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아무리 그래도, 공녀님 계신다고 어린 시절까지 부정하시니 좀 서운하네요.”
입가를 미세하게 파르르 떤 신디가 들으란 듯이 말했다.
“틀린 말 한 거 없는데? 난 어린 시절도 영애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건 그렇지. 신디 네가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는 게 더 맞겠네.”
루이스까지 아르제오를 거들고 나서자, 신디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제가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해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움켜쥔 손이 얼마나 힘을 준 건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뒤돌아 멀어지는 신디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루이스가 목소리를 낮춰 레이라에게 말했다.
“이야, 공녀님 의외로 강단 있으시네요.”
“그런 편이에요.”
“제오가 사람을 참 잘 만났어요.”
“저도 동의합니다, 형님.”
다시 세 사람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퍼지는 가운데, 연회장에 황제가 왔음을 알렸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술렁이던 귀족들이 전부 황제를 바라봤다.
“오늘 이 기쁜 자리에 모두 참석해 주어 영광이오. 줄곧 아무도 소식이 없어서 골머리를 썩이었는데, 드디어 한 명 이렇게 보내는구려.”
푸근한 말투에 귀족들이 작게 웃었다.
“3황자 아르제오와 포레스티아 공녀의 약혹을 모두 축복해 주시오.”
간단한 한마디를 끝으로 황제가 잔을 들자, 모두가 따라서 잔을 들었다.
부디 오늘 연회를 즐겨 달라는 말과 함께 황제는 자리에 앉았다.
황제의 말이 끝나자 귀족들은 그제야 조금 긴장을 푼 듯, 저들끼리 웃으며 연회를 즐겼다.
잠시 자리를 지키던 황제는 곧 자리를 비키며 시종장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시종장이 곧장 레이라 일행에게 다가왔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레이라가 슬쩍 아르제오와 루이스를 바라보니 시종장이 덧붙여 말했다.
“황자 전하들께서도 모두 동행하시랍니다.”
“그래?”
아르제오는 원래부터 함께 갈 생각이어서 레이라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곧 시종장을 따라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알현실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로렌스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제오는 지금 말씀하시려는 거라고, 직감했다. 필이 전해 준 정보처럼, 오늘 황태자를 다시 정할 거라고.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런 인사는 됐네. 이제 곧 한 식구가 될 테니 말이야.”
황제의 말은 여전히 순수하게 들리지 않아서 레이라는 그저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계산적인 것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리히덴의 황제는 그게 과하게 겉으로 드러날 뿐.
“다시 한번,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한다. 오늘 내가 부른 건, 곧 발표할 황태자를 먼저 알려 주기 위함이다.”
예상대로, 황제는 황태자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루이스와 로렌스는 의외로 덤덤한 얼굴들이었다. 아르제오는 애초에 그 자리를 탐내지 않았으니 관심 없는 듯했다.
어느 한쪽이 다칠까 그것만을 염려했는데, 그마저도 이제는 지쳐 떠나려던 참이었다.
황제는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레이라를 응시하며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내 뒤를 이어 황제가 될 황자는, 아르제오다.”
“예…?”
얼굴을 굳힌 아르제오와 달리, 로렌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얼굴이었다.
“싫습니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아르제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뭐야? 어째서 싫다는 거냐.”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전 발루아로 떠날 겁니다. 그러니 황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공녀가 리히덴으로 오는 방법도 있지.”
왜 그런 당연한 걸 모르냐는 말투였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노린 것이라는 걸 명백히 드러냈다.
“하….”
아르제오는 허탈함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사람이 황제로서, 정말 리히덴을 위하는 게 맞을까.
그저 포레스티아령을 손에 넣는 것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는 듯했다.
“전 리히덴을 떠날 겁니다. 그녀와 함께 포레스티아령으로 가겠습니다.”
“같은 말을 하게 하는군. 네가 다음 황제가 되면, 포레스티아 공녀는 황후가 되는 거다. 그럼 지금 진행 중인 평화협정보다, 두 제국의 사이가 더욱 돈독해지겠지. 전쟁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포레스티아령에서 기를 쓰고 막을 텐데.”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리히덴이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질 터였다.
물론 그건, 레이라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고 볼모로 쓰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황제의 말에 레이라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르제오는 잔뜩 표정을 굳히고 있었고, 로렌스는 이 상황이 우스운 듯 픽 웃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진행 중인 평화협정에 문제라도 생길까 조마조마했다.
온전한 평화야말로, 온 국민이 원하는 것일 터. 루이스는 그걸 최우선으로 하고 싶었다.
“전 황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레이라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단호히 말했다.
“뭐?”
“전 양국의 평화를 위해 황자님과 결혼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황제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하지만 레이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얼굴이었다.
“그럼, 공녀 때문에 아르제오가 계속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말인가? 제 나라를 버리고 공녀에게 가야 한다고?”
그 말에 레이라는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게 포레스티아의 입장인가? 절대 리히덴에 여지를 주지 않겠다고? 평화협정이 정말 의미는 있는 건가?”
