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80)화 (80/122)

<80화>

목소리 톤과 말투,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레이라는 불편했다.

어쩐지 비꼬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이 아닌.

레이라가 미소를 지우자, 신디가 얼른 덧붙였다.

“황자님들 중에는 아내를 맞으시는 게 처음이니 폐하께서 기뻐하실 만도 하죠.”

“그런가.”

신디의 말에 아르제오가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였다.

“드레스를 맞추러 왔나 본데, 일 보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레이라에게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전혀 다른 표정에 신디는 저도 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자, 레이라.”

“네.”

그러자 신디가 조금 다급하게 두 사람을 붙잡았다.

“그,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 황궁으로 초대 한번 해 줘요.”

신디가 눈웃음치며 아르제오를 바라봤지만, 그는 레이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형님들과도 가깝게 지내는 건가?”

“루이스 전하는 가끔 뵙습니다. 로렌스 전하는 뵌 지 오래됐지만요. 그렇지, 모처럼 공녀님도 계시니 함께 차라도 마셔요.”

“여기 드레스를 주문하러 온 거 아닌가?”

“드레스는 언제든 주문할 수 있는걸요. 괜찮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묻는 것이, 신디를 보고 있자니 레이라는 꼭 엘라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혹시 공녀님께서 제가 불편하신 건 아니죠? 그래도 제오 아니, 황자님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니 공녀님과도 잘 지내고 싶어요.”

눈매를 휘며 생긋 웃는 얼굴이 퍽 귀여웠다. 하는 말은 귀엽지 않았지만.

말실수처럼 보였지만, 그를 제오라고 부른 것도 거슬렸다.

신디가 매달리자 아르제오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네, 불편하네요.”

그런데 그가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레이라가 대답했다.

“네?”

“전 영애를 방금 처음 만났으니까요. 초면인 사람이 편할 수는 없잖아요.”

대놓고 불편하다고 할 줄은 몰랐는지 신디가 조금 당황스러워했다.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대답에 씩 웃으며 덧붙였다.

“어차피 조만간 연회에서 볼 테니 그때 인사 나눠.”

그러고는 더 기다리지 않고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손을 잡고 걸음을 뗐다.

“그럼, 연회 때 뵙겠습니다.”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신디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살롱 앞을 벗어났다.

그 길로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필은 점심 먹고 잠깐 만나면 되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레이라와 단둘이 있는 것이 좋은지 싱긋 웃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레이라는 빤히 아르제오를 응시하다 물었다.

“필리아…. 후작 영애라고 했나요?”

“응? 왜?”

“오래 알고 지냈나 봐요?”

“그런가?”

테이블에 턱을 괸 아르제오는 관심없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도 같네. 마주치는 게 지겨운 걸 보면.”

“지겨워요?”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신디는 긴 시간 함께했던 것을 내세우고 싶은 듯 여러 번 강조했는데, 정작 아르제오의 반응이 이러하니.

“그대 얼굴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은 오래 보면 지겨워. 게다가 필리아 후작은 속이 시커먼 사람이야. 만날 때마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일까, 생각해야 하잖아. 귀찮아.”

저쪽은 아르제오를 소꿉친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정작 그는 경계 대상으로 여기고 귀찮아하고 있었다.

“근데 왜? 신경 쓰여?”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이번에는 양손으로 턱에 꽃받침을 한 아르제오가 싱긋 웃었다.

“질투나?”

어쩐지 기대 가득한 눈이었다.

차분히 그 시선을 마주하던 레이라가 부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떠올라서요.”

“만났던 사람?”

“발루아 제국의 현 황후요.”

그녀의 대답에 아르제오가 흠칫했다. 잔뜩 표정을 굳힌 그는 슬쩍 시선을 떨어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전…. 이라면, 그대가 황후였을 때 만났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라를 확인한 그는 조금 다급하게 말했다.

“절대로, 앞으로 다시는 저 여자와 마주치는 일이 없을 거야. 가까이 오면 얼굴에 침을 뱉을게.”

“네에? 얼굴에 침을 뱉으면 어떡해요.”

놀란 얼굴을 하는 그녀에게 아르제오는 그걸로 부족하다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내게 접근하면 후작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해야겠어.”

“그건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

“뭐든. 그대가 옛날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그걸로 족해.”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똑바로 마주하며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나는 발루아의 황제랑 다르니까.”

“애쓰지 않아도 알아요.”

로이드와 다르다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았다.

신디가 조금 거슬렸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저 순수한 궁금증에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으로 인해 아르제오가 조금 불안해하는 것 같으니 마음이 쓰였다.

