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한참이나 손부채질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킨 아르제오가 레이라에게 말했다.
“크흠, 우리도 이제 나가자.”
“어딜요?”
“여긴 처음이잖아. 구경시켜 줄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들뜬 얼굴의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천진하기만 한, 어린아이 같아서.
제가 나고 자란 이 제국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한 어린아이 말이다.
“좋아요.”
간단히 나갈 채비를 한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숙소를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그저 평범한 데이트 같았다.
리란타가 활발한 상업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곳을 지나는 수많은 상단 덕이라고 아르제오가 설명했다.
치안이 잘 되어 있고, 제도로 향하는 길목에 강도단이 없었다. 그곳은 특별히 순찰하는 치안대가 많다고.
그러니 자연스레 강도로 노려지는 일도 없고, 변두리 지역에서 제도로 올라가는 길에 꼭 이곳에 머물고 가는 상단이 많았다.
게다가 리란타의 특산물인 향주머니는 타국에서 인기가 좋았다.
아르제오는 레이라에게 향주머니를 보여 주기 위해, 상인들이 상시 넘치는 상점가로 들어섰다.
“이쪽은 정말 사람들이 많네요.”
평민들의 시장 거리를 구경할 때도 이토록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저 인파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레이라가 중얼거리니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늘 사람이 많지.”
“항상 이 정도로요?”
“거의 그래.”
상점가를 슬쩍 훑은 레이라는 이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었다면 이렇게 사람들로 넘쳐나는 곳에 온종일 있으면 지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조용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었고 거리의 사람들은 다들 활기가 넘쳐 보였다.
“어….”
아르제오의 손을 꼭 붙든 채 인파 속을 걷던 레이라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르제오를 올려다보니 그가 씩 미소를 머금었다.
“어때?”
“민트 향이 나요.”
“그렇지?”
은은한 민트 향이 거리 곳곳을 메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간혹 꽃향기가 섞여서 시원하면서 향기로운 향으로 가득했다.
인파 속에 섞이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던 레이라지만, 어느새 향기에 매료되어 활짝 웃고 있었다.
이러니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활기찰 수밖에.
향주머니를 제조하는 곳도 있었지만, 판매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는데, 주머니가 각양각색이었다.
거리를 지나는 내내, 코도 즐겁고 눈도 즐거운 셈이었다.
“확실히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겠네요.”
그리고 귀족들이 즐겨 쓰면, 돈 많은 평민들도 찾게 되어 있었다.
‘리히덴에는 좋은 물건이 많아.’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환경이 열악한 곳이 많았다. 소수만 득을 보고, 다수는 괴로워하는.
그러니 이리 좋은 물건들이 많은데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이리 활기차게 떠들고 웃어도 고통받는 이들은 있을 터였으니까.
색이 고운 망에 향초를 넣은 향주머니처럼 독특한 모양도 많았다.
그것들을 구경하며 걷는데, 돌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가씨! 레이라 아가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레이라는 놀라 돌아보았다.
리히덴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맞네! 아가씨!”
하지만 손을 붕붕 흔들며 달려오는 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딘, 제롬!”
“어떻게 리히덴에 계십니까?”
딘이 달려와 반가운 얼굴로 레이라에게 물었다.
“여행 중이에요.”
“다시 뵈니 반갑네요!”
“저도 반가워요, 딘.”
방방 뛰는 딘의 뒤로 한껏 인상을 찌푸린 제롬이 달려왔다.
“딘! 멋대로 달려 나가면 어쩌자는 거야!”
“제롬! 여기 봐! 아가씨야!”
뒤늦게 레이라를 발견한 제롬은 놀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이곳에서 다시 뵙네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제롬도 잘 지냈죠?”
“크흠!”
인사를 나누는 세 사람의 뒤로 아르제오가 들으란 듯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딘과 제롬의 시선이 레이라의 뒤에 선 아르제오를 향했다.
“아, 일행이 함께 계셨군요!”
“제오, 이쪽은 일전에 필의 소개로 발루아까지 동행했던 상단 사람들이에요.”
레이라의 소개에 아르제오는 서늘한 눈으로 두 사람을 훑었다.
“그리고 이쪽은….”
“연인.”
딘과 제롬에게 아르제오를 소개하려 고개를 돌린 레이라의 말을 뚝 잘라먹으며 그가 말했다.
“예?”
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는 사이, 상황을 파악한 제롬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야, 저희가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군요!”
“아뇨, 딱히 그렇지는….”
“그러네. 그럼 이만 가는 게 어떤가.”
서늘하게 내뱉는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오랜만에 만났는데, 함께 차라도 할래요?”
“아니?”
딘과 제롬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아르제오가 했다.
“제오에게 묻지 않았어요.”
“내 의사도 물어야지. 나도 동행해야 하는데.”
레이라가 고개를 돌려 노려보는데도, 아르제오는 모른 척 시침을 뗐다.
“그…. 저희는 일이 있어 이만 가 봐야 합니다. 혹 제도로 가실 거라면, 후에 상단주와 함께 인사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 일 끝났잖…. 으아악!”
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하자, 제롬이 딘의 발을 힘껏 짓밟았다.
곤란한 레이라와는 반대로, 아르제오는 제롬의 태도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럼 아가씨,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뵙겠습니다.”
