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85)화 (85/122)

<85화>

대답하려는 레이라 대신 먼저 입을 연 건 아르제오였다.

“내가 찾고 있다.”

그리고 조반니가 궁금해하는 신분을 덧붙였다.

“포레스티아 공녀에게 줄 선물을 찾고 있어서 말이야.”

그 말에 조반니의 시선이 슬쩍 레이라를 향했다.

“그리고 이쪽은 리히덴 제국의 3황자십니다.”

뒤를 지키고 있던 콜린이 대신 아르제오를 소개하니 조반니는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두 사람을 살폈다.

지금 대륙 모두가 주목하는 포레스티아 공녀와 평화협정을 맺고 있다는 리히덴의 황자라니.

갑자기 이 두 인물이 상단을 찾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그런데 상단주께서는 지금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요?”

조반니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한차례 어깨를 으쓱였다. 무엇을 원하는지 밝히면 일이 더 수월할 테니.

“희귀한 꽃씨를 찾고 있다. 최근 이쪽에서 손에 넣었다는 정보를 들었거든.”

그의 말에 조반니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최근 입수한 식물 씨앗 목록을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어떤 꽃을 말씀하시는지….”

“레벤의 씨앗을 찾고 있는데…. 일단 최근 들여온 희귀한 꽃씨들을 한 번 볼 수 있겠나?”

“아, 예! 그럼 지금 준비시키겠습니다!”

조반니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접객실을 빠져나갔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씨앗을 얻겠네요.”

“수월하지는 않았지. 그대가 처음 얘기했을 때부터 줄곧 찾고 있던 걸 이제야 겨우 정보를 얻은 건데.”

줄곧 찾고 있었다는 말에 레이라는 작게 웃었다. 제가 한 말을 잊지 않아 주어서.

금세 돌아온 조반니는 꽃씨 몇 가지와 품목 리스트를 가져왔다.

레이라는 차분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늘어진 씨앗들을 살폈다.

손끝으로 매만지면 저절로 꽃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그중에 레벤의 씨앗은 없었다.

씨앗들을 살핀 레이라가 조금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니, 아르제오는 속으로 필을 반쯤 죽일 계획을 세웠다.

“아무래도 잘못된 정보였던 모양이군.”

그가 미련 없이 몸을 일으키니 조반니는 어쩔 줄 몰라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 그냥 가시려고요? 상단주께 사람을 보냈는데 조금 더 기다리시면 어떨까요? 찾으시는 것이 어떤 씨앗인지 말씀해 주시면, 찾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걸음을 떼는 그들을 조반니가 붙잡으려 하자, 에반과 콜린이 막아섰다.

“그럼, 찾게 되면 포레스티아 공작가로 서신을 부탁하지.”

“예, 예! 알겠습니다!”

조반니는 거물급 고객을 붙잡았다는 생각에 화색을 띠었다.

그로부터 상단은 엄청난 양의 꽃씨를 사들였고, 이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갔다.

포레스티아 공녀가 상단을 방문한 이후, 상단이 어마어마한 꽃씨를 사들인다고 말이다.

후에 공작가로 엄청난 양의 꽃씨가 도착하지만, 그건 조금 더 나중의 이야기.

* * *

“바다까지 건너왔는데.”

입술을 비죽인 아르제오가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행 온 걸로 쳐요.”

“이번엔 꼭 찾아 주고 싶었는데.”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꼭 찾아 주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오래 찾았다고 하니 더더욱.

“찾아 주겠다고 하니, 기다리면 연락이 올 거예요.”

“…사기꾼 같던데.”

“그래요?”

레이라가 의외라는 듯 되묻자,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치고는 외부인을 지나치게 경계하니까. 기사까지 대동하고 왔는데도.”

“그만큼 조심하는 것 아닐까요? 그보다, 사기꾼 같은데 씨앗은 왜 부탁했어요? 선금까지 주면서.”

“혹시 모르니까. 어쨌든 씨앗만 찾아 주면 그만이니.”

이후로도 아르제오는 계속해서 얼마나 자신이 그녀에게 레벤의 씨앗을 찾아 주고 싶었는지 얘기했다.

웃음을 머금은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듣는데, 돌연 무언가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구석진 골목에 쓰러진 노파를 발견한 것이었다.

“세상에.”

놀란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곧장 노파에게 다가섰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으음…. 물….”

허름한 노파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물을 찾았다. 그에 콜린이 재빨리 달려가 물을 구해 왔다.

노파는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힘겹게 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떠서 레이라를 바라보는데, 눈동자가 하얗게 흐려져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콜린이 무심코 흠칫했을 만큼.

초점 없는 눈은 네 사람을 차례로 훑더니 이내 레이라에게 고정되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제 괜찮으신가요?”

“그저 물이 조금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걸 아가씨께서 채워 주셨고요.”

“괜찮으시다면 다행입니다.”

노파는 괜찮다고 했지만, 레이라의 눈에 정말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는데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바람이 찬데, 옷도 너무 얇았다.

그녀가 걱정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는지, 곁에 있던 아르제오가 조심스럽게 노파를 부축했다.

“괜찮으시다면, 따뜻한 곳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어떠신가요, 어르신.”

그의 말에 노파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세요. 아가씨께서 날 걱정하신다고 그쪽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곤란한데요. 그녀에게 제가 그런 매정한 인간으로 보이잖습니까.”

