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 *
에드가는 공작가로 돌아온 레이라의 옆에 다시금 아르제오가 있는 것에 당황했다.
빗발치는 청혼서를 피해서 리히덴으로 가더니, 갑자기 둘이 되어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식 입국 절차를 밟았으니 다행이었다.
어쨌든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은인이었으니 공작가는 기쁘게 그를 맞이했다.
“이렇게 은인을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리히덴의 상황은 많이 안정되었습니까?”
“덕분에요.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감사하죠. 딸아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주셨으니 말입니다.”
공작이 웃으며 맞아 준 덕에 아르제오는 조금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번에는 레이라와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서 온 입장이었으니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얼마든지 편하게 지내시죠.”
“감사합니다.”
아르제오는 짧게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에드가에게 덧붙여 말했다.
“저녁 식사 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아, 예.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에드가는 조금 복잡한 얼굴이었다. 분명 그 말이 레이라와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아서.
우선 저녁 식사 전까지 쉬라는 말을 남긴 에드가는 먼저 자리를 떴다.
마차로 이동하며 피로했던 몸을 뜨끈한 물에 담그고 나니 여독이 풀리는 것 같았다.
제도에서 출발해, 그들이 국경의 숲으로 들어설 즈음에는 두 제국의 화친을 위한 마지막 협정이 진행됐을 터였다.
느긋한 목욕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레이라를 맞이한 건, 엄청난 양의 서신들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아르제오도 그녀의 앞으로 온 서신들을 보고는 질린 얼굴을 했다.
“…설마 이게 다 그대 앞으로 온 청혼서는 아니겠지.”
조금 뚱한 얼굴의 아르제오가 중얼거리니 픽 웃은 레이라가 서신들을 대충 훑었다.
“전부는 아니에요. 청혼서는 따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그것들은 공자님께서 확인하시고 아가씨와 상의가 필요한 것들이라고 하신 서신들입니다.”
“많기도 해라.”
난감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도 고개를 저었다.
“이스는 자리를 비운 거지?”
“예. 공작님 명으로 수도에 가셨어요. 저녁 시간에는 맞춰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건 이스가 돌아온 다음에 처리해야겠네.”
얕은 한숨을 내쉬는 레이라의 어깨를 아르제오가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래, 지금은 일단 쉬자.”
“로라, 차를 준비해 줄래?”
“예, 아가씨.”
로라가 다과를 준비하러 가고, 두 사람은 폭신한 소파에 앉았다.
“청혼서도 이 정도로 왔겠지.”
그녀의 책상에 잔뜩 쌓인 서신들을 힐끔거린 아르제오가 중얼거리자, 레이라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청혼서는 언제까지 신경 쓸 거예요?”
“평생. 평생 기억하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독점하고 있는지 되새겨야지.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그놈들 다 뿌리치고 내게 온 거니까 그대에게 더 잘해야지.”
그녀의 손끝을 살포시 잡아당겨 입을 맞춘 아르제오가 유혹하듯이 눈매를 접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지?”
레이라의 대답에 그가 들뜬 얼굴로 덧붙였다.
“그러니 청혼서들은 전부 다 없애자.”
“평생 기억할 거라면서요.”
“기억할 테니까 빨리 없애자. 꼴도 보기 싫어.”
어린아이처럼 조르는 모습에 레이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오늘 어머니, 아버지께 말씀드리고요. 어차피 모두 거절해야 하는걸요.”
“그 많은 것들에 다 거절 답신을 썼어?”
“네.”
입을 떡 벌린 아르제오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단하네.”
“어쩔 수 없죠. 아무런 대답을 안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니까요.”
“흐응.”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모조리 거절하는데도, 저택까지 찾아오는 이들이 넘쳐났다.
‘더욱 경계해야겠어. 괜한 날파리가 들러붙지 않게.’
물론 아르제오는 그런 청혼서의 주인들보다도 로이드가 더욱 신경 쓰였지만.
헤레이스가 공작가로 돌아온 건 저녁 식사 시간 직전이었다.
모두가 하루 정도는 쉬라고 하니, 레이라는 서신들에 대한 상의는 내일로 미뤘다.
그리고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만찬을 즐겼다.
여행을 다녀온 레이라를 위해 맛있는 것들을 잔뜩 내놓았는데, 아르제오는 그것들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그녀와 둘만 방에서 차를 마실 때는 긴장이 풀렸는데, 막상 식사를 시작하니 다시 긴장이 몰려왔다.
딱딱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써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그에게 살짝 상체를 기울여 속삭였다.
“긴장했어요?”
“어.”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너무 긴장해서 말이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제 상태를 깨달은 아르제오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긴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보여서 레이라는 또 작게 웃었다.