“제오가 그랬잖아요. 전 경험자라서 같은 실수를 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때 했던 말을 레이라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었으니, 그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르제오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경험으로 여기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멋진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불편했을 뿐이지, 그때도 지금도 걱정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아요.”

엘라가 곁을 맴돌 때도 그녀는 딱히 불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체념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레이라는 제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조금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도 이제, 누가 와도 안 뺏겨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 듯 아르제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뭐야, 진짜…. 설레게.”

“제오가 이러니 전 누가 와도 불안하지 않아요.”

제 감정을 저리 입에 담아 주니 말이다.

과할 만큼 그녀의 불안을 차단하고자 하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결혼을 약속했다 한들, 사람의 관계는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실제로 로이드가 그녀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 주기도 했고.

하지만 아르제오를 보고 있으면 생각이 달라졌다.

이렇게 계속 서로 노력하면, 무슨 일이든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테이블 위로 손을 꼭 붙잡고 있던 두 사람은, 점원의 시선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손을 놓았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그제야 느긋한 걸음으로 필에게 향했다.

두 사람은 미리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인 필이 관리하는 온실로 향했다.

레이라가 그곳을 다시 보고 싶다고 했으니.

일전에는 숙소에서 신기한 통로를 통해 갔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길을 이용했다.

번화가에서 조금 멀어지자, 온실이 보였다.

그 앞을 지키는 사람들을 본 레이라는 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 했던 것을.

‘정말이었네.’

그들은 아르제오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곧장 비켜서 길을 터 주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 공녀님을 다시 뵐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필.”

필은 헤실헤실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레이라가 제도에 머무는 동안 지금껏 필은 잠시 자리를 비워서 이제야 갖게 된 만남이었다.

필은 싱글벙글 웃으며 아르제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좋으시겠습니다?”

“뭐가.”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공녀님은 이제 앞으로 계속 리히덴에 계시는 겁니까?”

“아니.”

“예? 다시 가십니까?”

필이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이번엔 내가 같이 가.”

“오.”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린 필은 얼른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온실에 준비한 티 테이블로 안내했다.

필이 직원을 시켜 차와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레이라는 천천히 온실 안의 약초들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새로운 약초들이 늘어났네요?”

“알아보시는군요. 멀리서 들여온 귀한 것들입니다.”

“갖고 싶어? 줄까?”

“왜 전하께서 제 약초들의 행방을 정하십니까!”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고는 레이라가 작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괜찮아요, 필이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가져갈 수 있어요.”

“공녀님까지!”

직원이 차를 따라 주고 돌아갈 때까지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웃던 필은 슬쩍 아르제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공녀님은 평화협정이 안정될 때까지 계신다고 하셨죠?”

“네, 일단은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중간에 시타델에 다녀와야 할지도 모르지만요.”

“아, 거기서 약초를 키우신다고 하셨죠? 소문이 자자합니다.”

필은 경쟁자라고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온실에는 아무도 없건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비법 좀 나눠 주시죠.”

그런 필을 보니 레이라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직 저만 할 수 있는 비법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어쩔 수 없군요.”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신 필은 슬쩍 아르제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매우 흐뭇한 얼굴로 웃는 레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축하 인사가 늦었군요. 소식 들었어요. 약혼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아르제오가 레이라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은 필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그녀를 발루아로 보낼 때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했으니까.

“두 분의 약혼을 위해 폐하께서 축하연을 여신다죠?”

그 말에 레이라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 연회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으니.

이미 3황자의 약혼 축하연의 소식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파다했다. 그러니 정보상인 필이 모를 리가 없었고.

필은 두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테이블에 턱을 괴며 씩 웃었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필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은근슬쩍 물으며 아르제오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었다. 이번엔 그가 발루아로 갈 거라는 얘기를.

“그래서.”

웃는 레이라를 보며 잠자코 있던 아르제오가 필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자리를 비웠던 이유는?”

씩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필을 보며 기분 나쁘게 웃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정보는 좀 비쌀 텐데요?”

“내가 언제 값을 신경 쓰는 거 봤어?”

“없었죠. 그러니 제가 이렇게 성심성의껏 모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은.”

아르제오는 귀찮은 듯이 손을 휘저으며 어서 말하라고 재촉했다.

“폐하께서 최근, 제르딘 공작과 회담을 가지셨습니다. 재상도 그 자리에 있었고요. 이후로도 몇 차례, 고위 귀족들도 따로 부르셨습니다.”

간단히 설명을 이어 가던 필이 덧붙여 말했다. 아르제오가 기다리던 결론을.

“폐하께서 곧, 황태자를 다시 정하시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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