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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87)화 (87/122)

<87화>

국경의 숲에 홀로 들어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로이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숲에 들어선 인원이 고작 한 명이라는 보고를 들었을 땐,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서 되풀이되고, 길을 잃고 헤맬 테니 숲을 빠져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런 위험을 다 알면서도 아르제오는 오로지 레이라를 위해 국경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

반면 자신은 어땠는가. 죽음의 섬으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다.

레이라가 자신이 아닌, 아르제오를 택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패배감에 입안이 썼다.

“…엘라가 그 사실을 알고 있더군.”

“전 황후께서요?”

레이라도 그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래. 아마 홀든과 교류가 많았던 귀족들이 그걸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문제는 당신이 황자와 함께 연회에 나타났으니,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다는 거야.”

엘라가 준 정보만으로는 어차피 증거도 없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협정이 이제 막 체결된 마당에, 리히덴의 3황자와 함께 나타났다. 그것도 발루아의 건국제 연회에.

이건 그들에게 빌미를 주는 것과 같았다.

그와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다는 뜻과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제가 폭풍우에 휩쓸렸을 때, 구해 주신 은인이라는 것을 밝히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물어뜯고자 작정한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빌미가 될 터였다.

물론 그 어떤 것도, 로이드가 잠재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레이라를 위험하게 두지는 않을 테지만, 아르제오까지 두둔하고 싶지는 않았다. 둘의 결혼 소식을 들으니 더더욱.

그렇다고 마냥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자신을 그녈 버렸고, 아르제오는 목숨 걸고 구했으니. 그 차이가 속이 쓰릴 만큼 극명했다. 그 스스로가 보기에도.

“괜찮다면 내가 도움을 주겠다.”

“네?”

“당신이 싫지 않다면.”

눈썹을 늘어뜨리는 로이드를 보며 레이라는 이번에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제오와 날 위해 나서 주겠다고?’

로이드의 마음을 알면서 어찌 그 호의를 받겠는가.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며 로이드가 어깨를 움찔했다.

고개를 저으려는 레이라에게서 로이드가 재빨리 등을 돌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

이것마저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예, 폐하.”

작은 목소리에 거절의 말이 담겨 있지 않아서 로이드는 내심 안도했다.

그러고 테라스를 벗어나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니, 헤레이스와 아르제오의 곁에 다른 귀족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오묘한 분위기에 조금 걸음을 서둘러 다가섰다.

“아, 마침 포레스티아 공녀님이 오셨군요.”

“무슨 일이시죠?”

레이라가 앞으로 나서며 로이드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일단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려는 듯이.

“해명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분은 리히덴 제국의 3황자라고 하시는데요.”

“무슨 해명이 필요하죠?”

그녀의 대답에 귀족들이 저들끼리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어째서 평화협정이 이제야 막 체결된 시점에, 리히덴의 황자와 함께 연회에 참석하셨는지 말입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으니, 문제 될 건 없는데요.”

“이리 빨리 친분을 쌓으셨다는 겁니까? 그것참 신기하군요.”

“마치 이전부터 교류가 있으셨던 듯이 말입니다.”

“지금은 폐위되셨지만, 전 황후께서는 공녀님이 평화협정 전에 리히덴 사람을 밀입국으로 들였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증인도 있으니 말을 꺼내는 것이고요.”

증인이 있다는 말에 헤레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평화협정 전에 아르제오가 공작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소수였다.

헤레이스로서는 증인이 있다는 말은 증인을 위조했다는 말로 들렸다.

귀족들의 말에 레이라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재빨리 로이드가 나섰다.

“내가 허락한 사안이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가?”

“예?”

귀족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평화협정이 이루어졌는데, 친분을 쌓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불만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로이드의 시선이 서늘해지자, 귀족들은 저마다 그의 시선을 피했다.

“불만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빨리 친분을 쌓으신 것에 의문이 들어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무엇보다, 증인이 있기도 하고요.”

그들에게는 증인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증거가 없으니 그리 대단한 무기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면 그 증인을 내게 데려왔어야지, 이제껏 조용하던 이유는 무엇인가?”

“…….”

만약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고 증인을 확보했다면, 로이드에게 고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증인이 없거나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고.

상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귀족들은 한발 물러났다.

“차후에 폐하께 제대로 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건국제 연회를 즐기셔야 하니 말입니다.”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듯 연회 핑계를 대며 그들은 재빨리 물러났다.

