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 *
길고도 추웠던 겨울이 지나며, 발루아에는 봄이 찾아왔다.
두 사람의 결혼식도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고, 리히덴에서 한차례 서신이 오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르제오가 그저 가볍게 넘긴 것일 수도 있지만.
서신은 결혼식은 리히덴에서 해야 하지 않겠냐고 재촉하는 것이었는데, 아르제오는 그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혼식은 제가 다 생각해 둔 장소가 있다고 덧붙이며.
늦봄에는 발루아의 건국제가 있었다.
“굳이 그대를 초대할 이유는 없지 않아?”
“그러게요.”
레이라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건국제에 열리는 황궁 연회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이 레이라 앞으로 날아온 탓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필에게서도 서신이 도착해 있었다.
“이쪽은 반가운 소식이네.”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레이라가 슬쩍 필의 서신을 힐끔거리니, 아르제오가 보기 쉽게 그녀 쪽으로 서신을 내밀었다.
“레벤의 씨앗이 있다는 정보야. 좋은 소식이지?”
그의 말에 레이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아직 찾고 있었네요.”
“당연하지. 그대에게 찾아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싱긋 웃는 아르제오를 확인한 레이라는 서신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차가르 왕국이면…. 그리 멀지는 않네요.”
육로를 통해 이동하면 오래 걸릴 테지만, 배를 타고 가면 하루면 도착할 거리였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으니 넉넉잡아도 일정이 일주일을 넘기지 않을 터였다.
빠르게 다녀오면 사흘 내로도 다녀올 수 있을 테니.
“건국제 연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 전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같이요?”
“응. 설마 나 혼자 보내려고? 안 돼. 난 같이 갈 건데?”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표정이 퍽 뻔뻔했다.
“왜 물어본 거예요?”
“그대 입으로 같이 가자는 말이 듣고 싶어서.”
레이라가 황당함에 픽 웃었다.
“같이 갈 거지?”
그녀는 괜스레 대답을 미루며 아르제오를 빤히 바라봤다.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아르제오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안 갈 거야?”
“갈 거예요.”
“근데 왜 대답이 없어? 긴장되게.”
“일정이 너무 빡빡하지 않을까 걱정이긴 하네요.”
그렇게 말한 레이라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아직도 한참 남은 편지 더미를 바라봤다.
차근차근 일을 진행 중이었지만, 모두 다 처리하기엔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저게 아직도 저렇게나 남았네.”
“꼼꼼히 처리하려다 보니 시간이 걸리네요.”
“좋은 일 하는 거니까 이해해 주겠지.”
어깨를 으쓱인 아르제오는 금세 다시 화제를 돌렸다.
“일단 레벤 씨앗을 구해 오는 게 급선무니까, 내일 당장 출발할 생각인데 어때?”
“좋네요. 정말 레벤의 씨앗이라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할게.”
“네, 부탁할게요.”
공작 부부에게도 미리 말씀드려야겠다며, 아르제오는 금세 그녀의 방을 빠져나갔다.
사람 한 명 빠져나간 것뿐인데, 방안에는 금세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용한 가운데 레이라는 찬찬히 서신을 훑어보았다. 자리를 비우기 전에 최대한 많이 살펴볼 수 있도록.
우선은 발루아 제국 내에, 그리고 리히덴 제국에도 약초 공급을 검토하고 있었다.
필을 통하면 믿을 만한 상단을 추릴 수 있을 테고, 그 상단들을 운송 수단으로 진료소에 공급할 계획이었다.
서류를 훑던 레이라는 슬쩍 시선을 돌려 황궁에서 온 초대장을 바라봤다.
건국제 황궁 연회.
“……”
굳이 자신을 지목하여 초대한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이유일 터다.
‘…제오와 함께 가야겠네.’
그러면 로이드도 마음을 접어 줄지도 모르니.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미움은 흐려지고, 조금 안타까운 마음까지 들었다. 로이드가 그렇게 되기까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걸 아니까.
리히덴에서 돌아온 뒤, 노엘의 소식을 들었을 땐 마음이 아팠다.
애초에 로이드의 태도로 인해 거의 포기한 상태였으니 미움보다 덤덤함이 컸다.
하지만 노엘의 죽음은 또 다른 얘기였다.
로이드가 줄곧 목숨을 위협받아 온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엘이 아닌, 황비의 의지였다.
황비가 그러는 원흉이 노엘이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지만, 로이드는 싹을 자르기로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모두를 죽인 걸 테고.
아르제오와 형제들 사이를 보았을 때도 레이라는 안타까움이 먼저였다.
루이스와는 그래도 괜찮은 모양이었지만, 로렌스는 불편해하는 듯했다.
그래도 그들은 로이드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돌아갈 리가 없다는 건…. 폐하께서도 아시겠지.’
그러니 그리도 조심스러운 것일 터다.
대답도 하지 말라 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 하니 말이다.
안타까웠지만, 레이라는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아르제오에게 마음을 다 빼앗겨, 로이드에게 갈 수도 없지만.
레이라는 초대장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잡념을 털어낸 그녀는 곧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 * *
황제가 직접 초대장을 보냈으니, 불참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다음날 곧장 공작저를 나섰다.
호위기사 둘을 데리고 두 사람은 먼저 발루아의 항구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차가르로 향하는 배를 탄 두 사람은 느긋하게 바닷바람을 즐겼다.
