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냥요.”
과거를 떠올렸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던 레이라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아르제오는 구태여 캐묻지 않고 화제는 돌렸다.
“잘 잤어?”
“…네. 제오는요?”
“난 잘 못 잤어.”
레이라는 잘 못 잤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한마디에 머릿속을 배회하던 잡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왜요?”
아르제오는 몸을 일으켜 레이라의 귓가로 바짝 다가갔다.
“떨려서.”
부러 작게 속삭이니 레이라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하며 한쪽 눈을 감았다.
그는 낮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대가 옆에 있으니 말이야.”
레이라도 픽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침 먹고 출발할 거죠? 제오는 치안대에 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 유진이 갔어. 난 대외적으로 얼굴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건, 자유롭기 위해서였나요?”
“맞아. 그래서 대외적인 일 처리는 유진이 했지. 그러니까 오늘도, 우리는 해안가를 느긋하게 산책하고 여유롭게 제도로 가면 돼.”
어서 준비하자며 일어나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유진이 고생이 많겠다고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인질 구출과 인신매매범을 소탕했으니, 아르제오도 근심을 덜었다. 게다가 레이라와 함께 있으니 오히려 나들이를 나온 기분이었다.
유진이 돌아온 직후, 그들은 마차를 타고 해안가로 향했다.
아직 날이 퍽 쌀쌀했지만, 잠시 해안가를 산책하기에는 괜찮았다.
“두 분 다녀오시죠. 저희는 이곳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해안가 근처에 마차를 세우고, 두 사람이 내리자 유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역시 아주 유능해.”
그 말이 퍽 마음에 드는 듯 아르제오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라가 미안한 기색으로 에반과 유진을 바라보니, 그가 얼른 그녀를 이끌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겠어요.”
두 사람이 해안가로 가자, 유진은 묵묵히 선 에반 경을 힐끔 바라보았다.
엄청 고지식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너그럽게 넘어가 주는 것이 신기해서.
아르제오는 해안가로 들어서자 바람이 많이 불어서, 제 재킷을 벗어 레이라에게 둘러 주었다.
괜찮다는 그녀에게 아르제오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한 번쯤 꼭 해 보고 싶었다고.
레이라는 이렇게 이 해안가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른 채로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었다.
폭풍우에 휩쓸린 뒤, 눈을 떴더니 낯선 사람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가 이렇게까지 제게 큰 자리를 차지할 줄은 몰랐지만.
“예쁜 곳이었네요.”
“전에 봤을 땐 안 예뻤어?”
“그런 생각할 정신이 없었죠.”
“하긴, 그랬지.”
그러고 보니, 막 정신을 차렸을 때의 아르제오는 그다지 친절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레이라는 제 입술을 매만지더니 아르제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제오가 친절하지 않았어요.”
“아닐걸?”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는지, 아르제오가 시선을 도르륵 굴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초면에 엄청 무례했던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난 그저 그대가 전설의 인어쯤 되는 줄 알았을 뿐인걸?”
“갑자기 무슨 인어요?”
레이라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뚱한 얼굴로 묻자, 아르제오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너무 예뻐서.”
능글거리는 그의 미소에 레이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오는 은근히 생각하는 게 얼굴에 드러나는 거 알아요?”
“내가?”
“네. 여기서 그 숙소로 돌아간 뒤에, 제 이름을 밝혔더니 제오가 꽤 기뻐했거든요.”
“아주 시기적절하고 알맞은 사람한테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하긴 했지.”
“그 호의 덕분에 목숨은 건졌으니까 넘어가 줄게요.”
“간만에 나한테도 너그럽네.”
레이라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이 인적이 드문 해안가에서,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했다면.
만일 정신을 차린 자신이 어디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길을 헤매기만 했다면.
바다에 빠져 죽지 않았어도, 체온이 떨어져 죽었을 터였다.
“제가 제대로 말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뭐가?”
“살려 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아르제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정말이지…. 그때, 그대를 발견해서 다행이야.”
그렇게 잠시 해변을 걷던 두 사람은, 곧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숙소도 둘러볼래?”
“아뇨, 괜찮아요.”
“그래?”
고개를 젓는 레이라는 에반과 유진을 힐끔 바라봤다.
이번에는 전처럼 시간에 쫓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반과 유진을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는 마차가 출발하고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린 듯 기대 가득한 얼굴로 레이라에게 물었다.
“그럼 대신, 제도로 가는 길에 커다란 상업 도시가 있어. 거기는 들렀다 가자.”
“그래요?”
“그쪽에서 유진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좋아요.”
아르제오는 그곳이 이전에는 귀족들에게 쫓기고 숨어다니느라 소개하지 못했던 곳이라고 덧붙였다.
이번에야말로, 레이라는 리히덴을 천천히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폭풍우에 휩쓸려 사라진 죄인도 아니었고, 밀입국한 적국의 귀족도 아니었다.
“화친이 자리 잡을 때까지 있겠다고 했지?”
