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다지 희망이 없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굳이 말로 들으니 신경에 거슬렸다.
굳은 표정의 로이드가 살기를 드러내며 엘라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찌르는 듯해, 엘라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건 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시골구석에 처박혀 살라고?’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수치도 참기 힘들었고, 앞으로 남은 인생이 캄캄하기만 했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엘라는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그 여자한테는 이미 다른 남자가 있어요!”
로이드가 홧김에 제 목을 내리친다 해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제게 아첨 떨던 귀족들은 이런 사태를 막는 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포레스티아 공녀를 끌어내릴 때만 해도 세상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여자예요! 다시 데려오실 수는 없을 거라고요!”
“…안다.”
서늘한 표정의 로이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로이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전에 레이라가 황궁으로 그를 찾아왔었을 때, 집무실 앞에서 엘라와 대화를 나눴었다.
엘라는 그때도 새로 만나는 남자에 대해 떠들었고, 이를 곁에서 지켜본 시종장의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시종장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로이드도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결국엔 모든 것이 제 탓이니.
“아, 아신다고요…? 아시는데 절 왜 내쫓으시려는 거죠? 어차피 그 여자가 다시 황궁에 올 리도 없는데…!”
“그 여자라는 호칭은 듣기 거북하군.”
대답 대신 돌아온 말에 엘라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레이라가 다시 돌아오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열심히 받아먹은 걸로는 모자라서 못 가겠다는 건가?”
“제가 무얼…!”
“그동안 다른 귀족들에게 황후의 권력을 내세우며 받아먹은 것들까지 모조리 빼앗아야 허튼소리를 멈출까.”
반박하려던 엘라는 분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로이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황후가 되기 전부터 귀족들의 뇌물을 받아 왔던 것, 그리고 그것들을 받고 어떤 일들을 해 주었는지.
하지만 그런 로이드라도 이건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호칭을 지적했던 로이드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엘라는 그녀를 공녀라고 지칭하기도 싫었다. 마지막 자존심에 가까웠다.
“리히덴과 내통했다고 해도요?”
“뭐?”
“그렇게 되면, 죄인이지요! 황후는커녕 공녀로도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정황을 목격한 증인도 있어요!”
“…….”
인상을 찌푸린 로이드는 경멸의 눈으로 엘라를 내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얘기를 들을 가치도 없겠군. 치워.”
“예, 폐하.”
“제게 이러실 수는 없어요! 그 여자는 죄인이에요! 적국과 내통한 죄인이라고요!”
로이드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엘라를 지나치자, 세실이 황궁 경비병들을 불러 엘라를 끌어냈다.
“폐하! 폐하께서 제게 이러실 수는 없어요! 제가 어떻게 폐하 곁에 남았는데! 독까지 마셨어요! 폐하!”
독을 마시면서까지 로이드의 곁에 남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레이라를 내쫓을 때 엘라를 이용했으니.
그렇다고 엘라가 한 짓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로이드는 그 길로 집무실로 사라졌다. 병사들에게 엘라를 넘긴 세실도 그 뒤를 따랐다.
질질 끌려 나오면서도 엘라의 눈에는 불꽃이 일었다.
‘다른 이를 통해서라도 그 여자의 죄를 밝힐 거야. 나 혼자만 당할 줄 알고?’
늘 언제나 고요하고 차분하던 레이라의 얼굴이 떠올라, 엘라는 극에 치닫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 * *
리란타를 떠난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곧장 제도로 향했다.
제도에서는 루이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과 달리 환대를 받으며 제도로 들어선 레이라는 황궁으로 초대되었다.
“황궁까지 방문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핀 레이라가 말하자, 루이스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발루아와 리히덴의 평화협정이 이루어지는 데에 큰 공을 세우셨잖습니까.”
루이스의 말에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이라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보고할 것도 있고.”
“그래요?”
“응.”
‘근데 왜 작게 말하지?’
보고할 일이라면, 보고할 대상은 루이스나 황제 폐하일 텐데.
조금 의아했지만, 레이라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리히덴에 계시는 동안, 이 궁에 머무시죠.”
루이스는 정원이 아름다운 작은 궁을 소개하며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제오의 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형님.”
“왜? 틀린 말은 아니잖아?”
“잘하셨다고요.”
“그렇지?”
“기왕이면 아예 제 궁이 좋았겠지만요.”
“그건 아직 이르지.”
키득거린 루이스는 레이라에게 마저 궁을 소개했다.
지내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사람들도 다 준비시켜 놓았고, 궁 밖 출입도 크게 제한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 제오와 궁 밖 나들이는 다녀오셔도 됩니다.”
“좋네요.”
이번엔 레이라도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궁에 머물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번 평화협정에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레이라는 스스로 큰 도움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어색하게 웃는데, 시간을 확인한 루이스가 말했다.
“그리고 폐하께서 함께 티타임이라도 갖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그런가요? 준비하고 가는 게 좋겠네요.”
