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79)화 (79/122)

<79화>

“내 생각?”

“예.”

로렌스는 레이라가 가소로운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저도 처음에는 무상으로 약초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저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잡음은 어쩔 수 없이 생기더군요. 공짜로 주는 물건이니, 더 함부로 여기는 이들도 나타나고요.”

거저 얻은 물건이니, 귀하게 다루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약초가 상해도 요청하면 또 보내 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아무리 엄선하고 추려내도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태도를 바꾸곤 했다. 그렇다고 환자는 많은데, 소량만 공급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어찌해야 했다고 생각하세요?”

레이라의 얘기를 듣던 로렌스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체계를 갖추기 전까지는 공급량을 줄이더라도 소수에게만 제공할 거다. 구하기 어려워야 소중히 다룰 테니까.”

“하지만 환자들은 체계가 갖춰지기까지 기다리지 못해요.”

“앞으로 살릴 환자가 많을 텐데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지.”

“그게 전하와 저의 견해찹니다.”

“뭐?”

“전하께서는 체계를 갖추는 걸 더 중히 여기시지만, 전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해요. 소수만 치료받을 수 있다면, 다른 환자들은 고통 속에 허덕이거나 죽겠죠. 전 그들을 외면할 수 없어요.”

애초에 이 일의 목적은 황후였던 시절, 제대로 된 구호 활동 한번 해 보지 못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제라도 무언가 하나쯤은 도움이 되고 싶어서.

“개선할 부분은 차차 개선하면 되겠죠. 느릴 수 있겠지만, 희생을 내며 서두르는 것보다는 느긋한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사이 관리 소홀로 버려지는 약초들은?”

약초를 재배하는 인력과 버려지는 약초들, 그리고 관리되지 않는 거래처. 로렌스는 그 모든 것들을 묻고 있는 거였다.

“약초는 다시 기르면 되지만, 목숨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희생을 내지 않을 수 있다면, 레이라는 그러고 싶었다. 이는 루이스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로렌스는 다르게 생각했다.

희생이 따르더라도, 빠르게 체계를 안정시켜야 결과적으로 희생도 줄어들 거라고.

“그래서 가격을 책정했어요. 값을 치르고 사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함부로 다루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아마도 있을 것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이들이 어디에나 있듯.

아마도 완벽한 해결법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문제는 아마도 계속 있겠죠. 호의를 악용할 사람을 처음부터 간파하기는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정당한 가격으로 거래하며 신뢰를 쌓는 방법을 택했어요. 호의를 베푸는 걸 멈추지는 않겠지만, 제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건 저도 싫거든요.”

로렌스는 의외로 진지하게 레이라의 얘기를 들었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말이 없는 로렌스 대신 대답한 건 루이스였다.

“멋진 일을 하고 계시는군요.”

“과찬이십니다.”

루이스에게 작게 웃어 보인 레이라는 다시 로렌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맑은 시선에 로렌스는 어쩐지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대책도 나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그녀가 국경의 숲에서 했던 말이 맴돌아서.

이제껏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그 생각에 변함은 없었지만, 레이라의 부정은 신경에 거슬렸다.

그 맑은 청록색 눈을 마주하고 있자면, 정말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만 같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한 일들은 정당했는데 말이다.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사람보다 자리를 위한다….’

가만히 그 말을 되새기던 로렌스는 픽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셨으니, 나도 이만 가지. 내가 없는 게 더 편안할 테니까.”

“형님, 또 그런 말씀을….”

루이스가 말리려 했지만, 로렌스는 대충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공연히 불편한 자리였던 것 같네요.”

루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레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황자 전하. 저희도 이 자리에서 원했던 바가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아르제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루이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화협정이 끝나면 폐하께서 선위하시겠다 말씀하셨다. 조금만 더 기다리지 그랬냐? 그랬으면 불화 없이 갈 수 있었을 텐데.”

“제게 자유를 주시려고요?”

아르제오의 물음은 마치, 이제껏 로렌스를 위해 움직였는데 정말 자신에게 그럴 거냐고 묻는 듯했다.

그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오랜 시간 로렌스와 사이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까.

그래서 루이스는 씁쓸함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발루아와 평화협정을 맺는 데에 큰 공을 세우지 않았느냐. 네 덕에 이렇게 귀한 손님도 황궁을 찾아주시고, 말이다.”

루이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두 사람 없이는 평화협정이 힘들었을 거라고.

“평화협정은 어디까지 진행되었나요?”

레이라의 물음에 루이스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대답을 고민했다.

“지금은 아직, 서로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양쪽 모두 만족스럽게 체결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죠.”

발루아가 원하는 것을 내어 주고, 리히덴이 원하는 것을 얻으며 서로 평화롭게 지낼 방법.

