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78)화 (78/122)

<78화>

“어머니도 후원을 좋아하셔서. 비가 오는 날도 꽃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만든 곳이야.”

아르제오에게서 어머니 얘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으니까요.”

“어머니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

“그랬나요?”

레이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쉼터로 먼저 발을 들였다.

아늑한 쉼터 안의 의자에 앉은 레이라는 들뜬 눈으로 안에서 보이는 후원을 바라봤다.

확실히 비가 오면 더 아름다울 것도 같았다.

그녀가 먼저 의자에 앉아 화원을 둘러보니 아르제오는 잠시 걸음을 멈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그의 어머니도 자주 이렇게 이곳에 앉아서 화원을 바라보고는 했었다.

감상에 젖어 있던 아르제오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옛 추억을 떨쳐냈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가 레이라의 앞에 앉았다.

“그대에게 이곳을 보여 주고 싶었어.”

아르제오가 테이블 위에 올린 레이라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아름다운 분이셨지. 그대처럼 꽃을 좋아하셨고.”

그건 이 정원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제오가 말하는 어머니에 관한 얘기는 전부 과거형이었다.

리히덴의 황제는 황자들이 어릴 적, 황후를 잃었다. 이후로 다른 황후를 맞이하지는 않았다.

테이블 위로 레이라의 손을 매만지던 아르제오는 슬쩍 쉼터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원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그리움이 묻어났다.

어찌 그립지 않을 수 있을까.

꽃들을 응시하던 아르제오가 픽 웃으며 다시 레이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님께서 그대를 보았다면 좋아하셨을 거야.”

“그럴까요?”

“그럼. 내가 이렇게 푹 빠졌으니까.”

그의 말에 레이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말인데.”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아르제오가 조심스럽게 그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이 고운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면 그대는 거추장스러워할까?”

아르제오가 테이블에 조그마한 상자를 올려놓았다.

뚜껑을 여니, 그 안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어 있었다.

그걸 발견한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가락에 댔던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아르제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표정은 도발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나를, 그대의 남편으로 받아 줄래?”

가만히 제 손에 입 맞추는 그를 바라보던 레이라가 멍하니 말했다.

“이렇게 청혼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또 있으면 안 되지.”

아르제오는 반지를 꺼내 레이라의 손가락에 끼우며 말했다.

“청혼서가 빗발친 탓에 이런 말 지겨울 수도 있지만, 내가 하면 안 지겹지?”

자신에 찬 그 말에 그녀는 픽 웃으며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게요. 남편으로 받아 달라는 말은 처음 들어서 괜찮네요.”

또다시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결정을 내리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었다.

이 사람도 변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같은 일을 반복하지는 않을까. 그럼 또 그런 기분을 느끼며 버려지진 않을까.

그런 불안감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불안감마저 짓누르는 기대감이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일을 반복하지도, 자신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다르다.

그렇기에 레이라는 웃으며 아르제오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좋아요.”

미소를 머금은 대답에 아르제오는 몰래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아 보여도, 어찌나 긴장되던지 손끝이 다 굳은 느낌이었다.

“전에도 제오는, 남은 시간을 저와 함께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 사람과 함께라면, 힘든 일이 있어도 웃겠구나.

아르제오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뭔데요?”

“이제 곧 갈 폐하와의 티타임에서 우리의 약혼을 밝히려고 해. 그래도 될까?”

이어진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괜찮을까요?”

“괜찮게 만들 거야. 이제 난, 그대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니까.”

그녀야말로 그에겐 자유였다.

“그러니 말씀드리고, 그대와 함께 공작령으로 가고 싶어.”

더는 레이라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만이 간절했다.

“알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제오가 한시름 놓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할 말 있어요.”

“뭔데?”

그에 레이라는 웃으며 아르제오의 손을 끌어당겨,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제오, 저와 결혼해 줄래요?”

“진짜…. 설레게.”

작게 중얼거린 그는 레이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내 눈매를 접으며 웃은 아르제오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기꺼이.”

그리고 대답과 함께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 * *

리히덴의 황제가 친히 시간을 내어 함께 하게 된 티타임.

화려하게 준비된 디저트와 차를 앞에 두고도 레이라는 마음 편히 웃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리에는 황제뿐만 아니라 로렌스와 루이스도 함께 했으니.

“그 유명한 포레스티아 공녀를 이렇게 보게 되는군.”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는 사람 좋게 웃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이야기를 들었지만, 로렌스는 줄곧 무표정했다.

“이번 평화협정에, 공녀의 공이 크다고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폐하.”

“1황자가 조금 과격하게 나간 경향이 있지만, 너그러이 여겨 주시게. 리히덴 역시, 포레스티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니.”

“…예, 폐하.”

레이라의 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포레스티아령을 손에 넣는 이에게 선위할 거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리히덴의 황제는.

저런 말을 하니 그 사실을 새삼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레이라의 어색한 미소를 살피던 아르제오가 대뜸 말을 꺼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그러자 차를 즐기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아르제오를 향했다.

