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81)화 (81/122)

<81화>

슬슬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아르제오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귀족들과 회담이 잦았던 것도 그에 관한 것일 터. 당신이 정하신 황태자에게 지지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황태자가 되는 데에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루이스와 로렌스, 둘 중 누가 황제의 의중에 있는지는 아르제오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제오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전하께서는 발루아로 떠나실 생각이시죠?”

“그래.”

“전하께서 가셔서 공녀님의 약초 키우는 비법 좀 빼내 오세요.”

필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목소리를 낮춰 장난스레 속삭였다. 그러자 아르제오는 참지 못하고 픽 웃어 버렸다.

“넌 못 해. 레이라만 가능한 일이야.”

“쳇.”

필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약초가 그 시타델 섬에서 나온다는 걸.

그리고 그 섬에서 무언가 식물을 기를 수 있는 건 레이라뿐이라는 것도.

“어쨌든, 황태자가 정해지면 전하께서는 이제 마음 편히 떠나실 수 있겠네요.”

“그렇겠지.”

황태자가 정해지고 머지않아 황제는 선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 이번에 황태자가 정해지면 아르제오의 임무는 끝나는 셈이었다.

이전에는 황태자인 로렌스의 지지 세력을 위해 물밑에서 움직였다면,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시타델로 가 레이라의 일을 도와야지.”

“어머, 또 일하려고요?”

의아한 듯 묻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요?”

“응?”

고개를 기울이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제가 다시 청혼해야 기억하고 있을 건가요?”

그녀의 작은 속삭임에 아르제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필이 아르제오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심으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전 약초 좀 둘러보고 올게요.”

“아, 직원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약초를 드리죠.”

“고마워요, 필.”

레이라는 둘이 얘기를 나누라며 필이 불러 준 직원과 함께 온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약초에 대해서 그녀가 무언가 말하면, 직원이 열심히 받아적었다.

중간중간 원하는 약초는 잎을 따서 씨앗으로 만들어 챙겼다.

그 과정을 지켜본 직원이 무언가 열렬히 물으면, 레이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르제오는 한시도 레이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지금 전하의 눈빛에 형체가 생긴다면, 아마도 꿀이나 설탕 덩어리일 겁니다.”

“뭐?”

“그런 눈으로 공녀님을 보고 계시니까요.”

“칭찬이지?”

“그럼요, 늘 무미건조하거나 찬바람이 쌩쌩 부셨으니까요.”

“욕 같은데.”

“아닙니다.”

절대 아니라고 잡아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필이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좋아 보이십니다.”

“좋아.”

아르제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필은 곧 서류를 꺼내 들었다.

“자, 그럼 이제 이것들 확인하시죠. 회담에 참여한 귀족들 리스트와 그들의 움직임입니다. 고객님께서 만족하셔야, 제가 부담 없이 가격을 책정할 수 있으니까요.”

“장사치가 따로 없군.”

픽 웃은 아르제오는 이내 필이 건네는 서류를 꼼꼼히 살폈다.

중간중간 레이라를 힐끔거리긴 했지만.

* * *

작은 여유를 즐기는 사이, 황제가 지시한 축하연의 날짜는 금세 다가왔다.

그날은 아르제오와 느긋하게 황궁 후원을 산책하고, 쉼터에서 짧은 티타임을 가졌다.

이런 생활이 줄곧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며 느긋한 시간을 즐긴 두 사람은 오후부터 분주히 준비에 들어갔다.

저녁에 있을 축하연에 참석해야 했으니 말이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아침부터 준비에 들어갔을 테지만, 두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이 연회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으니.

레이라는 과한 치장 대신, 그녀 특유의 분위기가 잘 살아나도록 옅은 화장과 화사한 드레스를 골랐다.

화려함 대신 화사함, 매혹적인 것보다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여유롭게 연회장으로 향했다.

거대한 연회장으로 두 사람이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둘을 향했다.

레이라와 아르제오야말로,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니 말이다.

“저분이 포레스티아 공녀시군요?”

“존재감도 없는 3황자님이 뜬금없이 국경의 공녀님과 약혼이라니….”

루이스나 로렌스에게만 알랑거리던 몇 귀족들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제껏 아르제오를 무시해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근사한 연미복과 잘 어울리도록 디자인된 드레스. 두 사람은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누구도 선뜻 두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루이스가 느긋한 얼굴로 나타났다.

“오늘따라 한층 더 아름다우십니다.”

“감사합니다, 루이스 전하.”

아름답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백금발을 반만 틀어 올려 한층 더 청초해 보였다.

루이스의 칭찬에 아르제오가 뚱한 얼굴로 레이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공녀님께 손댈 일 없으니 안심해라.”

그런 아르제오를 보며 루이스가 말하자, 레이라가 미소를 머금었다.

“루이스 전하께서 마음먹으셔도, 제게 손대실 수는 없으실 겁니다.”

“예?”

