런가요?”

“응. 그대가 있으면 어디든 좋지만.”

꼭 맞잡은 두 손을 흔들어 보이며 아르제오가 웃었다.

인파가 몰리는 곳이니만큼, 에반과 콜린이 동행하겠다고 했지만, 모처럼의 데이트이니 거절했다.

상점가는 유난히 사람들로 넘쳐났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삼삼오오 모여서 같은 주제를 떠들고 있었다.

“이번 축제에는 상인들이 유난히 많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글쎄, 다들 누굴 찾는다나 뭐라나. 난들 알아?”

“아니, 상인들이 거래가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물건을 가져오긴 했으니 그냥 둘러대는 말 아니야? 서로 경쟁하는 건지 뭔지…. 건국제에 이렇게나 상인들이 몰린 건 처음 보네.”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말에 아르제오는 슬쩍 거리의 사람들을 훑었다.

조금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 같았지만, 본래에 축제에는 정신이 없으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하지만 모여 있는 이들이 하나 같이 떠드니, 그저 이번 건국제에는 상인이 많이 몰렸나보다, 하고.

“레이라, 혹시 발루아에는 건국제에만 파는 특산품이라도 있어?”

“건국제에만 파는 특산품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은 레이라는 잠시 고민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무언가 떠올린 듯 말을 꺼냈다.

“건국제에만 파는 초대 황제 폐하의 어록집이 있어요.”

“…그것참 쓸데없는 물건이네.”

“가끔 사는 사람이 있을걸요?”

“그런 걸 사는 사람이 있다니…. 그대도 샀어?”

“어릴 때 한 번은 산 것 같아요.”

아르제오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 건국제에 상인들이 많이 모였다고는 해도, 그런 물건을 거래하기 위해 모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도 건국제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요.”

“아무래도 축제니까.”

“괜찮은 물건들도 많이 나온다고 했어요. 아무래도 축제 때를 노리는 상인들이 많으니까요.”

“아아, 그래선가.”

“뭐가요?”

“상인들이 많은 것 같길래.”

그의 말에 레이라는 ‘그래요?’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에게는 그저 사람이 많은 걸로만 보였지만.

“축제엔 다들 무언가를 사고 싶어 하니까요. 그걸 노리는 상인들이죠.”

“그나저나, 우린 어디부터 갈 거야?”

“초대 황제 폐하의 어록집 볼래요?”

“아니.”

곧장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 우스워 레이라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제국민의 마음가짐은요?”

“그런 책도 있어? 좀 더 정상적인 책은 없는 건가.”

“축제니까요.”

“축제엔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우리도 가요.”

레이라는 잔뜩 들뜬 듯 아르제오를 이끌었다.

꼭 잡은 손이 기분 좋았고, 함께 느긋이 축제를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그녀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라 더욱 신선하고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둘은 손을 꼭 붙잡고 상점가를 구경하거나 먹거리를 즐겼다. 그러고는 봄이니만큼, 꽃이 잔뜩 핀 산책로를 걸었다.

광장 쪽도 꽃으로 잔뜩 장식해서 보는 눈이 즐거웠다.

있는 힘껏 축제를 즐기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도 웃었다.

“축제를 좋아하나 보네.”

“제오와 함께 있으니까 좋은 거예요.”

“가만 보면 그대는 날 설레게 하기 위한 연구라도 하는 것 같아. 밤에 잠 안 자고 연구하는 거 아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능구렁이처럼 떠드는 아르제오를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겨본 그녀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며 걸음을 빨리하자, 그가 재빨리 따라붙으며 다시 손을 꼭 잡았다.

“아직도 나한테 냉정하네.”

“그러네요.”

“공작령으로 돌아가면 바빠질 거라 그렇지?”

레이라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잔뜩 밀렸으니까요.”

타국에도 약초 공급을 시작해야 하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쌓여 있는 서신도 있었고.

산책로를 쭉 돌아 광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중앙 분수대 즈음에서 걸음을 멈췄다.

분수대 앞 벤치에 레이라를 앉힌 아르제오가 몸을 낮췄다.

“구두 신고 오래 걸어서 힘들지?”

“괜찮아요.”

레이라는 괜찮다며 웃었지만, 뒤꿈치가 까져 있었다. 그걸 발견한 아르제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혀 안 괜찮아.”

굽이 엄청나게 높은 구두는 아니었지만, 축제를 구경한다고 한참을 걸어 다녔으니 발도 아플 터였다.

“그만 돌아갈까?”

“제오는 더 구경 안 해도 괜찮아요?”

“축제는 어디든 똑같아. 인파가 몰리는 곳을 그리 즐기는 편도 아니고. 난 그대와 단둘이 있는 게 더 좋거든.”