레이라가 잔뜩 긴장한 듯 보이자, 아르제오가 그녀의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포레스티아 공녀와 결혼하겠습니다.”

갑작스럽게 티 테이블에 던져진 폭탄 발언에 황제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뭐…?”

“그녀와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이 찰나 침묵이 맴돌았다. 하지만 금세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참 좋은 소식이로구나. 포레스티아 공녀와 혼인하면 두 제국의 사이가 더욱 돈독해질 것이야. 잘했구나.”

호탕하게 웃으며 아르제오를 칭찬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마냥 순수하지 않았다.

레이라는 발루아의 황족이 아니었다.

하지만 국경을 지키는 공작가의 사람이니 리히덴이 더 유리한 위치에 오를 거라 계산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 그런 황제의 뜻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래, 날은 언제로 잡고 싶으냐? 가능한 빠른 것이 좋겠는데.”

“공작령으로 가, 공작 부부께서 허락하셔야지요.”

덤덤한 아르제오의 대답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싫다고 하시겠느냐? 결혼은 공녀와 약속한 것이니, 공녀는 널 마음에 둔 것이겠지?”

황제의 물음에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폐하.”

그녀의 대답에 황제는 표정을 풀며 다시 만족감에 젖었다.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아직 누구 하나 혼인하지 않으니 걱정이었는데 말이야. 공녀가 이리 와 준다니 안심이다.”

“리히덴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뭐…?”

아르제오의 말에 황제가 다시 얼굴을 구겼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표정이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결혼한 뒤엔, 제가 공작령으로 가겠습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넌 리히덴의 황자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황위에 오를 것이 아니니 제가 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곳에 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르제오의 반발에 황제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리히덴의 황자가 어찌 발루아로 간단 말이냐! 혼인하면, 응당 여인이 남편의 가문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하니 공녀가 리히덴으로 오는 것이 맞아!”

루이스는 난감한 얼굴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고, 로렌스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줄곧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지 않던 로렌스가 레이라에게 말했다.

“공녀, 꼭 공녀의 자리를 지켜야겠는가? 이리 폐하와 황자 사이를 갈라놓으면 쓰나. 자신의 자리보다 아르제오를 더 위해야 하지 않겠나? 아니면, 꼭 공녀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레이라는 똑바로 로렌스의 시선을 마주했다.

자리를 위한다.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국경의 숲에서 만났을 때, 그녀가 로렌스에게 했던 말이었다.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위하는 것이 아니냐고.

숲에서 그녀가 한 말을 꼬집는 것이었다.

“그곳에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이곳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어진 아르제오의 말에 황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에, 얼른 루이스가 나섰다.

“그러고 보니, 공녀는 제국에서 약초를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효능이 아주 뛰어나다지요?”

“예, 전하.”

“차후에 그 귀한 약초를 리히덴에서도 받으려면, 공녀가 계속 발루아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색하게 웃으며 하는 루이스의 말에, 황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지만, 루이스가 말한 약초 소식에 다시 머리를 굴렸다.

‘붙잡아 둘 방법이 영 없는 건 아니지.’

속으로 다른 이익을 계산하던 황제는 곧 너그러이 미소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공작가로 청혼서가 빗발쳤다지. 네가 직접 가서 허락을 받는 건 좋은 생각이겠구나.”

거기까지만 말한 황제는 더 자세한 얘기는 나중으로 미뤘다. 그러고는 공작가에 둘이 다녀오는 것을 허락했다.

어찌 되었든, 포레스티아에게는 호의적이어야겠다는 생각에.

곧이어 정무 때문에 황제가 먼저 자리를 뜨고, 티타임을 가지던 자리에는 네 사람만이 남았다.

“그, 약초는 앞으로 어떤 것들을 공급할 예정입니까?”

숨 막히는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것을 참다못한 루이스가 레이라에게 물었다.

“치료에 도움이 되는 약초라면 조금씩 모두 손을 댈 생각입니다.”

황제가 돌아가고, 루이스가 전환한 화제에 레이라는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약초들, 돈을 받고 판다지?”

고고한 자태로 차를 머금은 로렌스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겨우 조금 풀어진 분위기를 다시 얼리는 로렌스를 루이스가 원망스러운 듯 흘겨보았다.

로렌스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대단한 성인군자라도 되는 듯 국민을 위하는 척 굴더니. 그건 그냥 장사치가 아닌가?”

“형님, 그건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결국, 루이스가 나서자 로렌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공작가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 많은 약초를 돈을 받고 판다는 말인가? 넘쳐나는 재산을 더 늘릴 셈인 게지.”

“전하.”

잠자코 로렌스의 말을 듣던 아르제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뒷말을 잇기 전에, 레이라가 그의 손을 가만히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똑바로 로렌스를 마주하며 말했다.

“그러시다면, 로렌스 전하의 생각을 들려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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