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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76)화 (76/122)

<76화>

공작저까지 찾아와 귀찮게 하기에 리히덴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알려지면 귀찮은 일이야 생기겠지만, 굳이 도망치고 숨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아르제오가 싱긋 미소 지으며 레이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이라가 몸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신기하니?”

“네! 마법사세요?”

“아니.”

천천히 고개를 저은 레이라는 손에 든 연보라색 씨앗을 다시 땅에 심었다.

그리고 흙 위에 올린 손에서 청록빛이 스며들자, 주변의 것들과 똑같은 향초가 자라났다.

“우와!”

아이가 환호성을 내지르자 다른 아이들과 노인까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또! 또 보여 주세요!”

“그럴까?”

“네!”

우렁찬 아이들의 대답에 레이라는 웃으며 다시 잎을 하나 떼어 씨앗으로 만들고는 땅에 심어 향초를 키웠다.

아이들은 요정님이라 기뻐하며, 노인들은 귀한 분이라며 웃었다.

“어찌 이런 신비로운 힘을 지닌 분이 오셨습니까.”

웃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레이라에게 말했다.

“땅의 정령께서, 저를 어여삐 보셨나 봐요.”

고개를 든 레이라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주변의 모두가 미소를 머금었다.

“실로 요정님이구나.”

“그렇죠? 그렇죠, 할아버지?”

“그래.”

아이들과 노인의 대화를 들으며 아르제오가 레이라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요정님이네.”

“놀리지 마세요.”

“내가 그랬나? 아이들과 어르신께서 하신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모른 척하는 아르제오를 레이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았다.

“요정처럼 예쁜 건 사실인데, 뭐.”

씩 웃은 그는 돌연 그녀의 뺨이 쪽, 입을 맞췄다.

“제오!”

“왜? 입술이 더 좋아?”

그 말에 레이라는 재빨리 제 입술을 가렸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은 듯 노인이 웃으며 은근슬쩍 아이들의 눈가를 가렸다.

아이들은 다시 까르륵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씨앗을 달라고 졸랐다.

레이라가 나누어 주는 씨앗을 아이들과 함께 심고 그녀가 향초를 키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레이라와 아르제오를 만난 아이들과 노부부는 집으로 돌아가 숲에서 있었던 일을 신나서 얘기했다.

그 이야기는 빠르게 리란타로 퍼져나갔다.

상인들이 넘쳐나는 그곳에서 소식을 접한 이들은 전부, 레이라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 * *

두 사람이 나들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자, 유진과 에반도 때마침 돌아왔다.

“보고는 마쳤나?”

“예. 루이스 전하께서, 천천히 휴식을 즐기면서 제도로 복귀하시라고 미리 전언 남겨 놓으셨답니다.”

“좋네.”

만족스럽게 웃은 아르제오는 슬쩍 시선을 에반에게로 돌렸다.

에반은 공작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었으니까.

네 사람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는 휴식을 위해 각자 방으로 향했다.

“크흠….”

레이라의 방으로 함께 들어서는 아르제오를 본 에반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못 본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낫겠지.’

얕은 한숨을 내쉰 에반이 재빨리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전하, 왜 그리로 가십니까?”

그런 에반 대신 물은 건 유진이었다.

“…….”

보아하니, 정말 몰라서 물은 건 아니고 눈치 없는 척하며 일부러 묻는 얼굴이었다.

“그러게요. 제오 방은 이 옆이에요.”

“어?”

아르제오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레이라가 싱긋 웃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문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는 말했다.

“하루만이라고 했었는데요?”

“그랬어도 줄곧 같이 있었잖아.”

투정 부리듯 말하는 것이 귀여워 레이라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벌써 둘만의 세상에 빠진 것 같아서 뚱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던 유진은 서둘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저기 끼어 있겠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이다.

“언제 누가 그대를 노릴지 모르니 내가 계속 같이 있어야지.”

“밤에도 날 노려요? 절 찾는 사람들은 전부 제 환심을 사려 하는 이들일 텐데도요?”

장난기 어린 레이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아르제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장난치는 것도 귀엽네.’

매 순간이 귀여워 보여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물러설 생각이 없던 아르제오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작게 속삭였다.

“우리가 문 앞에서 계속 이러고 있으면 두 사람도 쉬지 못할 텐데?”

그 말에 레이라는 에반과 유진의 방 쪽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막아서고 있던 문가에서 물러났다.

아르제오는 짙은 미소를 머금으며 조용히,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잘 준비를 마치고 함께 침대에 누운 레이라는 빤히 아르제오를 응시했다.

“왜?”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누운 그가 물었다.

“평화협정이 이대로 안정되면, 정말 포레스티아령으로 올 건가요?”

“응.”

아르제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안 된다고 하면, 그대의 섬은 어때? 시타델 섬. 이제 그대 소유라고 했잖아.”

“섬이요?”

“응. 둘만 있을 수 있어서 난 좋은데.”

마침 저택도 새로 지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픽 웃은 레이라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르제오가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약초를 보러 가야 하는데….”

졸음 푹 잠긴 목소리였다. 아르제오는 결국 팔을 뻗어 레이라를 품에 안았다.