멀어지는 귀족들을 보며 아르제오는 피곤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가 오지 않는 편이 좋았던 것 같네.”

“오늘은 그만 돌아가죠.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도 아니었으니.”

세 사람이 돌아간다는 얘기를 꺼내니 로이드가 안절부절못하다가 조심스럽게 따라나섰다.

연회장을 나선 세 사람을 따라잡은 로이드는 레이라를 붙잡았다.

“정원을, 둘러보고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네?”

헤레이스와 아르제오가 불편한 시선으로 로이드를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시선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레이라의 놀란 얼굴만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정원이요?”

“후원을, 이번 연회를 위해 돌보게 했다. 둘러보고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여.”

“아….”

레이라는 난감한 표정으로 아르제오와 헤레이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그런 표정인 것을 아는 로이드의 표정도 어쩐지 처참했다.

헤레이스는 마음이 좋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침묵이 이어지자 로이드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다, 당신이 돌보던 정원은, 거기도 둘러보고 가는 것이 어떤가.”

“…….”

이리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열지 않으니 결국은 아르제오가 나섰다.

“피곤한 듯하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그는 레이라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잡아끌었다.

“모쪼록, 연회를 즐기시죠.”

레이라를 데려가는 아르제오에게도, 로이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제게 막을 권리 같은 건 없다는 걸 알아서.

아르제오를 따라 걸음을 떼던 레이라가 다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폐하.”

“…….”

“분명 제가 정성을 쏟아 가꾸던 정원이지만, 이제는 제 손을 떠났어요. 그러니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는 우아하게 예를 갖추고는 두 사람과 함께 그곳을 벗어났다.

멀어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이드는 이번 연회에 맞춰 가꾼 후원으로 향했다.

레이라가 좋아하는 꽃. 이번에 정원을 손보라고 하면서, 그녀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던 자신을 깨달았다.

‘내게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

불을 밝힌 정원은 온갖 꽃들로 가득했다. 정원 가득한 꽃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이런 걸 준비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늦었고, 제게는 아무런 자격도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놓을 수 없어서 속이 답답했다.

로이드는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원을 배회하다가 홀로 레이라의 궁으로 향했다.

황후의 자리는 비었고, 로이드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가 유일하게 마음 놓을 수 있는 장소는 거기뿐이었다.

* * *

“미안해요, 제오. 괜히 싫은 소리 듣게 한 것 같아서.”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레이라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저도 사과드립니다, 형님.”

“…형님 소리를 들으니 아무렇지도 않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르제오가 두 사람의 사과에 픽 웃어 보였다.

“오늘 일은 난 괜찮지만, 앞으로는 그대와 황제가 둘만 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둘만 있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레이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하자, 아르제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는 그렇게 얘기하지만, 황제가 자꾸 그럴 일을 만들잖아.”

“오늘 일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연회장에서 할 수 있는 얘기도 아니었고.”

“무슨 얘기를 했는데?”

“마침 테라스에서 나오니 귀족들이 제오에게 말하지 않았나요? 평화협정 전에 제오가 공작가에 있었냐고 물었어요. 전 황후께서 폐하께 그리 고했다고 해요.”

옆에서 잠자코 얘기를 듣던 헤레이스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 황후는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저들은 증인까지 운운하던데.”

공작가 사람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확신까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이제 괜찮아.”

엘라는 이미 폐위되어 지방으로 쫓겨났고, 연회장에서 나타났던 귀족들도 포레스티아를 견제하는 것뿐이니.

하지만 오늘 일로 아르제오는 확신할 수 있었다. 로이드가 아직 레이라에게 미련이 남았다는 것.

‘양심이 없는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그녀를 다시 붙잡으려 한다는 말인가.

레이라가 다시 황제를 받아 줄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황제가 곁을 맴도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제가 그대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더군.”

“그건….”

레이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아르제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이 손에는 반지가 있으니까.”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의 시선이 제 손에 끼워진 반지로 향했다.

로이드를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무엇도, 그녀가 해 줘서도 안 되는 일이기도 했고.

“전 어디에도 안 가요. 앞으로도 계속 제오와 있을 거니까요.”

“걱정 마, 어디에도 안 보낼 거니까.”

레이라의 반지 낀 손에 살짝 입을 맞춘 아르제오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애정행각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두 분…. 제가 함께 있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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