함께 있으면 어찌 이리도 웃음이 끊이질 않는지 모르겠다.
“제오가 긴장하는 건 처음 보네요.”
“나 식은땀 나는 것 같아.”
“그러다 식사 얹히겠어요.”
두 사람이 작게 속삭이며 웃자 맞은편에 앉은 헤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얘기를 그리 즐겁게 하십니까?”
“응?”
레이라가 고개를 돌리자, 공작 부부까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그녀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디저트가 나올 즈음에는 에드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은인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죠.”
“예.”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헤레이스와 데이지, 에드가를 차례로 바라보고는 입을 뗐다.
“레이라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그 한 마디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식탁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레이라를 향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 시선들을 받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하려고 해요.”
세 사람은 모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들이었다. 아마도 순수하게 기뻐하고 싶은데, 그녀의 상처를 걱정하는 것인 듯싶었다.
폐위된 직후에도, 레이라는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줄곧 모든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였지만, 가족들은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레이라는 한껏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앞으로는 제오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세 사람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 네가 원한다면 우린 그걸로 된단다.”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건 공작 부인, 데이지였다. 그에 이어 헤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은인이시지 않습니까. 축하드립니다, 누님.”
그 말에 레이라가 수줍게 웃는데, 옆에 있던 아르제오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은인이라는 호칭은 바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조용하던 공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요. 은인 대신 다른 호칭이 좋겠습니다.”
그러더니 아르제오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에드가를 향해 말했다.
“아버님.”
“풉.”
“어머님.”
“어머, 그럼 사위라고 불러야 하나요?”
웃음을 참기 급급한 에드가와 달리 데이지는 여유로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럼 전 형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그게 좋겠습니다.”
세 사람과 아르제오의 대화를 보며 레이라는 그게 뭐냐며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세 사람은 더욱더 마음이 놓였다.
누군가를 만나 다시 마음을 내어주는 것을, 그녀가 상처로 여기지 않아 줘서. 다시 결혼이라는 선택을 저리 웃으면서 할 수 있게 되어서.
그들은 그저, 레이라의 행복만을 바랐다.
“결혼 후에는 레이라가 하는 일도 있으니, 제가 공작령으로 올 생각입니다.”
“어머나.”
데이지가 의외라는 듯 입술을 매만졌지만,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건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공작령으로 오겠다는 말에 제일 기뻐한 건 헤레이스였다.
“괜찮은 겁니까?”
“괜찮게 만들 겁니다.”
걱정스러워하는 에드가에게도 아르제오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더 없이, 정말 더없이 행복한 대화였다.
* * *
결혼 허락을 받은 이후, 두 사람은 차근차근 결혼을 준비했다.
레이라는 결혼식에 대한 것들은 대부분 아르제오의 뜻에 따랐다. 그에게는 처음이고 그녀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이쪽도?”
“네.”
약초를 관리하는 레이라를 옆에서 유심히 관찰하던 아르제오는 곧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옆에서 함께 약초들을 살폈다.
“어차피 값을 받고 약초를 넘기니 그냥 상단을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
“그렇죠?”
레이라의 옆에 쭈그리고 앉은 아르제오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요 며칠 공작가에 지내는 동안 그녀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레이라는 약초를 많은 곳에 공급하기 위해 아예 상단을 만드는 것이 어떤지 고민 중이었다.
“이스가 상단 운영을 맡아 줄 사람을 모집해 준다고도 했어요. 그렇게 하면 전 약초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네.”
아르제오는 공작령에 온 이후로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레이라가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려는 것도 좋아 보였고, 그저 그녀가 하는 일들은 괜스레 제가 다 뿌듯했다.
게다가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러면, 상단 이름은 플로스 어때?”
“예쁜 이름이네요.”
“맞아. 그대는 꽃처럼 예쁘니까.”
“…왜 얘기가 그렇게 돼요?”
“그냥.”
약초밭에 앉아 알콩달콩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 근처에는 누구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저리 좋아하시니….’
로라는 조금 서운한 듯 입술을 비죽였지만, 웃는 레이라의 얼굴에 곧 따라 웃었다.
저리도 행복해하니 차마 방해할 수가 없는 건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섬에 와 있던 모두는 괜스레 다른 일거리를 더 찾으며 흩어졌다.
그런 그들을 아르제오가 힐끔거리고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공작가에서 지내며, 그곳의 모두가 정말 마음 깊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이 피부에 와 닿았다.
아르제오마저 그들이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만큼 레이라가 사랑스러웠으니.
물론 그녀가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았다면 조금 질린 얼굴을 했을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