“있죠, 레벤의 씨앗도 제오 혼자 찾는 게 아니라 같이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네. 이제 얼른 자.”

“잘 자요.”

곧 레이라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아르제오는 이대로 제도에 들렀다가 곧장 함께 발루아로 넘어갈 셈이었다.

아마도 이런 그를 알아서 루이스는 레이라를 이곳에 더 붙잡아 두려 할 터였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디든 함께 있기만 한다면 상관없었다.

아르제오는 잠든 레이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더는 못 기다려.’

제 손에 자유가 주어질 때까지 언제고 기다리란 말인가. 기다림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다.

다음날 숙소를 나서는 그들을 발견한 어느 상인이 재빨리 레이라에게 다가섰다.

물론 그러다가 에반 경의 검을 보고 몇 발짝 뒤로 물러나야 했지만.

“공녀님, 공녀님 맞으시죠?”

“무슨 일이세요?”

유진이 마차에 짐을 싣는 걸 힐끔거리며 상인은 제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공녀님의 약초가 효능이 아주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부디, 그 약초를 저희에게도 팔아 주십시오!”

상인의 말에 레이라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저들이 원하는 제 능력은 숲의 복원인 줄 알았다. 실제로도 그럴 테고. 모두가 제 나라의 국경에 침입자를 막아 주는 숲을 원했으니.

하지만 약초는 다른 얘기였다. 레이라도 차근차근 약초 거래처를 늘릴 생각이었다.

“어느 나라 출신이시죠?”

레이라의 물음에 상인은 희망에 찬 눈으로 답했다.

“플레타 왕국입니다!”

“차후에 플레타 왕국의 의사들과 먼저 약초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죠.”

무턱대고 상인과 먼저 거래할 수는 없었다. 저들이 제 약초를 악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녀의 대답에 상인은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굽신거렸다.

“의사와 논의한다고 해도, 그 후에 거래에는 상단이 개입하는 것이 피차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운반 문제도 있으니까요.”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에 아르제오의 시선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레이라의 앞을 막아서려는데, 그녀가 한발 빨리 말했다.

“하지만 거래를 지금 당장 진행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 하죠. 그쪽 상단의 이름을 받아 두도록 할게요. 일을 순서대로 진행하면서 필요해지면 이쪽에서 연락하죠.”

그 말에 상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종이에 제 상단 이름을 적어 건넸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종이를 받아든 레이라는 곧 아르제오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다급히 멀어져 가는 상인의 모습을 힐끔거린 에반이 물었다.

“정말 저 상인과 거래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어깨를 으쓱인 레이라는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그냥 물러서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 쉬이 물러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두지만, 선택권은 이쪽으로 가져왔다.

그들이 레이라를 이렇게 빨리 찾아낸 건 조금 의외였지만, 조금 귀찮은 일이 생길 뿐 다른 문제는 없었다.

곧 마차가 출발했고 그들은 리란타를 벗어나기 전까지 수도 없이 마차를 세워야 했다.

제발 자신들과도 거래해 달라며 마차에 뛰어든 이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레이라는 그들 모두에게서 똑같이 상단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들이 탄 마차를 뒤따르는 짐마차에 쪽지들이 넘쳐날 만큼 말이다.

* * *

“황후를 폐위토록 하겠다.”

로이드의 발언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앞서 세실이 홀든 후작가가 저지른 비리와 범죄들을 읊은 참이었으니, 감히 나설 수 있는 이가 없었다.

“홀든의 영지를 몰수하고, 후작위에서 박탈하겠다.”

맨몸으로 쫓겨나는 것과 같았다. 그에 세실이 덧붙여, 그들을 발루아 끝자락의 백작령으로 유배 보내고 향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남은 일평생을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살란 뜻이었다. 그러면 목숨은 붙여 주겠다고.

국정 회의가 끝난 뒤, 로이드는 집무실로 향했다.

“아직도 청혼서가 빗발친다던가?”

“예, 폐하.”

뒤따르는 세실의 대답에 로이드가 나지막이 혀를 찼다.

“공작가로 찾아오는 이들도 여전히 있고?”

“공녀님께서 공작가에 없다는 걸 안 뒤로는 줄었다 합니다. 대신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고들 합니다.”

“귀찮게 하는군.”

레이라를 리히덴으로 보낸 건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어차피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날파리들이 꼬이는 건 보기 싫었다.

“폐하.”

집무실에 다다를 즈음, 그 앞에 선 엘라가 다급히 로이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폐위라니요!”

“어째서 아직도 여기 있지? 이미 처분이 결정됐을 텐데.”

로이드가 눈짓하자 세실이 움직였다.

“그만 돌아가시죠.”

“이대로는 못 갑니다! 제게 독을 먹이시면서까지 그 여자를 쫓아내시더니, 이번엔 저를 내쫓으시려고요? 절대 못 가요!”

비명처럼 내지르는 말에 로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충분히 이득을 보지 않았나?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이다.”

엘라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로이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표독스러운 눈으로 로이드를 노려본 엘라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저를 내치셔도! 그 여자를 다시 곁에 두지는 못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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