“정해진 일정은 없어요. 시타델 섬의 약초들이 조금 걱정이지만요.”
“…그럼, 섬에만 갔다가 다시 리히덴으로 와도 되는 거 아니야?”
아르제오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레이라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갈 곳 잃은 그의 눈이 허공을 배회하다 마차 바닥에 떨어졌다.
“글쎄요.”
레이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돌렸다.
함께 있는 미래를 서로가 그리고 있었지만, 쉬이 얘기를 꺼낼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레이라는 아르제오와 함께라면 거기가 발루아든 리히덴이든 크게 상관없었다.
그녀는 이제 어딘가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황궁에도, 유배지에도.
그저 하고 싶은 일만 있을 뿐.
그들의 마차가 아르제오가 말했던 상업 도시, 리란타에 들어설 즈음 그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대가 원하던 그 꽃씨 찾아줄게.”
처음 리히덴에서 함께 그와 이동 중에 말을 꺼냈던 라벤의 씨앗을 말하는 거였다.
아르제오가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예상 못 해서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픽 웃었다.
“기대할게요.”
리란타는 제도만큼은 아니었지만, 레이라가 리히덴에서 보았던 어떤 도시보다도 활기찼다.
느긋하게 머물 거라며 그들은 숙소를 먼저 잡았다.
유진에게 일을 지시하는 아르제오를 힐끔거린 에반은 레이라에게 다가섰다.
“아가씨,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공작님께 여기 상황을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라를 잠시 응시하던 에반은 다시 아르제오를 힐끔거렸다.
“…아가씨께서는 문제없으시리라 믿습니다만…. 아직 이렇다 할 얘기가 오가지 않았으니, 선을 지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반의 말에 레이라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네?”
“그, 제가 주제넘은 말씀을 올리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 당부하신 바가 있는 만큼 그저 조바심에….”
우물쭈물하는 에반을 보며 레이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걱정하시면서 며칠 전에는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
“예? 호, 혹시 벌써…”
“에반 경.”
“아, 예.”
“호위에 관한 것만 신경 쓰시면 돼요. 아버님께서 경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는 에반을 보며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두 사람의 일에 그다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듯 보였다.
그러니 콜키 지역의 숙소에서는 얌전히 물러났던 것이었다.
하지만 포레스티아 공작가에 보고를 보내려니 조금 걱정스러웠다.
공작은 물론, 기사들 중에서 에반을 들들 볶을 이들이 몇 명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에반 경이 곤란하지 않으려면, 서둘러 우리 관계를 정리하는 방법도 있겠네요.”
“…주제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처참한 표정을 짓는 에반 경을 보며 레이라가 픽 웃으며 기사의 팔을 가볍게 토닥였다.
“농담이에요. 하지만 정말로, 공작가의 누가 경에게 무슨 말을 했든, 그런 건 문제 되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예, 아가씨. 다녀오겠습니다.”
레이라가 에반을 배웅하고 나니, 아르제오가 서둘러 유진의 등을 떠밀었다.
제게 너무하시는 것이 아니냐며 항의하던 유진은 끝내 숙소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고선 그녀에게 다가선 아르제오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 거야?”
다짜고짜 묻는 말에 레이라는 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들었어요?”
“들렸어.”
“그저 에반 경이 곤란해하기에 한 말이에요.”
“그럼 호위를 위해서 우리 관계를 정리하는 거야?”
희미하게 좁혀진 미간.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어쩐지 화가 난 듯한 표정에 레이라는 고개를 기울였다.
“화났어요?”
“아니.”
“화난 것 같아 보이는데요.”
“…….”
애써 입꼬리를 올리던 아르제오는 한숨과 함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왜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레이라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마저 어여뻐서 아르제오는 어쩐지 조금 더, 억울해졌다.
“…정리하겠다며.”
한참 만에 돌아온 아르제오의 중얼거림에 레이라는 더욱 고개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왜요?”
“그, 그게 왜요? 날 정리할 생각인 거야? 왜? 내가 뭘 잘못했어?”
이어진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어쩐지 대화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시선을 도르륵 굴렸다.
“잠깐만요, 제오.”
“청혼서가 빗발쳐도 나만큼 괜찮은 사람 없다며.”
“그건 제오가 한 말이에요.”
“어쨌든.”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은 태도에 레이라는 손을 뻗었다.
그대로 아르제오의 양쪽 뺨을 감싸 쥔 그녀는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뭘 오해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정리가 아니라, 애매한 지금의 사이를 확실하게 정의 내린다는 뜻이었는데.”
“…….”
말똥말똥 뜬 눈으로 레이라를 바라보던 아르제오는 돌연 얼굴을 화르르 붉혔다.
그러고는 붉어진 제 얼굴이 부끄러운지 서둘러 제 얼굴을 가리고는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를 보며 레이라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제발 이번 건 놀리지 말고 그냥 넘어가 줘.”
“글쎄요. 제오 하는 거 봐서요.”
아르제오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한참이나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