“아니, 제롬 잠깐…. 아가씨!”
안타까운 딘의 외침을 무시하며 제롬이 우악스럽게 딘을 끌고 갔다.
붙잡을 새도 없이 두 사람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자, 레이라가 고개를 홱 돌려 아르제오를 노려보았다.
“제오.”
짐짓 엄한 그녀의 목소리에 아르제오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제오.”
하지만 재차 레이라가 불렀을 땐, 더 이상 대답을 피하지 못했다.
“왜, 뭐.”
부러 뚱한 얼굴로 퉁명스러운 말투에 레이라는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뭐가, 그렇게 반가워할 필요는 없잖아.”
제 발이 저린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 도움받은 적이 있으니 당연히 반갑죠. 정말 이럴 거예요?”
화가 난 듯한 레이라의 태도에 아르제오는 은근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레이라의 손끝을 붙잡았다.
“…그대가 내 손을 놓잖아.”
손끝을 살포시 붙잡는 손길에 레이라가 입술을 비죽였다.
‘…귀여워.’
어찌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손끝을 겨우 잡을까.
그의 태도에 레이라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 아르제오의 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자, 됐죠?”
“…응.”
아르제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멀리서 다시 딘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아가씨!”
이에 아르제오의 표정이 다시 빠르게 식었다.
“딘?”
빠른 속도로 달려온 제롬이 우악스럽게 딘의 입을 틀어막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부득이하게 다시 찾았습니다.”
“제게요?”
“예.”
제롬은 슬쩍 아르제오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니 제롬이 말을 이었다.
“사방에서 아가씨를 찾고 있습니다. 타국에서 온갖 상단을 동원해, 아가씨와 접촉하려 들 겁니다.”
“여기까지요?”
“아가씨께서 여기 계신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러겠지요.”
레이라가 질린 얼굴을 하자, 아르제오가 그녀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괜찮아.”
그저 짧은 한마디였는데도 레이라는 안심이 되었다.
“혹시 모르고 계실까 걱정되어서 딘이 전하려던 모양입니다.”
“푸학, 그 정도는 내가 말해도 되잖아!”
가까스로 제롬의 손을 떼어 낸 딘이 빽 소리쳤다.
“넌 분명 쓸데없는 소리를 할 테니까.”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지 딘이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둘 다. 조심할게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잠깐…!”
딘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은 듯했지만, 제롬은 인사를 건네고는 가차 없이 딘을 끌고 사라졌다.
인파 속에 남은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느긋하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려고 했더니, 여기까지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다니.
“그만 돌아갈까?”
“그러는 게 좋겠어요.”
이 인파 속에서 계속 있다가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경계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잠깐만.”
그렇게 말하더니 아르제오는 레이라와 손을 붙든 채, 가장 가까운 향주머니 상점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작은 꽃 모양의 향주머니를 구매하고 나서야 그곳을 벗어났다.
그 길로 아르제오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리란타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숲으로 향했다.
“이런 곳도 있네요.”
“향초를 기르는 곳이 이 도시에는 중요하니까.”
“이 숲에서 향초를 재배해요?”
“아니. 재배는 다른 곳에서 하지만, 이곳에도 천연 향초들이 있지.”
산책로를 따라 걷는 레이라의 표정은 좋았다.
사방에서 그녀를 찾고 있다는 말 따위는 잊은 듯이.
숲의 청량한 풀 내음과 더불어, 은은한 민트 향이 풍겨 왔다.
그 숲의 향초들은 리란타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향기롭고 활기찬 상점가도 나쁘지 않았지만, 레이라는 이쪽이 더 좋았다.
“저쪽이야.”
산책로를 따라 쭉 걷다 보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던 향초가 나는 곳이 나왔다.
듬성듬성 연보라색의 잎을 지닌 향초가 풀숲에 있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까르륵거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이나, 산책을 즐기는 노인 정도가 다였다.
향초를 채집하려는 이들은 없었다.
연보라색 잎의 향초로 다가선 레이라가 허리를 숙였다.
은은한 민트 향에,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향이 정말 좋아요.”
“그러네.”
향초를 바라보는 레이라와 달리 아르제오는 그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닢 받아 가도 될까요?”
“그럼. 이곳은 리란타 주민의 산책로니까. 가끔 아이들이 집에서 향주머니를 만들기 위해 채집하기도 해.”
“그럼 저도 사양 말고 받아 가야겠네요.”
생긋 웃은 레이라는 향초 꼭대기에 달린 연보라색 잎사귀 하나를 땄다.
코에 가까이 대어 향을 확인한 레이라는 그걸 손으로 덮어 곧 씨앗으로 만들었다.
“우와!”
까르륵거리며 주변에서 저들끼리 놀던 아이 하나가 함성을 내지르며 레이라에게 달려왔다.
“어떻게 한 거예요? 네? 향초 잎이 씨앗으로 변했어요!”
아이가 방방 뛰며 큰 소리로 말하자, 함께 뛰놀던 아이들과 주변을 산책하던 노인들도 관심을 가졌다.
“괜찮겠어?”
주변의 반응을 확인한 아르제오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여 물었다.
아이를 바라보던 레이라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귀찮기는 하겠지만, 지금의 전 숨지 않아도 되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