“지금도 무척 아름다우십니다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원하시는 대로.”
생글 웃으며 건네는 루이스의 칭찬에 아르제오가 뚱한 얼굴로 흘겨보았다.
“제게만 아름다우면 그만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대가 그러고 싶다면 그리해. 거기, 따라서 공녀님의 치장을 도와라.”
“예, 황자 전하.”
부드럽게 미소 지은 레이라가 곧 걸음을 옮겼다.
“금방 다녀올게요.”
에반이 그 뒤를 따라 사라지자, 유진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폐하께서 먼저 얘기를 꺼내신 겁니까?”
“당연하지, 귀한 공녀님이니 말이야.”
루이스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유진은 조금 불안한 듯이 시선을 돌렸다.
잠시 떨어지는 것도 아쉬운지, 레이라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르제오를 보며 루이스가 작게 웃었다.
“치장하는 데도 따라가려고?”
“안 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고 싶은 얼굴이기에.”
픽 웃은 루이스는 아르제오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걸음을 뗐다.
“너도 간만에 폐하를 뵙는 거니 제대로 차려입고.”
“예.”
루이스는 시간 맞춰서 레이라를 데리고 오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녀가 치장하는 사이, 아르제오도 시중을 받으며 준비를 마쳤다. 여행길에 입고 있던 편안한 복장 대신, 고귀한 신분이 드러나는.
평소에는 그냥 내리고 있는 머리도 깔끔히 빗어 넘기니 더 날카로워 보였다.
“이야, 공녀님이 반하시겠네요.”
준비를 마친 아르제오를 보며 유진이 익살스럽게 웃었다.
“모르는 소리 마. 내 걱정이나 해야 할 판이니까.”
“예? 왜요?”
“그렇지 않아도 예쁜데 치장하면 얼마나 더 예쁘겠어. 조심해야지….”
길게 심호흡까지 하며 하는 말이 진심인 듯 보여서 유진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임자 만나셨네.’
그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제오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심호흡까지 하며 레이라를 데리러 갔으니.
티타임에는 자신까지 갈 필요 없으니 유진은 내심 안심했다. 그런 불편한 자리에 절대 끼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아르제오는 긴장한 얼굴로 레이라를 마중 갔다.
그녀와는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으니 치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늘 공녀라기엔 조금 소박한 차림이었지만, 그마저도 지나치게 예뻤다.
“후….”
문 앞에 선 아르제오는 긴장을 풀어 보려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네.”
달칵, 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르제오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준비는 끝났….”
물론, 만들어 낸 그 얼굴은 곧 와장창 부서졌다.
말도 끝맺지 못한 아르제오는 멍하니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색과 같은 청록색 드레스는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늘 느슨하게 묶거나 풀고만 있었는데, 틀어 올린 머리도 퍽 잘 어울렸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은 아르제오는 레이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리 폐하를 뵙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그저 티타임인데 조금 과하지 않나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은 레이라가 물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그녀를 치장하던 시녀들이 그새 가까워졌는지 아니라고 아우성쳤다.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치장하지 않으신다니 너무 아쉬워요!”
“여기 계시는 동안 저희가 열심히 치장해 드릴게요! 아니, 하게 해 주세요!”
난감함에 웃는데도, 시녀들은 이미 레이라에게 마음을 빼앗긴 듯 매달렸다.
“크흠.”
시녀들의 태도에 정신을 차린 아르제오는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갈까?”
“네.”
시녀들에게서 레이라를 구출해낸 아르제오는 걸음을 옮기며 다짐했다.
‘긴장을 늦출 수가 없네.’
이토록 아름다워서 남자들이 들러붙을까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여자들도 경계해야 할 것 같았다.
“제오가 이렇게 차려입은 건 처음 봐요.”
궁을 나서며 레이라가 싱긋 웃었다. 그 말에 아르제오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그대는 너무 예뻐서 탈이야.”
“탈일 정도인가요?”
“그래, 그 정도야. 남자고 여자고 다 홀려 버리니 이를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아르제오는 한없이 진지하기만 한데, 레이라는 농담으로 들었는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궁을 나선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이끌고 황궁 정원으로 먼저 향했다. 뒤를 따라오던 에반은 아르제오가 눈짓하자, 거리를 더 벌렸다.
사전에 이미 얘기가 끝난 사항이었다.
“아직 늦진 않았나요?”
“응. 아직 괜찮아.”
아직 시간이 많다고 그녀를 안심시킨 아르제오는 후원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곳에는 꽃으로 장식된 작은 쉼터가 있었다.
유리로 되어 안이 비치는데, 겉이 꽃과 넝쿨로 장식되어 있었다.
꽃을 보며 기분 좋게 걷던 레이라는 그 쉼터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예쁘지?”
“너무 예뻐요.”
안에는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아르제오는 잔뜩 긴장한 것을 애써 감추며 레이라를 그 쉼터로 이끌었다.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꼭 그곳에서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