“손을 대고 안 대고,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드러운 미소로 단호히 말하는 레이라를 보며 루이스는 픽 웃어 버렸다.

“이거, 공녀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겠습니다.”

“제가 아니라, 그 누구 앞이든 말을 조심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런 위치를 바라고 계시니까요.”

레이라의 말에 아르제오가 슬쩍 주변을 살폈다.

차마 먼저 가까이 다가오는 귀족들은 없었고, 그저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폐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실지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귀족들과 거리가 먼 것을 확인하고도 아르제오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루이스에게 속삭였다.

“폐하께서 마음을 결정하시면, 떠날 건가?”

“예.”

아르제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줄곧 이날만을 기다려 왔으니 말이다.

“어차피 공작가로 넘어가 공작 부부께도 저희의 결혼을 허락받아야 하니까요.”

“그건 그렇네.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

“오늘 말씀을 끝으로, 두 형님께서 이번에는 깔끔히 물러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루이스는 쓰게 웃었다. 로렌스가 황태자임에도 자신이 이 분란을 만들었으니.

하지만 이번에도 안 된다면 루이스도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국을 위하는 길은 분명 또 있을 거라고. 아르제오 말처럼, 이번에는 타협점을 찾을 생각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이스 전하, 아르제오 전하.”

좀처럼 그들에게 아무도 다가오지 못했는데, 돌연 신디가 다가서며 인사했다.

“그리고 공녀님도요.”

레이라는 그녀가 어쩐지 엘라와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닮았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두 분 약혼 축하드립니다.”

생긋 웃으며 다가온 신디는 먼저 이 연회의 주인공인 두 사람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고마워요, 영애.”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두 사람이 대답하자, 신디의 시선이 찰나 둘의 손을 향했다.

“보기 좋네요.”

분명 웃고 있었는데, 말에 가시가 있는 느낌이었다.

“루이스 전하께서는 왜 여태 소식이 없으셔요? 인기도 많으시면서.”

신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자, 루이스가 호쾌하게 웃었다.

“인기가 많기는.”

“정말이잖아요. 다정하시니까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할 일이 많으니까.”

“그런가요? 곁에서 지지해 줄 사람이 있다면 전하께서 일하시는 데도 더 든든하지 않을까요?”

“글쎄. 나 혼자서는 해내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루이스의 눈빛은 서늘했다.

신디의 말은, 지지 세력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루이스가 기분 나쁜 것도 당연했다.

그 미묘한 위압감을 눈치챈 신디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요, 전하. 그저 마음 편한 사람도 곁에 두시길 바라여 드린 말씀입니다.”

“그건 그대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냉정한 루이스의 말에 신디는 고개를 숙인 채로 치맛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조심하도록 해.”

둘의 대화가 끝나자, 잠시 서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제가 처신을 경솔히 했네요. 기분 푸세요, 전하.”

잠깐의 정적 끝에 신디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루이스도 표정을 풀었다.

“어릴 적엔 가깝게 지냈으니 말이다.”

“예, 가끔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신디는 슬쩍 아르제오를 힐끔거리며 부러 환히 웃었다.

“실은, 제오 전하께서 절 신부로 받아 주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홀랑 가 버리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용기를 내 볼 걸 그랬습니다.”

“그건 좀 위험한 발언 아닌가?”

루이스가 슬쩍 레이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머, 제가 또 실수했나요?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니죠, 공녀님?”

설마 정말 기분이 상했다 말할까, 그리 생각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어릴 때의 일이니 기분 상해 하는 건 이상하겠죠.”

“그럼요. 이미 지난 일이고, 그저 추억에 한 말인걸요.”

“그래도 전 그리 달갑지 않네요.”

“네?”

“썩 유쾌하지는 않으니 삼가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레이라가 하도 온화하게 웃으며 말하니, 신디는 잠시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공녀님께서 질투심이 좀 있으신가 봐요. 투기는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이니 너무 드러내지 않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신디가 정말 걱정스러운 듯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엘라와 닮았지만, 이런 점은 달랐다. 엘라는 제 감정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었다.

“확실히, 투기는 좋지 않은 감정이죠.”

“아무래도 그렇죠? 그러니 공녀님께서도 앞으로를 위해서는 조금….”

“하지만.”

제 말을 인정해 주는 듯한 말투에 신디가 덧붙여 말하는데, 레이라가 중간에 말을 뚝 끊었다.

“숨겨야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질투란 확실히 불편한 감정이 맞지만,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잘못은 아니죠. 연인이라면, 상대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똑 부러지는 레이라의 말에 신디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아르제오와 루이스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르제오가 레이라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살짝 그녀에게 기댔다.

“그대 말이 맞아.”

질투를 느끼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연인 간의 예의일 터.

“그러니 레이라가 불편하지 않게 그만 가는 것이 어때?”

“예?”

레이라에게 기댄 채로 아르제오가 말하자 신디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난 어차피, 어릴 때도 지금도, 그다지 영애와 가깝게 지낸 기억이 없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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