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86)화 (86/122)

<86화>

반역으로 몰려 죽었으니, 당연하게도 황족의 무덤에 묻히지 못했다.

그를 가엾이 여긴 귀족 하나가 몰래 황궁 밖에 노엘의 무덤을 만들었고, 로이드는 알면서도 묵인했다.

노엘을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황비의 묘는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본인이 자처한 일인 게지.’

미리 위치를 알아 온 헤레이스를 따라 걸으며 레이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황비의 욕심이, 두 형제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제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황궁에서 한참 벗어난 곳, 산을 오르면 푸르른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 덩그러니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레이라는 그곳에 다가서 꽃을 올려두었다.

‘가끔 함께 차를 마실 땐, 즐거웠어요.’

진정 제국민을 위한 사람이었지만, 로이드와 함께 살아갈 수는 없던 모양이다.

‘폐하께서도…. 마음 아파하시지 않을까요.’

속으로 중얼거린 레이라는 고개를 들었다. 나무들 사이로 비석에 햇볕이 들었다.

‘제게 하신 일도 후회하시는 모양이니까요.’

바라건대, 이제 자신은 괜찮으니 로이드가 그저 그 후회에서 벗어났으면 했다. 그래서 더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그냥 제국을 잘 다스리기를.

이번에 아르제오와 함께 연회에 참석하면, 아마도 포기해 주겠지.

그리되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이미 자신의 마음은 아르제오에게 향했으니, 계속 그 마음을 붙들고 있다면, 로이드만 괴로울 터였다.

‘당신은 용서할 수 있겠어요?’

그건 자신에게 묻는 것과 같았다.

이리 후회를 끊어내기를 바라는 걸 보면 이미 용서한 듯싶다가도, 문득 미움이 솟구칠 때가 있었다.

로이드가 차를 내 달라고 했을 때가 그랬다. 그가 제게 누명을 씌웠던 것과 관련되면, 미움이 솟아나 저도 모르게 로이드에게 차갑게 대했다.

‘잘 있어요. 아마 다시는 안 올 거예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레이라는 곧 등을 돌렸다.

“그만 가요.”

로이드를 용서했든 아니든, 이제는 그냥 마음에서 놓아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아르제오를 힐끔 바라봤다.

이미 제 옆에는 행복이 있었으니.

노엘이 안타까워 찾아온 것이지만, 앞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 * *

봄에 열리는 발루아 제국의 건국제는 꽃이 가득한 축제였다.

당연하게도 레이라가 좋아하는 축제이기도 했고.

전에는 그러지 않았지만, 이번 건국제의 황궁 연회에는 꽃장식이 유난히 많았다.

그 때문에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레이라는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로이드가 제게 보이려는 듯 꽃장식을 잔뜩 준비한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이제 와서는 너무 늦었다.

“올해는 유난히 꽃장식이 많네요? 폐하께서는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신다던데.”

“꽃장식을 좋아하실 분이 계시기는 하지요.”

부채로 입을 가린 귀부인 몇이 레이라를 힐끔거리며 쑥덕거렸다.

황궁 연회는 아르제오뿐만 아니라, 레이라와 헤레이스에게도 불편한 자리였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시죠? 공녀님과 함께 계시는….”

“글쎄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근사하게 연미복을 차려입은 아르제오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것도 레이라와 비슷한 디자인으로 맞춰 입었으니,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설마 공녀님께서 새로 만나는 분이신 건가요?”

“그런 모양인데…. 어느 댁 자제인지 아세요?”

“알 리가 있겠어요?”

두 사람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직접 다가가 묻는 이는 없었다.

아마도 상황이 어찌 흘러갈지 모르니 행동을 조심하는 모양이었다.

오늘 연회에는 다른 파트너를 대동하고 나타났지만, 요전 날 황궁에 나타나 로이드와 인사를 나눴으니 말이다.

게다가 보란 듯이 꽃장식이 늘어난 것이, 꼭 로이드가 다시 레이라를 들이려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만들어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알림으로 그 수군거림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로이드는 아래에 있는 귀족들을 한차례 훑었다. 그 안에서 레이라를 찾기 위해.

하지만 그녀를 발견해 안도하기도 전, 그 옆에 선 아르제오를 보고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자리에 선 로이드는 감정을 갈무리하고는 곧 말을 시작했다.

발루아의 역사를 간단히 읊은 그는 시종이 가져온 잔을 들어 올렸다.

“앞으로도 발루아의 무한한 영광을 위하여.”

귀족들이 전부 따라서 잔을 들어 올렸다.

“모두 연회를 즐기도록.”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로이드는 계단을 내려왔다.

곧장 레이라에게 향하려는 그의 앞을 뭇 귀족들이 가로막았다.

인사를 올리는 그들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어서 로이드는 초조한 눈으로 레이라를 힐끔거렸다.

“그대를 엄청 신경 쓰시는군.”