“폐하.”
황제가 얘기를 그리로 이끌고 가니 루이스가 나섰다.
“두 사람의 일은 평화협정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부디 고정하시지요.”
“포레스티아령을 손에 넣는 이에게 선위할 것이다. 그 뜻에는 변함이 없으니 알아서들 처신하라.”
더 이상의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며 황제는 모두를 물렸다.
축객령으로 알현실을 빠져나온 그들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우습군.”
무거운 분위기에 먼저 침묵을 깬 건 로렌스였다.
“형님.”
“폐하께서는 네 말대로, 포레스티아를 손에 넣은 이에게 선위하시겠다는 것 아니냐.”
비릿하게 웃는 로렌스의 말에 루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포레스티아가 제 손에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는 게지.”
아르제오는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잘들 해 보라지.”
픽 웃은 로렌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은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레이라가 머물고 있는 궁으로 함께 갔다.
“어쩔 셈이냐.”
루이스가 먼저 얘기를 꺼내니 아르제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떠날 겁니다. 어차피 공작령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니, 예정대로 갈 겁니다.”
그 대답에도 루이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면목 없군요. 공녀님 기분이 상했을까 우려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전하.”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는 레이라를 확인한 뒤에야 루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루아의 황제가 보내는 이와 마지막 회의가 끝나면 평화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황제는 포레스티아령을 아직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저희는 예정대로 떠날 겁니다. 전 황제가 될 생각 없어요.”
루이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뭐, 난 네가 황제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만.”
“그런 말씀 마시죠. 전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법 단호하게 말한 탓에 루이스가 픽 웃었다.
‘그런 면이 나쁘지 않다는 건데.’
그 오랜 시간 로렌스와 제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한 것만 봐도, 아르제오는 모질지 못한 사람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분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뭐? 아예 오지 않겠다고?”
“어차피 결혼하면 공작령에서 살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폐하께서도 포기하시겠죠.”
확실히 황태자 삼으려고 해도 당사자가 없으면 뭘 어쩌겠는가.
어깨를 으쓱인 루이스는 아르제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뜻대로 해라. 내가 이제 와서 널 무슨 수로 막겠느냐.”
레이라는 그저, 이런 극단적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리히덴과 발루아를 자유롭게 오가며, 시타델의 약초를 더욱 널리 알리고 싶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널리 쓰이도록.
이런 식으로 황태자 지목을 피하기 위해 발루아로 다시 떠나게 되면, 이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을 터였다.
루이스에게는 그리도 단호하게 말했지만, 레이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르제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대 생각은 어때? 그래도 괜찮겠어?”
“어쩔 수 없죠.”
마냥 평화롭게만 지내고 싶은데, 어쩐지 주위에서 그냥 놔두질 않는다.
“제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요.”
“고마워.”
예쁘게 웃는 레이라를 확인한 아르제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발루아와 마지막 협정 날짜가 언젭니까?”
“두 사람의 축하연이 끝나고 나흘 뒤에 예정되어 있다.”
“그럼 저희는 내일 당장 출발하죠.”
어차피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돌아간들 귀족들의 궁금증을 채워 주어야 할 테니까.
아르제오의 얘기를 들은 루이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루이스의 중얼거림에 레이라는 아마도 둘 다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형님도 오늘은 쉬시죠. 뒤는 형님께 부탁할 테니까요.”
이제껏 두 황자 사이에서 아르제오가 귀찮은 일들을 떠맡았으니, 이번엔 루이스가 대신해 줄 차례였다.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느긋하게 다녀와라. 나는 네 생각보다 더 유능하니까 말이야.”
* * *
다음 날, 아르제오와 레이라는 이른 아침 황궁을 떠났다.
어쨌든 결혼하기 위해서 가는 거라고 하니 황제도 순순히 보내 주었다.
두 사람의 혼인이 이루어져야, 자신의 목적도 이루어질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덕분에 두 사람의 발루아행은 순조로웠다.
“정말 상단이라도 차리시면, 저희와도 거래해 주셔야 합니다?”
황궁을 나설 때는 황제의 배웅을, 그리고 리히덴 국경에서는 필의 배웅을 받았다.
“그것 때문에 국경까지 쫓아왔나?”
아르제오가 질린 얼굴로 물으니 필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저희 정보상 최고 고객님이 보고 싶어질 테니 온 거죠.”
“징그러운 소리 그만하고 가.”
“이리 제게 매정하셔도 됩니까?”
“돼.”
둘의 실랑이를 보며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보고 있으면, 아르제오가 필을 가까이 두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만 가지.”
“또 봐요, 필.”
“조심히 가세요, 두 분.”
정중히 인사를 건넨 필은 두 사람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 국경까지 뒤쫓아온 진짜 이유는 이쪽이었다.
“전하, 몇몇 왕국에서 공녀님에 대한 불만이 많다 합니다. 청혼서를 마냥 방치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필의 말에 아르제오는 서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