“허허, 늙은이가 괜한 말을 한 모양입니다.”

노파는 다시 눈동자가 흐릿한 눈으로 레이라를 응시했다.

사람 좋게 웃은 노파는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싸맨 작은 종이를 꺼냈다.

노파가 손을 허우적거리자, 레이라가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노파는 짙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손에 그 작은 종이를 쥐여 주었다.

“아가씨께 조만간 이게 꼭 필요하겠네요. 이 늙은이에게 베푼 배려와 물값입니다.”

“아뇨, 뭘 받으려고 그런 건….”

고개를 젓는 레이라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노파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넣어 둬요. 어차피 내게는 의미 없는 것이니. 하지만 아가씨께는 아주 의미 있을 겁니다.”

손을 놓은 노파는 곧 지팡이를 짚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감사했습니다.”

네 사람의 시선이 홀린 듯 레이라의 손에 쥔 작은 종이로 향한 사이, 노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꿈을 꾼 건가?’

그런 착각마저 들게 만드는 공기. 하지만 손에 든 종이가 노파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뭐가 들었어?”

아르제오가 궁금한 듯 어서 확인해보라고 재촉했다.

곱게 싸인 종이를 펼치자, 그 안에는 신기한 모양의 씨앗이 하나 들어있었다.

“웬 씨앗이….”

작게 중얼거린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씨앗을 매만졌다.

연보랏빛의 씨앗은 마름모꼴이어서 얼핏 보면 파편처럼 보이기도 했다.

손끝에 닿으니 레이라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그 씨앗의 꽃이 그려졌다.

“아.”

머릿속에 꽃을 떠올린 그녀가 작게 탄성을 흘렸다.

레이라는 곧장 씨앗을 움켜쥐고 노파가 등을 돌렸던 방향으로 나아갔다.

“레이라?”

하지만 노파는 이미 사라진 뒤라, 찾을 수 없었다.

“왜 그래?”

뒤쫓아온 아르제오의 물음에 레이라는 넋이 나간 얼굴로 대답했다.

“레벤의 씨앗인데요…?”

“뭐…?”

* * *

차가르 왕국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포레스티아로 돌아온 직후에는, 곧 열릴 건국제를 위해 수도로 향해야 했다.

“섬에서 그 꽃을 먼저 피워 보고 싶었을 텐데. 뒤로 미뤄도 괜찮겠어?”

“어쩔 수 없죠. 일정이 늦어졌으니까요.”

시간적 여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서 며칠을 더 기다렸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 의문의 노파에게 받은 레벤의 씨앗은 아직 고이 간직하고만 있었다.

“이번 건국제에는 조금 일찍 황궁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니까요.”

그 말대로 레이라와 아르제오, 그리고 헤레이스가 먼저 수도로 출발했다.

“내가 정말 함께 가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제 파트너니까요.”

“그렇죠. 이제는 형님이 되실 거니까요.”

덧붙여진 헤레이스의 말에 아르제오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농담 섞인 대화에 레이라는 작게 웃었다.

서둘러 건국제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 이 신비한 씨앗을 심어 보고 싶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손에 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이라, 아르제오에게는 황궁이 불편한 자리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이라만 보낼 수도 없었지만.

그들은 한 차례 황궁에 들러 얼굴을 비추고는 수도에 있는 저택에 머물기로 했다.

건국제의 연회까지 시간은 있었지만, 레이라는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 형님께선 저택에서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택에 당도한 그들은 황궁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어차피 연회에는 참석하겠지만, 굳이 폐하를 뵐 필요는 없는 듯싶습니다.”

“그건 그렇지.”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한 듯 레이라를 힐끔거렸다.

그러자 그녀는 괜찮다며 아르제오를 다독였다.

“인사만 드리고 곧장 돌아올 겁니다.”

“…그래, 혼자가 아니니 괜찮겠지.”

헤레이스가 없었다면, 절대로 자신이 따라갔겠지만 말이다.

아르제오를 저택에 남겨두고 두 사람은 황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로이드와의 짧은 만남을 갖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황후의 자리가 공석인 와중에, 황궁에 레이라가 나타났던 것 때문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다시 포레스티아가 그 자리를 꿰차는 것이 아니냐며.

그들이 이렇게 나올 건 레이라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궁 연회에 아르제오와 함께 참석하려는 것이었고.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온 두 사람을 보며 아르제오는 내심 안도했다.

다음 날, 수도의 저택으로 레이라가 주문했던 꽃이 도착했다.

“이스, 어딘지 안다고 했지?”

“예, 안내하겠습니다.”

헤레이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나까지 찾아가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꽤 너그러운 사람이거든요.”

레이라 외에 두 사람은 조금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특히나 헤레이스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헤레이스를 아는 레이라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고집부려서 미안해.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다녀오고 싶어.”

“전 폐하께서 아시고 난 뒤가 걱정입니다.”

헤레이스의 중얼거림에 레이라는 쓰게 웃었다.

로이드가 알게 된다면 당연히 싫어할 테지. 하지만 소식을 듣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아르제오는 형제들과 완만히 해결될 가능성이 크지만, 저쪽은 이미 끝나 버려서 더 안타까웠다.

로이드의 손에 죽은 노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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