“…전 잘 모르겠네요.”

슬쩍 시선을 돌리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입술을 비죽였다.

“두 분,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듣는 귀가 많다고 헤레이스가 말린 뒤로는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여기는 오래 있어야 하는 거야?”

“그렇지는 않아요. 얼굴을 비췄으니 돌아가도 되겠죠. 불편한가요?”

그녀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게다가 다른 것은 몰라도 황제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게 더 신경 쓰였다. 황제와 레이라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오가 정 불편하다면 일찍 돌아가죠. 우린 수도의 축제를 구경하면 되니까요.”

두 사람 모두 축제를 즐긴다면 그쪽이 더 즐겁기도 했다. 이런 딱딱하고, 차려입어야 하는 곳보다는 말이다.

그럼 일찍 돌아가자는 얘기가 막 나오고 있을 무렵, 드디어 로이드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군.”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인사를 올리는 레이라를 로이드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사실 오랜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수도로 올라온 직후 찾아뵀었으니. 다만 로이드에게는 그것도 오랜만으로 느껴졌다.

“이쪽도 오랜만이군.”

미소를 머금고 레이라를 바라보던 로이드가 시선을 돌려 아르제오를 마주했다.

국경의 숲에서 마주한 이후, 이제야 보는 것이니 이쪽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째서 리히덴의 3황자가 레이라의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한 지는 의문이지만.”

설명을 바라는 듯한 시선에 레이라는 차분히 대답했다.

“발루아의 건국제를 소개할 겸, 함께 왔습니다.”

“…그랬군.”

로이드는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아르제오를 훑어보았다.

그저 건국제를 소개하려고 데려왔다고 하기에는 드레스와 연미복을 맞춰 입고 있었다. 마치 연인이라고 과시하는 듯이.

그 부분을 묻고 싶었지만, 동시에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크흠.”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시선을 돌리는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기도 하고요.”

“뭐…?”

로이드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감정을 감출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레이라와 아르제오를 번갈아 바라보니, 로이드는 그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냈다.

전쟁을 최대한 피하고 싶다고 말하며 수호목을 준비한 그녀를 만나러 갔던 때. 함께 응접실에 있는데, 돌연 나타났던 하인 차림의 남자.

유난히 레이라와 거리도 가까웠고, 자신을 보는 눈에 경계심도 어려 있었다.

“하….”

그 사실을 떠올린 로이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어쩌려고….’

엘라가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지만, 전투가 발발하기 직전, 그녀가 리히덴의 황자를 숨겨 준 건 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로이드가 입을 다문다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로이드는 이마를 짚으며 레이라에게 말했다.

“잠시 조용히 얘기 좀 하지.”

“그건 곤란합니다, 폐하.”

줄곧 조용히 옆에 서 있던 아르제오가 그 말에 레이라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보내지 않겠다는 듯.

“리히덴의 황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저희는 약혼한 사이입니다. 끼어들 이유가 충분하다고 보는데요.”

아르제오의 대답에 로이드가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이라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은 거라면 그리해. 지금은 황자의 존재가 그녀를 위험하게 할 테니.”

자신이 어째서 레이라에게 위험이 된다고 하는 걸까. 이미 평화협정도 체결된 마당에.

아르제오가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는데, 레이라가 가만히 그의 손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이니 금방 다녀올게요.”

“…알겠어.”

아르제오는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거역할 수는 없어서 순순히 헤레이스와 둘이 연회장에 남았다.

아직까지 레이라에게 미련이 남은 듯한 로이드와 그녀를 둘만 두기는 미치게 싫었지만.

로이드는 레이라를 비어 있는 테라스로 데려가, 커튼을 내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폐하.”

미간을 찌푸리는 로이드를 레이라가 덤덤히 마주했다.

결혼하겠다는 사실만으로도 로이드는 지금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도 더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리히덴의 3황자를, 공작저에 들였나?”

아르제오는 현재 공작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 레이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자 로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아니, 평화협정을 맺기 전에 말이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3황자가 공작저에 있었냐는 말이야.”

이어진 질문에는 레이라도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국경의 숲에서 아르제오가 로이드를 만났지만, 그는 리히덴에서 루이스와 함께 나타났었다.

‘설마….’

하지만 공작저에서도 이미 한차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기억하시는 건가.’

레이라의 얼굴에 찰나 낭패감이 스쳤다. 그 표정에서 대답을 얻은 로이드는 참담한 기분이었다.

“…있었던 게로군.”

나지막한 로이드의 중얼거림에 레이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어쩌려고 그랬지?”

살짝 고개를 떨어트렸던 그녀는 그 물음에 다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찌했어야 하나요? 제 은인을, 그것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저만이라도 몸을 피하도록 알리러 왔던 사람입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홀로 국경의 숲을 지나온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제가 리히덴의 황자라는 이유로 폐하께 바치기라도 해야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발루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레이라의 말에 로이드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침음을 삼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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