평화로운 방법인 대신, 시간과 노력이 드는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을 들여서 하는 일인 만큼 잘 될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스는 아르제오를 슬쩍 힐끔거렸다. 그는 줄곧 레이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형제 사이에서 흔들리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오로지, 레이라만을 보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쩐지 조금 서운함을 느끼는 루이스는 스스로가 황당했다. 다행스럽게 여기면서도 말이다.

“참, 제도는 좀 둘러보셨어요?”

“전에 한번 본 적은 있어요.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요.”

그때는 쫓기는 신세여서 구경할 정신도 없었다.

필이 마련해 준 숙소에서 내다 본 거리와 필이 직접 관리하는 온실을 본 게 다인 정도.

이 정도면 거의 필이 제공한 것들만 봤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그럼 이 이상 제가 방해하면 안 되겠군요. 제오, 공녀님께 제도를 구경시켜드리는 게 어때?”

“형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까칠하긴.”

아르제오의 시선이 정말 방해꾼을 보는 듯해서 루이스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모쪼록 리히덴에서 지내는 시간, 즐겁게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전하.”

“나중엔 제게도 시간을 내어 주시죠.”

“형님.”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다.”

레이라를 지키려 한껏 방어적인 아르제오를 보며 루이스는 픽 웃었다.

제 동생이 이토록 감정을 다 드러낸 것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특별히 제오 너도 동행할 수 있도록 할게.”

“당연합니다.”

경계 어린 아르제오의 시선에 루이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황제가 얼굴을 보자며 열었던 티타임은, 아르제오의 폭탄 발언을 남기고 그렇게 끝이 났다.

* * *

황궁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역시나 함께 잠들 수는 없었다.

대신 아르제오는 잠들기 직전까지 레이라의 곁에 있다가 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침 일찍 그녀가 일어날 즈음에 궁으로 다시 찾아왔다.

피곤하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아르제오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고만 답했다.

“오늘도 전하와 외출하시죠?”

리히덴의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레이라의 시중을 들게 된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오늘은 새 드레스를 보러 가기로 해서요.”

“그러고 보니 연회를 여신다고 하셨죠?”

“그러지 않으셔도 됐는데…. 그렇게 됐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연회를 열어 축하할 일이죠!”

어색하게 웃는 레이라를 보며 시녀가 주먹을 불끈 쥐고 열정적으로 떠들었다.

티타임 이후로, 황제는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하며 연회를 열겠다고 했다.

레이라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아르제오가 매일 같이 찾아와 함께 외출하며 시간을 보내니, 시녀들은 마음껏 그녀를 치장했다.

오늘은 연회에 참석할 때 입을 드레스를 보러 가기로 한 것이었다.

느긋하게 가도 상관은 없겠지만, 아르제오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서 또 이른 시간부터 올 터였다.

그리고 곧 예상대로, 아르제오가 그녀의 궁으로 찾아왔다.

“이렇게 일찍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데.”

처음에는 레이라가 일어나기 전부터 아르제오가 와 있었다.

물론 레이라가 그러지 말라고 한 뒤로는 오는 시간을 조금 늦췄지만.

“드레스만 보러 갈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주목적은 드레스를 보러 가는 거였지만, 외출 때마다 두 사람은 제도의 이곳저곳을 다녔다.

함께 제도 거리를 둘러보고,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한 명소도 다니고. 들로 호수로 나들이도 다녔다.

그 와중에 아르제오는 레벤의 씨앗을 구하는 일에도 열중했다.

오늘은 드레스를 보러 갔다가 필에게 다녀올 예정이었으니 두 사람은 일찌감치 황궁을 벗어났다.

“황궁에서 지내면서 이렇게 황궁 밖 출입이 자유로운 건 처음이에요.”

“그런가? 난 원래부터 이랬으니까.”

레이라가 볼 때는 황궁 밖 출입이 자유로운 아르제오야 말로 신기한 상황이었다. 황후였을 적에는 꿈도 못 꾼 일이었으니.

두 사람은 황궁을 벗어나 리히덴 제도에서 유명한 디자이너의 살롱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레이라의 드레스를 주문한 두 사람은 함께 살롱을 나서다가, 웬 귀족 영애와 마주쳤다.

“오랜만에 뵙네요, 아르제오 전하.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는데.”

갈색 머리칼을 틀어 올린 어여쁜 영애였다.

옆에 선 레이라는 이제껏 황궁을 벗어나면 아르제오를 알아보는 사람이 그다지 없었기에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아, 그러네. 오랜만이군.”

여자는 싱긋 웃으며 아르제오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레이라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필리아 후작가의 신디 필리아라고 합니다. 곧 열릴 연회의 주인공이신 공녀님이시지요?”

생긋 웃는 신디를 바라보던 레이라가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레이라 포레스티아라고 해요.”

“과연, 그러니 연회가 열리는군요.”

“네?”

“대단하신 공녀님이시니 약혼 축하연이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디의 말에 레이라는 어쩐지 조금 불편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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