배는 일전에 리히덴에 도착한 직후 탄 이후로 처음이니 꽤 오랜만이었다.
그때는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밤중에 에반과 숨어든 것뿐이었으니, 배를 탔다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바람이 기분 좋네요.”
“배 타는 거 좋아해?”
“바람 부는 곳을 좋아해요.”
“낭만적이네.”
난간에 기대어 턱을 괸 아르제오가 씩 미소를 머금었다.
“레벤의 씨앗을 찾으면, 그것도 섬에 심을 거야?”
“그래야죠.”
시타델이 가진 기운은 약초의 효과를 배로 만들어준다. 그러니 레벤의 효능도 섬에서 기르면 다를 터였다.
“기대되네요.”
“그렇게 좋아?”
“그럼요. 어릴 적부터 줄곧 찾아 헤맨 꽃이니까요.”
그 말에 아르제오의 미소가 짙어졌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꼭 자신이 찾아 주고 싶었다.
‘찾을 거지만.’
겨우 정보를 찾아내 향하는 중이기도 했고.
그 상태로 조금 더 바람을 맞고 있자니, 아르제오가 레이라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찬 바람을 너무 많이 쐬면 감기 걸려. 그만 안으로 들어가지.”
“조금만 더요.”
“이미 꽤 오래 나와 있었잖아.”
“제오가 안고 있으니까 괜찮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는 더욱 힘주어 그녀를 안았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고 나서는 더는 고집 부리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초봄인 데다, 바닷바람은 차니.
그렇게 꼬박 하루 동안 바다를 건너, 그들은 차가르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고 곧장, 호위로 동행한 에반과 콜린을 대동한 두 사람은 레벤의 씨앗을 찾으러 갔다.
필의 말로는 왕국의 항구도시에 규모가 큰 상단을 운영하는 상인이 있는데, 최근 그 상인이 레벤 씨앗을 입수했다는 정보였다.
그리고 그 나달이라는 상인을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길을 지나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모두가 알고 있는 듯,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었다.
도시에서 제일 화려한 곳에서 지내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큰 규모의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더니, 정말 돈을 긁어모으기라도 한 것 같았다.
상단이 머물기 위해 아예 사들인 화려한 숙소에 도착한 그들은 건물을 한차례 올려다보았다.
“정말 상단 규모가 큰 모양이네요.”
“왜, 이런 건물이 마음에 들어?”
“아니요. 전 시타델에 있는 저택이 좋아요.”
“아, 그거. 나도 거기가 좋아.”
두 사람의 대화에 에반과 콜린이 괜스레 주변을 힐끔거렸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입구를 지키고 선 이들이 앞을 막아섰다.
“상단패를 먼저 보여 주시죠.”
“상단패요? 저희는 상단 사람이 아닌데요.”
“그럼 무슨 일이십니까? 상단주와 약속되지 않은 사람은 출입이 불가합니다.”
단호한 말투에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았다.
필의 말을 듣고 온 거지만, 그 상인이 이렇게까지 영향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단주와 약속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레이라의 물음에 입구를 지키던 이들은 거만한 얼굴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서 오신 분이시죠? 아무나 약속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문지기들의 불손한 태도에 아르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시기에 그대를 모르는 걸 보니, 그다지 쓸 만한 상단은 아닌 모양이야. 거짓 정보였을 테니 그만 가지.”
단호히 말하며 아르제오가 돌아서자, 문지기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그만 가자고 재촉하는 그를 붙잡았다.
“그, 자, 잠시만 기다리시죠. 안에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문지기는 저들끼리 쑥덕대더니 한 명이 숙소 안으로 사라졌다.
가만히 멀뚱멀뚱 서 있던 레이라가 아르제오를 힐끔거리며 픽 웃었다.
의미심장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이쪽이 먼저 불신을 드러내니, 저들 입장에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자신들이 상단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고객을 놓치는 거라면? 그런 생각이 드니 레이라 일행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아마 곧장 상단주를 불러오지는 않을 거야.”
“그렇겠죠?”
하나 남은 문지기를 힐끔거리며 아르제오가 레이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큰 고객일지도 모른다고 곧장 상단주를 불러내지는 않을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알릴 터였다.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내 줄 정도로 힘이 있는 누군가.
곧 안으로 사라졌던 문지기가 두 사람의 예상대로 누군가를 대동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 사람은 빠르게 레이라와 아르제오, 그리고 두 사람의 뒤에 선 기사 둘을 훑고는 생글 웃었다.
차림새가 수수하긴 했지만, 귀족의 위엄이 느껴졌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남자는 그들을 숙소의 접객실로 안내했다.
깔끔한 찻잔에 차를 내온 남자는 자신을 이 숙소의 관리자, 조반니라고 소개했다.
“저희 상단을 찾는 손님들은 주로 상점을 통하시는 편이어서, 저들이 경계한 모양입니다.”
“잘못 찾아온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간혹 이리로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시니까요.”
조반니는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의 뒤에 선 기사들을 힐끔거렸다. 깔끔한 기사복 옷깃에 채워진 자그마한 단추. 그건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기사를 뜻하는 단추였다.
조반니는 최근, 그 이름이 얼마나 대륙에서 떠들썩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 절차는 필요한 법.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분이 상단주를 찾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레이라가 똑바로 조반니를 응시했다.
네 사람 중 누가 상단주를 찾냐는 질문이 아니었다. 어디의 누가, 상단주를 찾냐고 묻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