그의 말에 레이라가 픽 웃으면서도 조금 아쉬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건국제가 봄이기에 꽃장식은 매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아르제오와 함께 보는 건 또 다른 얘기였지만.

‘꽃은 섬에서 피워야겠다.’

꽃밭을 만들어 아르제오와 둘이 감상하면 그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실은, 발이 좀 아프거든요.”

“그거 봐, 아프잖아.”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비죽인 아르제오가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마차 준비시킬 테니까.”

“네.”

잠시도 떨어지기 아쉬운 듯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고는 걸음을 뗐다.

아르제오의 뒷모습은 금세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분수대에 홀로 남은 레이라는 가만히 곁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마다 웃고 있었고, 그중에는 부모와 손을 꼭 잡은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조금 애달팠다.

레이라는 아이를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다. 애초에 로이드는 황궁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해서 그럴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레이라를 궁에 가둬 놓고는 자주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들을 향한 애정은 있었지만, 제가 아이를 갖는다는 건 사실상 포기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다시 그런 선택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결혼을 약속하게 만든 아르제오가 곁에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 미소를 머금는데, 지나는 사람들 사이로 그녀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눈앞에 사람이 서기에 레이라는 고개를 들었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빤히 올려다보니,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제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을 비키지 않고 서니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물었다.

“제게 무언가 볼일이라도….”

하지만 그녀는 그 질문을 끝까지 하지도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푸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 찔린 배 부근이 타들어 가는 듯이 뜨겁고 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레이라가 반사적으로 남자의 옷자락을 움켜쥐자 그는 찔렀던 칼을 촤악, 빼내며 그녀를 밀쳤다.

“그렇지 않아도 대륙을 장악하고 있는 두 제국이, 공녀를 독차지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무슨….”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레이라는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당신의 힘은 지나치게 위협적이야.”

그렇게 말한 남자는 재빨리 등을 돌려 걸음을 뗐다.

바닥에 쓰러진 레이라의 배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주변의 사람들이 곧장 비명을 질렀다.

“꺄악!”

“여기 사람이 찔렸어!”

레이라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혼란을 틈타 남자는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사람들 사이로 숨어드는 남자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제오가 금방 올 텐데….’

찔린 부위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고, 몸이 무거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곧 돌아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레이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 * *

“꺄악!”

마차를 준비시키고 다시 분수대 쪽으로 돌아오던 아르제오는 난데없는 비명에 걸음을 멈췄다.

그 비명을 시작으로 웅성거림과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치, 치안대! 누가 치안대를 불러!”

“의사! 의사를 먼저 불러야지!”

허둥거리는 목소리들을 뚫고 아르제오는 계속해서 분수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광장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처음엔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그가 향하는 방향과 웅성거림이 가까워지자 점점 불안감이 몰려왔다.

걸음은 서서히 빨라졌고 혼란의 중심에 다다랐을 땐, 벤치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레이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라!”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아르제오가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복부를 날카로운 무언가로 찔린 듯한 상처가 있었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맥은 있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었다.

“의사! 의사를 불러와!”

창백하게 질린 그가 의사를 찾았다. 서슬 퍼런 고함에 주변에 있던 몇 명이 의사를 찾아 걸음을 뗐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레이라를 안아 든 아르제오는 의사를 찾아 걸음을 뗐다.

그때.

“이쪽입니다!”

* * *

건국제에서 포레스티아 공녀가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은 빠르게 수도로 퍼졌다.

소문보다 빠르게 보고를 접한 로이드는 범인을 잡기 위해 즉시 수도를 봉쇄했다.

그리고 황궁의를 수도의 포레스티아 저택으로 보내며 온갖 약과 포션을 아끼지 말라고 당부했다.

위치는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다쳤다는 것이었다. 목격자도 많았고, 곧장 응급처치한 덕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 후로 수일이 지나도록 레이라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동안 아르제오는 줄곧 그녀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집무실에 든 헤레이스는 서류 더미에 파묻힌 로이드를 마주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눈을 뜨지 못했는가.”

“…예, 폐하.”

헤레이스의 짤막한 대답에 로이드는 눈가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모두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까칠한 얼굴로 서류를 뒤적인 로이드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범인은 니타 왕국 사람이라더군.”

아르제오와 헤레이스가 그녀의 곁을 지키며 간호하는 동안, 로이드는 혈안이 되어 범인을 찾았다.

그리고 찾아낸 범인은 타국 사람이었다.

“이번엔 포레스티아도 반대하지 않겠지.”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어서 로이드는 눈을 번뜩이며 이어 말했다.

“니타 왕국과 전쟁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